아래 글은 자캐오 신부가 2019년 12월 22일 용산나눔의집·길찾는교회에서 '버려지고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시작된 새로운 세계와 관계, 임마누엘'라는 제목으로 전한 대림 4주일 설교문에 내용을 덧보태 정리한 것입니다. 성서 본문은 공동번역개정판 기준으로, 1독서 말씀은 이사 7:10-16, 2독서 말씀은 로마 1:1-7 복음 말씀은 마태 1:18-25입니다. 허락을 받아 전문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대림 4주일, 오늘 우리는 네 번째 대림초까지 모두 불을 밝히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를 읽고 듣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인 마태오의 복음서에는 요셉과 그의 꿈에 나타난 천사가 주요 인물로 등장합니다.

오늘 복음서 이야기는 그들이 나눈 대화가 핵심인데, "법대로 사는 사람"이라 불린 요셉은 오늘 매우 놀랍고도 당혹스러운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꿈에서 주의 천사가 그를 찾아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 한목소리로 읽어 봅시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어라. 그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마태 1:20b-21)."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요? 오늘 복음 말씀의 앞부분을 읽어 보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대략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경위는 이러하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을 하고 같이 살기 전에 잉태한 것이 드러났다. 그 잉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낼 생각도 없었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다(마태 1:18-19)."

오늘날 지구상 77억 명 되는 사람들 가운데 거의 1/3인 25억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구세주이자 신'으로 믿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경위가, 놀랍게도 '아버지가 누군지 알 수 없는 탄생'이었습니다.

오늘날에 비해 매우 보수적인 고대사회에서 아기 예수는 그를 잉태하게 된 어머니 마리아에게 당혹스러운 존재였고, 그 마리아의 정혼자인 요셉에게는 '유대인의 법'에 어긋나는 부정한 존재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얽힌 이와 같은 난감한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도교 교회와 신자들에게도 꼭 풀어야 할 숙제와 같았을 겁니다. 그래서 저자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고대 교회의 한 복음 해설서는 이 탄생 이야기에 다음과 같은 해설을 덧붙였습니다. 우리, 한목소리로 천천히 읽어 봅시다.

"마리아의 언행을 아는 요셉은 마리아를 나쁘게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아이를 가진 걸 생각하면 마리아를 좋게만 여길 수도 없었습니다. 요셉의 마음은 오락가락했습니다. 마리아와 관계를 그대로 이어 가기도 두려웠고, 마리아를 내칠 엄두도 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요셉에게도 계시가 필요했던 까닭입니다." ('마태오복음 미완성 작품' 강해 1., <교부들의 성경 주해: 신약성경 Ⅰ>, 74쪽.)

매우 보수적인 고대사회였고 결혼 전이었지만, 요셉은 마리아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정혼자인 마리아가 아버지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임신을 했다는 사실에 무척 당황합니다. 요셉이 알고 있던 마리아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그 때문에 요셉은 마리아를 '간음죄'로 고발하는 관례를 따르는 대신, 남들은 모르게 조용히 파혼하기로 합니다. 이와 같은 요셉의 선택은 그를 "법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고대 교회는 그가 율법의 정신과 지향을 잘 이해한 선택을 했다고 보았던 겁니다.

그는 법적인 구속력이 있는 정혼자에게 받은 상처와 배신감을 온전히 자기 몫으로 삼기로 합니다. 꽤 놀라운 일이죠. 그런데 그런 요셉만큼, 아니 그보다 더 당혹스러웠을 마리아의 반응은 요셉을 능가하고도 남을 만큼 더 놀랍습니다.

'동정녀 또는 처녀의 잉태'라는 사건에 대한 마리아의 반응은 루가의 복음서에 나오는데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한목소리로 천천히 읽어 봅시다.

"그러자 천사는 다시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중략) 이 말을 듣고 마리아가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자 천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성령이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그 거룩한 아기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고들 하였지만, 그 늙은 나이에도 아기를 가진 지가 벌써 여섯 달이나 되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다.' 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루가 1:30-31, 34-38a)."

처녀인 자신에게 하느님의 은총인 성령이 임하시고 그로 인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예수를 낳게 될 것이라는 천사의 전언에, 처음에는 당황하던 마리아는 곧이어 그 전언을 적극 수용합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야훼 하느님의 은총인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리며 하느님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할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는 믿는 이들에게 참으로 놀랍고 신비한 일의 연속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이 놀랍고 신비한 일을 믿을 수 없는 이들에게 이 탄생 이야기는, 당시 사회에서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실패한 이들이 자신들의 실패담을 합리화하며 포장한 그럴듯한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지금보다도 더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이었던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법적인 구속력이 있는 약혼을 한 여성이 다른 사람의 아이를 배면 '간음죄'로 처벌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간음죄는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도 매우 심각하게 여기며 하느님나라에 참여하지 못할 만큼 큰 죄로 여겼죠(히브 13:4).

그러니 천사들의 전언, 그에 대한 마리아와 요셉의 증언 그리고 이를 전해 듣고 기록하여 전한 고대 교회와 신자들의 믿음을 빼면,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는 꽤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말 그대로 간음죄로 처벌당할 수 있었던 마리아와 아기 예수, 그리고 믿었던 약혼자에게 배신당한 요셉의 이야기만 남게 됩니다.

당시 사회와 율법의 기준에서 벗어난 이들, 그로 인해 율법을 따르는 이들에게 '실패한 존재'로 낙인찍혀 버림받을 수밖에 없던 이들이, 바로 마리아와 아기 예수 그리고 요셉인 겁니다. 이처럼 당시 사회에서 실패한 존재들의 이야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가 갖는 또 다른 맥락입니다.

이들은 '내몰린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사회 주류나 법, 관례가 허용하는 일반적인 이야기에서 벗어나, 또 다른 삶이 있는 언저리로 내몰린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아기 예수는 이전처럼 살 수 없게 되었죠.

그래서 제게 성탄 이야기는 '돌아갈 곳 없이 내몰린 사람들'이 주인공인 거룩한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은 이 시대와 사회에서 '돌아갈 곳 없이 내몰린 사람들'과 함께 성탄 이야기를 되새겨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오늘 우리가 이번 성탄절에는, 이처럼 '버려지고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시작된 새로운 세계와 관계'에 초점을 맞춰 성탄 이야기를 만나 보자고 말씀드립니다.

그 당시 사회에서 부정한 존재로 낙인찍혀 버려질 수밖에 없었던 마리아와 아기 예수, 그리고 그로 인해 실패한 존재가 된 요셉은 서로에게 새로운 기회와 관계가 되어줍니다. 마리아는 아기 예수에게, 요셉은 마리아와 아기 예수에게, 그리고 마리아와 아기 예수는 요셉에게 당시 사회가 당연하게 여기던 관례를 뛰어넘어 '새로운 기회와 관계'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처럼 '당혹스러운 이야기'를 뒤집어 '놀랍고 신비한 이야기'로 살아 낸 마리아와 요셉을 통해,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의 임마누엘 신앙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고대 교회와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라는 신비와 기적을 통해 야훼 하느님께서 자신을 적극 드러내셨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임마누엘'을 그 시대의 신비와 기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였던 거죠. 그래서 교회의 스승 중 한 명인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설을 덧붙였습니다.

"성서는 실제 사건을 이름으로 표현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런즉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 것을 보게 되리라는 뜻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가운데 계셔 왔지만, 이처럼 뚜렷이 모습을 드러내신 적은 없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마태오복음 강해' 5,2-3., <교부들의 성경 주해: 신약성경 Ⅰ>, 77쪽)

고대 교회와 신자들은 이처럼 놀랍고 신비한 임마누엘 사건을 통해,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의 놀라운 초대가 시작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오늘 2독서인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강조되듯이, 임마누엘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 될 은총과 평화란 이 땅의 모든 생명과 존재들에게 베풀어질 '선물과 같은 초대'라고 이해했습니다.

고대 교회의 스승 중 한 명인 펠라기우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하는데요. 우리, 한목소리로 천천히 읽어 봅시다.

"바울로는 모든 믿는 이들의 사도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을 치우쳐 사랑하지 않으시고 모든 이를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그들은 자기가 거룩해져서가 아니라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아 성도가 되었습니다. 바울로의 인사말은 하느님의 은혜를 상기시키고, 우리가 거저 죄를 용서받았으므로 그 은혜가 우리 안에서 완전하게 남아 있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중략) 바울로는 또한 유대인들과 다른 민족들이 모두 같은 은총을 받았으므로 서로 화목하게 지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펠라기우스, '로마서 주해 단편', <교부들의 성경 주해: 신약성경 Ⅷ>, 67쪽)

그러므로 사랑하는 용산나눔의집과 길찾는교회 식구 여러분, 오늘 우리는 고대 교회와 신자들이 만났던 임마누엘 사건을 또 다르게 만나는 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2019년 성탄절을 맞이하며 임마누엘 사건을 또 다르게 만나기 위해, 우리가 거리에서 함께 노래한 성모 마리아 송가를 되새기기를 부탁드립니다.

이번 대림 절기는 잠시 쉬었지만, 우리는 지난 몇 년간 대림 절기와 사순 절기마다 거리에서 억울한 사연으로 싸울 수밖에 없는 분들과 함께하며 거리 기도회를 드렸습니다.

거리 기도회가 주로 저녁 시간이라 우리는 그곳에서 저녁 기도를 드리며 성모 마리아 송가를 자주 부르곤 하죠. 우리 함께 성모 마리아 송가를 저와 한 소절씩 번갈아 가며 낭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오며, ◯ 내 마음이 나를 구원하신 하느님을 기뻐합니다.
2. 주께서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으니, ◯ 이제부터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할 것입니다.
3. 전능하신 분께서 내게 큰일을 행하셨으니 ◯ 주님의 이름 거룩하십니다.
4.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 대대로 구원의 자비를 베푸십니다.
5. 주께서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6.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 보잘것없는 이들을 높이셨습니다.
7. 굶주린 사람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 부유한 사람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8. 주님은 약속하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 주님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9. 주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토록 자비를 베푸십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저는 기가 막힐 정도로 억울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오랜 시간 싸워온 거리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성모 마리아 송가를 부르다가, 이 대목에서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과 생각에 빠져들곤 합니다.

"주께서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으니, ◯ 이제부터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할 것입니다."

돈과 권세를 가진 자들의 억지와 횡포 앞에서 바람막이나 방패 하나 없이 말도 안 되는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 그런 거리의 사람들과 함께 이 대목을 부를 때면 당혹감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무슨 정신 승리도 아니고, 당장 아무것도 달라진 것 없이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신이 나를 돌보고 그 때문에 모든 사람이 나를 복되다고 한다니 말이 안 되는 황당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우리가 함께 읽은 루가의 복음서에 기록되어 전해지는 마리아가 겪은 상황이 바로, 제가 느끼는 복잡 미묘한 감정과 생각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당황스러운 상태입니다.

하느님께서 다짜고짜 '하느님의 힘'이란 뜻을 가진 천사 가브리엘을 마리아 앞에서 나타나게 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고 당황스러운 상황인데, 천사 가브리엘이 입을 열어 전하는 하느님의 메시지가 난감합니다.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루가 1:28b)."

갑자기 나타나 전한다는 말이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라뇨. 성서가 전하는 마리아의 반응은 제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마리아는 몹시 당황하며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루가 1:29)."

그러자 천사 가브리엘이 다시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 부분을 함께 읽어 봅시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가 1:30b-31)."

하느님의 은총도 좋고 아기도 좋습니다. 문제는 이 메시지를 전달받은 마리아가 쉽게 수긍할 수 없는 조건이 있다는 부분입니다.

"이 말을 듣고 마리아가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가 1:34)"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약혼자가 있는 처녀에게 '네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미혼모가 된다'라는 하느님의 메시지는 어떤 의미로 전해졌을까요?

이 메시지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에 가까운 사건입니다. 당시 기준으로는 약혼자 요셉에게 당장 파혼당할 수도 있고, 사람들에게 부정한 여인으로 낙인찍혀 목숨을 위협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라뇨.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라뇨. 여러분은 이해하실 수 있나요?

저는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 4년째 동행하고 있는 이주 노동자 식구들이 이 땅에서 자주 부딪히는 비아냥거림, 멸시하는 듯한 눈빛과 손가락질을 '마리아도 당하지 않았을까' 궁금했습니다.

거리 기도회에서 해고 노동자분들과 성모 마리아 송가를 부를 때마다, 어딘가에서 꿈틀거리는 복잡하고 미묘한 느낌이 '마리아에게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7년간 공개적으로 함께하고 있는 성소수자 길벗들이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정죄당하고 믿음으로 이성애자가 될 수 있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와 분노를 '마리아도 느끼지 않았을까' 궁금해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성서가 기록하여 전하는 마리아는 제 예상과는 달랐습니다.

"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루가 1:38)."

별일 없이 잘 살고 있는데, 갑자기 천사가 나타납니다. '하느님의 힘'이란 이름을 가진 천사가 인생에 개입해 들어옵니다. 그리고 은총을 가득 받았다느니, 하느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느니 하며 메시지를 전하는데, 그 메시지는 결국 죽을지도 모르는 낭떠러지 끝으로 마리아를 밀어냅니다.

이처럼 천사가 전한 하느님의 메시지가 위험이 가득한 상황으로 이끌어 간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그 하느님의 메시지가 이 자리에 있는 우리를 어제의 안온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도록 밀어낸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더 당황스러운 건 마리아가 그토록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메시지를 수용하자, '하느님의 힘'이란 이름을 가진 천사가 떠났다는 겁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젊은 미혼모가 겪을 수 있는 매우 위협적인 상황으로 밀어내더니, 그 상황을 수용하자마자 '이제부터 내가 곁에서 항상 너를 지켜 주겠다'도 아니고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라뇨.

그런데 생각해 보니 제 주변에는 이런 일이 많습니다. 해고 노동자분들이나 성소수자 길벗들, 그리고 우리 미등록 이주 노동자 식구들은 저 또한 그렇게 부르기는 해도 사람들이 부르는 '명칭'만으로 모두 담아낼 수 없는 삶과 일상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또한, 그렇게 이름 붙여 불리기 전까지 남들과 별다를 바 없는 날들을 살던 존재들이었죠.

그런데 어떤 특징적인 조건들로 인해, 그런 조건들을 드러내는 명칭이 붙여져 불리며 살기 시작하면서 '다른 존재'가 되고 남들과 같고도 다른 삶과 일상을 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오늘날 한국 사회 기준에서는 그 특징적인 조건들이 그들을 매우 위험한 상황으로 밀어냅니다. 그 조건만으로 위협적인 상황에 노출되며 살게 합니다.

이 땅에서 해고 노동자, 성소수자, 미등록 이주 노동자로 불리는 순간, 그렇게 불리기 전이나 이후나 크게 달라진 것 없는 똑같은 사람이고 늘 그렇고 그런 일상을 사는 사람인데, 더 이상 그럴 수 없기도 한 '다른 존재'이자 '특별한 존재'가 됩니다.

해고 노동자, 성소수자, 미등록 이주 노동자는 본인이 적극적으로 원해서 그리 사는 게 아닙니다. 그저 지금, 이 순간, 이 땅에서 정한 '어떤 특정한 기준'과 다른 삶을 사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또 다른 삶과 일상을 살게 된 사람들은 각자 방식으로 신의 메시지를 마주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그랬듯이 '그게 왜 나죠?'라고 반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제 곁에 있는 사람들은 그냥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큰 삶의 질문과 일상의 싸움 가운데 신의 도움은커녕 신이 떠나 버린 것 같은 고독과 마주하고도 그 질문과 싸움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질문과 싸움을 각자 방식으로 품고 수많은 위험과 위협에 맞섰습니다. 각자가 마주하는 사회의 한계를 조금씩 넘어, 마침내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는 증언을 이뤄 내고 있습니다.

이 사회의 한계 때문에, 미혼모라서, 해고 노동자라서, 성소수자라서, 미등록 이주 노동자라서 존재 자체가 '낙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낙인도 우리 각자가 '은총이자 축복인 존재' 자체라는 걸 어찌하지는 못합니다.

이 사회가 우리를 뭐라 하든지 포기하지 않고 싸워, 이 사회의 한계를 넘어 당연하고 평범한 삶과 일상을 스스로 얻어내고 있습니다. 해고 노동자, 성소수자, 미등록 이주노동자라는 이름에 갇히지 않고 동등한 사회의 구성원이 되는 과정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각자는 우리가 원치 않았지만, 이 사회의 한계가 맞서 싸울 수 있는 신의 메시지를 전해 받았는지 모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미등록 이주 노동자, 성소수자, 해고 노동자.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그러니 기억합니다. 이 사회가 우리 각자에게 뭐라고 하든지 그대는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입니다. 흔들림 없이, 아니 잠시 흔들려도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그렇게 우리는 어제와는 다른 세계를 약속하신 하느님과 동행하며 우리가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끝까지 싸워 이겨내, 오랜 세월 감추어져 있었던 진리를 드러내는 존재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와 사회가 오랜 세월 품어 온 한계를 넘어, 예언자들의 글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난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가 넘쳐나는 시대와 사회가 올 것이란 믿음의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로마 16:25-26).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라는 메시지는 '그러니 네게 아무 문제나 시련도 없을 거다'라는 게 아닙니다.

어떤 문제나 시련이 있더라도, 우리 존재를 부르는 이름이 지금은 잠시 비천한 취급을 받더라도, 우리 존재 그 자체는 그 누구도 함부로 비천하다 할 수 없을 만큼 '은총이 가득한 존재이며, 신이 함께하는 존재'라는 걸 기억하며 포기하지 않고 싸워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우리 이 시간,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마리아가 들었던 그 축복의 선언을 들려줍시다.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그러니 이제 우리, 그 오래전 고대사회에서 부정한 존재로 낙인찍혀 버려질 수밖에 없었던 마리아와 아기 예수, 그리고 실패한 존재가 된 요셉이 서로에게 새로운 기회와 관계가 되었던 것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오늘날 이 시대와 사회 주류의 통념적인 기준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낙인찍혀 버려지고 실패한 존재'로 사는 이들이 서로에게 새로운 기회와 관계가 되어 주는 놀라운 일들에 동참합시다. 어제로 돌아갈 수 없는 곳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서로에게 새로운 세계가 되는 놀라운 이야기에 함께합시다.

이 시대와 사회 주류의 통념적인 기준에는 '당혹스러운 이야기'를 뒤집어, '놀랍고 신비한 이야기'로 살아가는 또 다른 마리아와 요셉을 찾아 그들과 연대합시다.

그리고 우리도 그와 같은 마리아와 요셉이 되어, 이 세계와 우리를 또 다른 세계와 관계로 초대할 아기 예수를 잉태하고 환대합시다. 2000여 년 전에 버려지고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 내몰린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시작된 새로운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되어 살아갑시다.

"세상이 담을 수도 받아들일 자격도 없었던 분을 마리아만이 작은 방과 같은 자신의 태 안에 품을 수 있었습니다." ('마태오복음 미완성 작품' 강해 1., <교부들의 성경 주해: 신약성경 Ⅰ>, 79쪽)

우리 모두 오늘 이런 성서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잠시 묵상합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자캐오(민김종훈) / 용산나눔의집 원장, 길찾는교회 담당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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