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신학위원회가 '사건과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시대적 요청에 대한 신앙고백과 응답을 신학적 접근과 표현으로 정리합니다. 매달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해 칼럼을 게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신학위원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번 주제는 '청년, 그들의 세상을 말하다'입니다.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

이 문장에 얼마나 동의하시는가? 이 문장으로 청년들과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는가? 이 문장에 동의한다는 것과 공감한다는 것, 특히 청년과 공감한다는 것은 상당히 다른 이야기다.

본 문장에서 '돈'은 자산의 의미를 갖는다. 사람의 생애 주기를 자산의 측면에서 본다면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 이는 청년들도 마찬가지다. 아니,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믿음의 영역이지 꼭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 청년의 현실이다.

청년이 이 문장에 동의한다는 것은 '통장 잔고'의 의미가 더 크다. 청년에게 통장 잔고란 그런 것이다. 자산은 없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통장 잔액이 0이 최저이기에 망정이지 엄밀히 말하면 청년의 자산은 마이너스인 경우가 더 많다.

이 사회의 모든 문제가 청년층에 축적·집약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청년이 겪는 문제는 다양하고 복잡하다. 그리고 청년이 겪는 모든 문제에서 청년 부채가 가중되는 방향으로 청년의 부담이 커지고 있다. 해결되지 않는 대학 등록금 문제가 학자금 대출을 부추기고, 정부의 정책적 노력으로 저금리로 쉽게 학자금 대출을 받게 되면서, 이는 부채에 대한 경각심을 무뎌지는 계기가 되고 있다. 제도권 교육에서 제대로 된 금융 교육을 받지 못하는 상황과 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민망하게 느껴지는 풍토에서 금융에 대한 첫 경험이 저축의 성취감이 아니라 부채인 셈이다. 청년에게 잘못된 인식을 줄 수 있어 위험하다.

부동산 문제에서도 최대 피해자는 청년이다. 축적된 자산이 없는 청년에게 내 집 마련의 꿈은 불가능이다. '월급 모아 집을 사는 세대'를 시작으로 '평생 모아 집을 사는 세대'를 지나 '빚을 내서 집을 사는 세대', 이제는 '빚을 내서 전세 사는 세대'가 되었다. 서글프게도 '빚내서 월세 사는 세대'가 보이는 듯하다. 무엇을 위해 빚을 내는지만 다를 뿐 생존의 필수적인 주거 문제 해결을 위해서 빚은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 부동산을 위해 대출을 받는 것은 당연한 전제가 되었고, 은행에서는 "월세 내느니 이자가 더 싸다"고 적극 권장하기도 한다.

학자금과 부동산만 보아도, 아니, 이 두 문제가 워낙 크기 때문에 한 청년이 여기서 부채가 발생했다면 그 청년은 빚에서 헤어나기 어렵다. 더욱이 최근 청년층을 대상으로 일정 규모의 자금을 지원해 주는 정책을 대부분 정부 보증 대출의 형태를 띠고 있어 청년 부채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온 사회가 나서서 청년 부채에 일조하고 있으니 가히 '빚 권하는 사회'인 것이다. 이렇게 대출을 권하면서도 상환할 때는 온전히 청년 개인의 책임이다. 부채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려면 부채 발생이 온전히 개인의 선택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온갖 감언이설로 부채를 권하는 금융자본과 이를 쉽게 용인해 주는 정부, 다른 대안이 없는 강요된 선택이었다면 청년이 가지고 있는 부채를 온전히 청년 개인의 탓이라고 할 수 없는 일이다.

부채는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이어야 한다. 부채가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적절한 빚은 자금을 유동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한다. 미래의 예상되는 소득을 앞당겨 사용한다는 점에서 앞날이 창창한 청년 개인에게는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일 수 있다. 문제는 '적절한가?' 하는 것이다. 빚을 내야 하는 일은 많고 규모는 커진다. 반면 청년의 미래 기대 소득은 그리 많지 않다. 노동시장에서 소외되고 미래 기대 소득을 모두 합산해도 학자금과 부동산을 감당하기 어렵다. 결국 청년 부채는 적절한 선을 넘어섰다. 청년의 미래를 모두 끌어와도 '숨만 쉬고 살아도' 방 한 칸 겨우 마련할 정도라면 청년은 희망을 품을 수 없다. 상황이 이러니 결혼과 육아까지 개인이 온전히 감당하고자 한다면 숨도 못 쉴 지경이 된다.

청년에게 희년이 필요하다. 답답한 현실에 숨통을 틔워 주고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해야 한다. 평생 부채에 옥죄어 살아야 한다면 노예와 다를 바 없다. 심지어 노예는 해방의 희망을 품지만 청년을 옥죄는 금융자본이 청년을 해방시켜 줄 리 없다.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인간처럼, 거대한 무언가에 의해 수확되고 평생 착취당하며 사는 모습이 연상된다.

청년에게 여유를 주는 방법은 다양하다. 앞서 언급했듯 다양한 문제가 청년에게 있다면 그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방향으로 청년에게 여유를 줄 수 있다. 청년 부채 문제를 청년 개인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이런 사회를 만든 책임을 돌아보자. 결국 청년 부채는 온 사회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문제이고, 모든 사회 구성원이 청년들에게 빚을 졌다는 부채감을 가지고 적극 나서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백승훈 / 데나리온BANK 실무조합원, 청년지갑트레이닝센터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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