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평구청은 여명학교 건립 부지 확보를 위한 학교 용지 변경안에 보류를 결정했습니다. 의견을 모아 주시고, 민원을 적극 넣어 주신 주민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중략) 현재는 단지 '보류'인 상황이고, 서울시는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뉴스앤조이-박요셉 기자] 서울시 은평구 주민들이 가입해 있는 한 인터넷 포털 카페에는 여명학교(이흥훈 교장)를 반대하는 글로 가득했다. 은평구청이 여명학교 이전에 필요한 용지 변경을 보류하자, 주민들은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졌다며 자축했다. 그러면서 아직 사안이 완전히 정리되지는 않았다며 위기감을 부추기고 민원을 독려했다.

북한 이탈 청소년들에게 주어지던 배움의 기회가 지역 주민 반대에 부딪혀 흔들리고 있다. 여명학교는 3년 전부터 이전을 준비했다.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아파트 단지 최외곽에 350평 부지를 구해 학교와 체육관을 설립할 예정이었다. 이 계획이 주민들 반대로 무산될 위기에 놓였다.

북한 이탈 청소년에게
배움과 기회의 장, 여명학교
무료로 교육·숙소 제공
남한 사회 적응 도와

여명학교는 2021년 2월에는 지금 쓰고 있는 건물을 비워야 한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여명학교는 2004년 높은뜻숭의교회·남서울은혜교회·사랑의교회 등 20여 교회와 시민들이 북한 이탈 청소년을 위해 설립한 대안 학교다. 설립 후 많은 북한 이탈 청소년에게 교육과 기회의 장을 제공했다. 지금까지 290여 명이 학교를 졸업해, 한국에서 방송인·운동선수·교사·간호사 등 다양한 꿈을 펼치고 있다.

여명학교는 서울시교육청에서 학력 인증을 받은, 몇 개 안 되는 대안 학교 중 하나다. 교사 16명이 17~27세 청소년 84명을 가르치고 있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무료로 수업을 듣는다. 필요한 경우에는 기숙사에서 생활할 수도 있다.

북한 이탈 청소년 중 한국 문화가 낯설거나 한국어에 능숙하지 못해 진도를 못 따라가 정규 교육과정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이 여명학교를 찾는다. 생계 문제로 어릴 때부터 일을 했다가 뒤늦게 공부를 시작하는 20대 청년도 있다.

학교는 국·영·수뿐 아니라 북한에서 온 학생들이 남한 사회에 적응할 때 필요한 다양한 수업을 제공한다. '사회생활 첫걸음', '민주 시민 교육', '한국 법·경제 이론과 실천', '남과 북 역사 비교' 등이 대표적이다.

현재 여명학교는 서울시 중구 남산동에 있는 한 건물을 임대해서 쓰고 있다. 도심 한복판에 있지만 교육 공간으로 쓰기에는 열악하다. 공간이 협소해 학생과 교사 100여 명이 다닥다닥 붙어서 생활한다. 아이들이 체육 활동을 할 운동장이 없어 한강 고수부지나 시내 풋살장, 테니스장을 빌려서 이용하고 있다.

2021년 2월이면 이곳 임대 기간이 끝난다. 여명학교는 이전할 곳을 찾기 위해 2016년부터 서울시와 서울시교육청에 협조해 달라고 요청했다. 여명학교는 서울시에 등록된 학교이기 때문에 행정구역 안에 있어야 한다. 시 안에 폐교나 유휴 공간을 알아본 결과, 은평 뉴타운 외곽에 10년 가까이 방치된 서울주택도시공사(SH) 미분양 부지를 구할 수 있었다.

11월 말 공청회 이후
주민 반대 여론 확산
"탈북촌", "밀실 행정" 등
인터넷 카페 통해 거짓 정보 번져

여명학교 반대 여론은 공청회를 계기로 확산됐다. SH는 올해 초, '은평 뉴타운 재정비 촉진 계획'에 여명학교 이전 내용을 넣었다. 해당 부지가 편익 시설(주거 생활의 편익을 위해 이용하는 시설) 부지로 분류되어 있어, 이를 학교 부지로 변경한다는 내용이다. 은평구는 9월 24일 홈페이지에 계획을 공람하고, 11월 27일 공청회를 열었다.

공청회에 참석한 주민들은 동네에 북한 이탈 청소년 대안 학교가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반발했다. 은평구청이 공람한 계획에 '서울시 인가 대안 학교'라고만 표기한 점을 문제 삼았다. 주민들에게 사전 동의를 구하거나 고지하지 않고 학교를 설립하는 건 '밀실 행정'이라고 주장했다. 한 주민은 인터넷 카페에서 "주민들 의견을 완전히 무시하고 조용히 몰래 끼워 넣기 식으로 편익 시설 부지를 학교 부지로 무단 전용하는 것에 대해 강력히 항의해야 한다"고 썼다.

반대 여론은 인터넷 카페를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동정을 호소하며 여론 몰이를 한다", "간사하게 이간질을 한다", "지방에 내려가지 왜 땅값도 비싼 서울 아파트 단지에 들어오려 하느냐"며 여명학교를 비판하는 글이 올라왔다. "탈북촌이 형성된다", "일개 사립학교 재단에 특혜를 준다"는 등 거짓 정보를 퍼뜨리는 이도 있었다.

일부 주민은 청와대 홈페이지에 청원을 올리기도 했다. 이들은 "은평 뉴타운 내 여명학교 이전·신설을 반대한다. 뉴타운 주민을 위한 편익 시설 부지인데, 사단법인을 위해 임의로 용도 변경을 시도하는 자체가 어떠한 정치적 특혜가 있지 않았나 하는 의심까지 든다. 주민 동의 없이 현 부지를 임의 용도 변경하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668명이 청원에 동의했다(12월 12일 기준).

반대 여론이 확산되자 은평구는 12월 6일 부지 변경안을 보류했다. 사실상 여명학교 이전을 막은 것이다. 은평구청 관계자는 12월 12일 기자와 만나 "인근에 거주하는 주민들 반대 여론이 크다. 최근 구청 홈페이지와 전화로 반대 민원이 몰렸다. 주민들은 자신들을 위해 사용해야 할 편익 부지를 학교 부지로 변경하려는 점과 아파트 단지 인근에 북한 이탈 청소년 학교가 들어오는 점들을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고 했다.

인터넷 공간을 통해 반대 여론이 확산하고 있다. 인터넷 카페 갈무리

"서울시 내 폐교, 유휴 부지
알아봤지만 은평구밖에 없어
논란 일으켜 주민들에게 죄송
지역 친화형 학교 운영하겠다"

여명학교 측은 갑자기 등장한 반대 여론에 황망해하고 있다. 이흥훈 교장은 12월 11일 <뉴스앤조이>와 만나 "학교가 3년 전부터 법에 근거해 공유지를 구하고 이전을 추진한 건데, 밀실 행정이라는 지적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해당 부지는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수익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미분양 상태로 방치돼 있었다. 주민들이 누려야 할 편익을 빼앗는 것도 아니다"고 했다.

이 교장은 이번 일로 은평구 주민들에게 걱정을 끼친 점은 죄송스럽다고 했다. 그는 "우리가 은평구만 고집하는 게 아니다. 서울시 내 폐교나 유휴 부지를 찾았는데 적당한 곳이 은평구밖에 없었다. 주민들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고 싶고, 사회문제로 대두시키고 싶지 않다. 만약 운이 좋아 이전하게 된다면 모두 이웃이 될 텐데, 가급적 잘 지내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함께 만난 조명숙 교감은 "같은 어른으로서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아이들은 정말 착하고 순박하다. 길게 보면 앞으로 통일 시대 주역이 될 자산들이다. 은평구청은 '통일 상상 기지'라는 표어를 내걸고 있고, 조만간 통일박물관을 설립할 예정이다. 그런 지역이 왜 여명학교는 안 된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조 교감은 청와대 홈페이지에 국민 청원을 올렸다. 그는 국민 청원에서 "일부 주민의 오해로 여명학교 이전이 반대에 봉착했다"며 "은평구청과 협력하고 지역 주민들과 소통하겠다. 방학 때는 지역 학생들과 영어 캠프를 운영하고, 주민들에게 도서관과 주차장을 개방해 지역 친화형 학교로 만들겠다"고 호소했다. 이 청원에는 1만 6000여 명이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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