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 논리는 명분과 실리를 모두 무력화하고,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만 작동하게 한다. 정치권의 진영 논리야 어제오늘 겪는 게 아니지만, 기독교계 진영 논리도 이를 교묘히 닮아 있다. 범복음주의 진영과 범에큐메니컬 진영 간 갈등과 긴장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협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정치권에서 여당과 야당이 서로의 멸망을 바라는 것처럼, 복음주의 진영과 에큐메니컬 진영 안에도 상대가 사라지게 되기를 기다리는 이들이 없지 않다.

독재 세력에 빌붙어 기득권을 지켜 온 일당들이 여전히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한국의 정치권에서 진영 논리는 때로 자신들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그래서 독재에 항거하며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한 이들 역시 한 축을 이루어, 나름대로 민주적 성과를 거두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도, 오늘에 와서 기득권 세력이라 비판받는 상황에 직면하니 경직된 진영 논리가 무익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얼마 전 역사를 가르치는 동료 교수에게 "우리 역사를 이끌어 온 하나의 동력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3·1 운동 100주년'에 즈음하여 이런저런 이야기 도중에 나온 그의 대답은 정말 뜻밖이었지만, 나와 함께 대화에 참여했던 이들은 모두 동의를 표했다. 그의 대답은 "그건 아마도 생존 욕망이죠. 이념이나 노선이나 진영이나 명분, 뭐 이런 게 아니고 자기가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이었다.

정치권에서 하루아침에 이념을 바꾸고 진영을 탈색하여 당을 갈아타는 모습은 놀랄 일도 아니다. 민주주의를 외치던 이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타락한 권력을 찬양하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들을 쏟아 내는 것을 보면, 그 생존의 욕망이 진영의 명분에 훨씬 앞서는 것이 분명하다. 노욕에 권력을 붙잡고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 발버둥을 치는 이들이 한때 민주 진영의 대표적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동료 역사학자의 말은 대충 증명되고 있는 듯하다.

복음주의, 미래가 있을까?

한국교회의 양대 진영이라면 복음주의 진영과 에큐메니컬 진영이다. 그 안에는 보수나 진보 세력이 포함되어 중간 지대가 있을 수 있지만, 대체로 양 진영에 흡수된다. 내가 중간에 전향(?)했다 하더라도, 따지고 보면 신복음주의 정도의 신학적 지향을 가지고 있다 생각함에도 에큐메니컬로 나의 신학적 정체성을 정합하는 것은 솔직히 말해 한국 복음주의 진영에 대한 정서적 반감 때문일 것이다. 그 기원은 대학 시절부터이다.

대학 신입생 시절, 당시 매우 흥했던 캠퍼스 선교 단체 중 한 곳에 잠시 적을 두었다. 그러나 나의 낭만적인 캠퍼스 생활은 박종철, 이한열의 죽음으로 끝이 났고, 지성을 앞세우며 현실을 외면하는 듯 보인 선교 단체의 애매한 태도에 지쳐 버렸다. 뻔히 보이는 악을 두고 진짜 악을 분별해야 한다며 신중하라고, 그리스도인은 운동권과 다른 방식으로 대응해야 한다 외치며 실상 아무 짓도 않는 그들의 이중적 태도가 복음주의에 대한 나의 태도를 결정지었다.

졸업 후 신학대학원을 거친 후에 잠시 유학하고 문화 연구를 매개로 연구원 활동을 한 적이 있었다. 이때 나는 다시 복음주의 활동가들과 만나게 되었고, 내가 학창 시절 알았던 복음주의와는 사뭇 다른 경험을 하며 시대적 감각과 판단력을 공유할 수 있었다. 복음을 통해 현실에 있는 모순의 원인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던 당시 그들의 열망이 나와도 큰 차이가 없어 보여 꽤 친밀한 대화와 토론을 나누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차이를 발견한 지점이 있다. '운동'의 조직과 실천에 대한 이해가 다르게 형성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이다. 내 입장에서 볼 때, 그 많은 단체에 참여하는 활동가는 대부분 겹치는 이들인데 매번 이름을 달리하며 조직을 형성하는 것 자체를 운동의 목적으로 인식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동원하고 조직하고 형성하여, 활동가들의 장을 형성하는 것은 결코 운동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과정이자 수단이다.

또한 내가 경험한 복음주의자 활동가들의 관심은 대부분 '교회'에 국한되어 있었다. 교회 개혁을 외치며 '교회'가 중심이 된 신학을 토대로 삼아 탈교회적 사태에 다다른 한국 사회의 변동과 교감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보다 더 공공의 방식으로 새로운 대안을 찾아내야 한다고 여러 번 제안했으나, '○○한국'과 같은 교회 중심의 대규모 동원 방식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며 이미 지역 공동체 운동에 관심을 가졌던 나로서는 더 이상 공감하기 어려웠다.

꽤 오래전 이야기들이지만, 나의 이 판단은 지금도 유효하다. 조금 더 신랄하게 말한다면,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들은 자신들 논리를 보전하려는 조직 운동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교회 개혁' 의제는 이제 한국 사회의 정치사회적 변화와 함께 고려되어야 하지만, 개혁적 복음주의든 근본주의적 복음주의든 대체로 다시 '교회 중심적' 관점으로 되돌아간다. 광장에 나가서도 복음주의 깃발 아래 자신들만의 공간을 점유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한국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은 크게 없어 보이지만 복음주의의 열정과 열성은 여전히 왕성하다. 혹시라도 동료 역사신학자 말처럼 '생존 욕망' 때문에 시효가 다 된 운영 체계를 억지로 연장하며 사용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마치 민주화의 훈장이 기득권이 되어 버렸다고 비판받는 정치권의 한 세력처럼, 복음주의 교회 개혁 운동도 이미 그리된 것은 아닌지 평가가 필요할 것이다.

북미나 영국에서도 주류 교회들은 감소하고 있지만 복음주의는 여전히 세를 유지하고 있다. 정치적 보수성은 비슷하지만, 북미 복음주의가 개인주의적 영성에 터하여 배타적 세력화를 꾀하는 것과 달리, 영국이나 유럽의 복음주의자는 이민자들에게 개방적이고 관대하며 여전히 전통적인 기독교적 가치를 사회화하는 공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 사회학자, 문화학자들의 대체적인 관점이다.

이에 비해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들은 일부 개혁적인 이들을 제외하면 대체로 개인주의적 영성과 분리주의적 신앙 행태를 보인다. 한국 사회의 변동과 상관없는 신앙고백을 보전하고, 개혁적이라 해도 한국 사회의 정치사회학적 변동의 추이를 진지하게 반영하지 못한다. 창의적인 방법에 대한 개방성은 높아졌지만, 교회의 정체성을 지키자는 구호와 선동에 막혀 본질적으로 이원론적 신앙 행태의 변화는 아직 요원하다.

복음주의 지도자 중 현직을 떠나지 못하거나 떠나서도 이상한 소리를 하는 몇 분을 보면 더욱 그런 확신을 갖게 된다. 칼뱅주의자니 개혁주의자니 하며 이원론적 신학을 문화 담론과 섞어 교묘히 관철하고, 새로운 교회론을 설파하는 척하지만 복음의 순수함을 훼손하면 안 된다며 앞서가지 말라고 발목 잡는 이들을 보면, 그저 '생존 욕망'이 그들의 '제1신학'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 때가 많다.

에큐메니컬, 과거를 잊었나?

진영 논리의 강박은 에큐메니컬 진영에서도 다르지 않게 작동한다. 학부 시절 1990년 서울에서 열렸던 세계교회협의회(WCC) JPIC(Justice, Peace and Integrity of Creation) 대회를 기웃거리다 에큐메니컬 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신학대학원에 가서도 당시 이형기 교수를 중심으로 형성된 에큐메니컬 신학 연구 동아리에 참여하게 동기화했고, 추후 제네바 보세이(Graduat School of Bossey)에 유학하게 되기까지 나의 신학 형성에 일정한 영향력을 공급한 것이 사실이다.

한국기독교회관이 있는 '종로5가'는 한국 에큐메니컬 운동의 본산이다. 한국 민주화에 진보적인 기독 지식인들이 참여했던 곳으로 사회변혁 운동으로서도 손색이 없는 역사가 자리하고 있다. 민주화 운동 시절에는 정권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도덕적 권위를 가진 곳이 바로 '종로5가'였고, 정치 1번지 종로의 위상도 이와 연동되어 있다. 바로 그 '종로5가' 에큐메니컬 운동은 복음주의처럼 진영 논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1910년 에든버러 '세계 선교 대회'로 시작되어 교회들의 일치와 협력을 위해 탄생한 WCC는 1960~1970년대 이른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신학에 반발한 복음주의 진영과 긴장을 유지해 왔지만, 최근에는 양 진영의 개혁 세력 간 창조적 협력이 두드러지고 있다. 그러나 양 진영의 주류 집단 간 협력과 상호 존중은 아직 더디다. 그동안 지역 교회와 큰 관련이 없는 중앙의 정치적 운동이라는 이미지가 에큐메니컬 운동에 각인된 탓이다.

상황적 요구에 치열한 삶으로 응답해 온 에큐메니컬 지도자들의 노고를 존경하는 것과는 별개로, 어쨌든 과거의 에큐메니컬이 지식인과 엘리트들 위주로 전개되어 왔고 지역 교회의 현실적 목회 현장과 교감하는 일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는 반성은 필요하다. 또한 일부 에큐메니컬 지도자들은 국제 무대에서 활동하는 것 자체를 운동으로 인식하였던바, 한국교회 에큐메니컬 신앙의 생활 운동을 향한 헌신은 약했다는 평가도 유효하다.

보세이의 내 지도교수는 우루과이 해방신학자 훌리오 드 산타아나였다. 독재에 투쟁하다 감옥살이한 경험도 있던 그는 1세대 에큐메니컬 학자로서 1998년 당시 제네바의 흐름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정신은 없고 조직만 남았다는 것이었다. 그는 과정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나에게 두 가지를 부탁했다. 제네바를 바라보지 말고, 한국에서 지역의 현장을 만들어 운동을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여러 번 유럽을 드나들면서도 제네바에는 들르지 않았다. 그는 한국 에큐메니컬 지도자들이 제네바만 바라보고 국제 활동에만 열을 올리는 것이 못마땅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이후로 한국에서도 제도적 에큐메니컬 운동보다는 내 나름의 영역에서 교회일치와 협력을 실천해 왔다. 문화·선교·도시 등의 영역에서 다양한 교단과 목회자들과 만나며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고자 했다.

때로 진영을 명확히 해야 할 때가 되면, 나는 기꺼이 에큐메니컬 진영에 가깝다고 말했으나 나의 활동과 신학적 색채는 복음주의 진영의 문법과 훨씬 가깝게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내가 '공공신학'을 추구하게 된 것도 어쩌면 이런 나의 혼종성과 불명확한 정체성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다만 복음주의 진영의 여전한 '교회 중심적' 사고와 에큐메니컬 진영의 변하지 않는 당파적 '형식 논리'는 내가 온전히 결별하고 싶은 지점이다.

에큐메니컬의 형식 논리는 복음주의를 열등하게 보고 자신들이 지켜 온 강고한 전통과 운동권 계보만 신학적으로 정당하다는 주장을 무의식적으로 옹호한다. 일반 회중에 호소하기보다는 정치인들과 영향력 있는 신학자들과의 협력관계를 통해 '선언문'을 작성하는 데 열을 올리며 만족한다. 종종 만나는 이런 '5가' 사람들의 무미건조함 때문에 그들과 대화하면서는 어떤 기쁨도 감사도 희열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창조적 긴장'으로서
'공공신학'하기

교수들이 뽑은 2019년 올해의 사자성어가 '공명지조共命之鳥'라고 한다.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머리 둘 달린 새인데, 한 머리가 다른 머리를 질투하여 독을 먹자 둘 다 죽어 버렸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상대가 죽으면 자기만 살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상대가 없으면 자신도 없다는 것이다. 두 머리는 '운명 공동체'로서 함께 살아야 한다. 상대방을 죽이려고만 들고 자기만 살려고 하는 한국 사회 모습, 특히나 정치권을 향한 일침이 아니겠는가.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컬 역시 이와 같다. '복음과 상황'을 복음주의 진영만의 정체성으로 제한한다면, '미시오 데이'를 에큐메니컬 진영에서 사용해 온 실천으로만 제한한다면 결국 서로를 향한 양 진영의 의심과 배제는 독을 마시고 둘 다 죽는 비극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다행히 최근 현란한 협력까지는 아니더라도 적극적 이해를 위한 양 진영의 실천은 이미 상황의 요청에 따라 이뤄지고 있다.

복음주의나 에큐메니컬 진영 모두 개혁교회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바울,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원형적 인물의 신학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다만 오늘의 시대에서 실천 방식에 따라 진영을 달리 할 수 있다. 그것은 어느 한 진영을 배제하는 것으로 성취되지 않는다. 양 진영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피차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것으로 성취된다. 나는 그것을 '공공신학'을 통해 이루고자 하고, 또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 운동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복음주의의 교회 중심적 집중성을 공론장으로 옮겨 와, 세상을 향하는 '하나님의 선교'에 그 열정과 열망을 동원하고 싶다. 에큐메니컬의 상황적 인식과 헌신을 지역사회의 구체적 현장에서 교회들이 다양하게 표현하는 실천적 토대로 삼기 원한다. 나는 그동안 '선교적 교회' 운동을 통해 양 진영의 차이는 정서적 거리에서 발생한 것이며, '제3지대'에서 만난다면 전혀 거리감 없이 새로운 소통을 시작하게 된다는 경험적 확신을 하게 되었다.

'공공신학'은 방법론이라고 누차 반복했다. 복음주의든 에큐메니컬이든 이제 공공의 요구에 응답하지 않을 수 없다. 상대적으로 에큐메니컬이 더 익숙한 영역이지만, 그동안 해 온 방식과 달리 일부 영향력 있는 엘리트 운동에서 벗어나 회중들이 함께할 수 있도록 눈높이를 맞추자면 오늘 한국 사회의 공론장 문법에 대한 겸손한 이해가 선행해야 한다. 이전과 다른 주체들과 관점들의 등장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에큐메니컬 진보 꼰대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복음주의 교회들과 지도자들은 왜 강남과 분당과 신도시에만 포진하여 크게 성장하는가? 물질적 토대가 신앙의 토대를 앞서는 것은 아닌지, 신앙의 성숙과 한국 사회의 정치사회학적 변동을 어떻게 매개할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부족하다. 최근에 '공공신학'도 '선교적 교회'도 또다시 진영으로 나뉘어 독점하고 배제하는 활발한(?) 활동들이 가세하는 것을 보면, '창조적 긴장'보다는 차라리 '창조적 파괴'가 더 묘수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진영 논리는 본래 양 진영이 지녔던 열정을 체제화하여 이데올로기화한다. 처음 마음은 사라지고, 진영 논리를 지키기 위해 끼리끼리 네트워크를 조직한다. '공공신학'은 시민사회 네트워크를, '선교적 교회'는 지역사회 네트워크를 참여의 장으로 여기지만, 과거의 진영 논리에 사로잡히면, 말만 바꾸어 네트워크라 칭할 뿐 여전한 조직 논리로 대응하게 된다. 나 또한 이런 자충수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남이 볼 때 똑같다 비판할 수 있다.

복음이 없다면 에큐메니컬 운동이 태동될 수 없었다. 복음적이지 않은 에큐메니컬 운동이란 사회운동이지 하나님나라 운동이라 할 수 없다. 둘은 결코 등치될 수 없다. 상황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없다면 복음주의는 교조주의로 전락할 것이다. 나의 '공공신학'은 현장과 실천을 향한다. 복음으로 새로운 삶을 사는 이들이 '교회'가 아니라 파송된 곳에서 파송된 곳의 문법과 언어로 하나님나라를 증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진영을 만들고자 함이다.

다음 마지막 글에서 새로운 진영 논리를 제안하고자 한다.

성석환 / 도시공동체연구소 소장,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