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항거해 윤보선, 김대중, 정일형 등 정치인과 함석헌, 윤반웅 등 재야 원로 그리고 김승훈, 함세웅, 문정현 등 가톨릭 신부와 문익환, 문동환, 서남동, 이해동 등 개신교 목사는 1976년, 명동성당에서 '3·1 민주 구국 선언'을 발표했다. 당시 한국신학대학 교수였던 안병무 또한 이 일에 연루되어 중앙정보부 남산분소에서 열흘간 취조를 받은 후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서대문구치소로 이송되었다.1)

구치소로 이감 온 첫날 밤 취조받는 가운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안병무는 몹시 배가 고팠다. 그때 재소자 한 사람이 교도관 눈을 피해 빵을 던져 주었는데, 그 순간 안병무는 "주님께서 죄수를 보내 내게 성찬을 베푸시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당시 감옥에서 안병무가 만난 이들은 강도, 좀도둑, 소매치기, 강간범 등 익히 접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다.2) 안병무는 그들을 통해 "주님께서 베푸신 성찬"을 경험한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베푸신 성찬이라고 하면, 교회에서 성스러운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성직자로부터 받은 성찬을 생각하거나 하늘나라의 호화로운 식탁에 놓인 천국의 산해진미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물론 이 땅에서 사명을 다한 후 천국에서 주님께서 베푸실 화려한 식탁을 기대하는 것은 어색하지 않다. 그렇지만 이 땅에서 주님께서 베푸시는 식탁은 안병무의 고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 기대를 깨뜨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떤 산해진미보다도 소중한 음식이다.

주님께서 이 땅에서 베푸시는 성찬은 화려하지 않다.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으로 관계없음)

1965년 스물세 살이 된 권정생은 3개월 동안 밤에는 다리 밑에서 자고 낮에는 음식을 구걸하는 거지 생활을 한 적이 있다. 그 기간에 권정생에게 도움을 베푼 이들은 가난한 시골 사람들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나는 오랜 세월 병고에 시달려 왔기 때문에 직접 간접으로 사람들에게 많은 신세를 져 왔다. 집을 나와 거지 생활을 하던 그 당시도 친절을 베풀어 준 많은 사람들을 잊지 못한다. 상주 지방, 마을 앞에 우물이 있고 늙은 소나무가 있는 외딴집 노부부의 정다운 모습을 잊을 수 없어 <복사꽃 외딴집>이란 동화를 썼다. 열흘 동안 매일 아침마다 찾아갔지만 한 번도 얼굴을 찌푸리지 않고, 깡통에 밥을 꾹꾹 눌러 담아 준 점촌 조그만 식당집 아주머니, 가로수 나무 밑에 쓰러져 있을 때 두레박에다 물을 길어 헐레벌떡 달려와 먹여 주시던 그 할머니의 얼굴도, 뱃삯이 없다니까 그냥 강을 건네주시던 뱃사공 할아버지도 좀처럼 내 기억에 지워지지 않는 얼굴들이다. 이처럼 곳곳에 마음 착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얼어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3)

이는 권정생을 위해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성찬이 아니었을까. 당시 권정생은 죽음이라는 생각이 한순간도 떠나지 않을 만큼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병든 몸으로 정처 없이 떠돌며 구걸하는 삶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그가 거지 생활을 결심한 이유는 자신을 희생해 집안의 대를 이으려는 데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막내아들이라도 결혼시켜 집안의 대를 이음으로써 집안을 일으켜야겠으니 한 1년쯤 바람도 쏘이면서 나갔다 오라"는 부탁을 받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집을 나선 것이었다.4) 권정생은 자신의 고통을 "배고픔"이라는 말로 함축해 말했다. 당시 그가 쓴 시 한 편을 읽어 보자.

"새빨간 딸기밭이
보였습니다
고꾸라지듯 달려가 보니
딸기밭은 벌써
거둠이 끝난 다음이었습니다
알맹이보다 더 샛빨간
딸기 꼭지들이
나를 비웃고 있었습니다
불효자에겐
보아스가 룻을 위해 남겨줬던
그런 이삭조차 없었습니다
건너 산
바위 벼랑 위로
흘러가는 구름이
자꾸 눈앞을 어지럽힙니다
어머니
배가 고픕니다"

 - '딸기밭'

집을 나선 직후 권정생은 자신의 처지도 비참했지만, 자신에게 있는 보잘것없는 소유조차도 나누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모 기도원 앞에서 만난 나병 환자에게 기도원 등록비를 주고, 그와 함께 기도원에서 지내는 동안 먹을 것을 제공한 것이다. 집을 나온 뒤 그는 잠시 모 기도원에 머물렀다. 1963년 교회학교 교사로 정식 임명된5)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권정생은 성실하게 신앙생활했다. 자신처럼 결핵을 앓고 있는 친구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죽어 가는 상황6)에서 그는 하나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권정생이 기도원을 찾아간 것은 그곳에서 신유神癒를 체험해 건강을 회복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권정생은 기도원 입구에서 등록금 50원이 없어서 고개를 떨군 채 목발을 짚고 있는 청년을 위해 등록금을 내주고, 그와 함께 있던 3일 동안 먹을 것을 제공했다. 비록 매점에서 판매하는 날고구마를 사서 날것 그대로 먹는 것이었지만 말이다.7)

얼마 지나지 않아 권정생은 실망을 안은 채 기도원을 떠났다. 기도원에 들어온 지 3일 만에 더 이상 머물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아 떠나는 청년을 보면서 그는 "마치 그 넓은 기도원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권정생 자신도 더 이상 머물 수 없는 형편이 되자, 들어온 지 열흘 만에 기도원을 떠났다. 그때부터 권정생의 거지 생활이 시작되었다.

기도원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 권정생은 오히려 거지 생활을 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듯한 위로를 느꼈다. 당시 그가 쓴 시 한 편을 읽어 보자.

"밤안개 깔린
포플라나무 밑으로
가랑잎 없이 굴러갔습니다
그날
갈릴리의 밤은
저렇게 달려가는 자동차
헤드라이트의 불빛도
신호등 불빛도 없었겠지요
여우도 굴이 있고
날아가는 새도 깃들 곳 있다시던
그 갈릴리엔
넓은 하늘 반짝이는 별빛만이
오늘 밤도 그렇게 반짝입니다
사람의 손이 만든
콘크리트 다리 밑
오늘 밤은 거기를
빌어들었습니다
주님
어쩌면 이런 자리에
누추하게 함께 주무실런지요"

 - '내 잠자리'8)

권정생이 거지 생활을 하는 동안 사람들이 나누어 준 음식은 그가 생존하는 절대적인 양식이 되었다. 그야말로 주님께서 베푸신 성찬이었던 것이다.

권정생은 동화 작가가 된 후에도 한동안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74년 이오덕이 권정생을 이현주에게 소개하면서 처음으로 한 말은 "일 년에 총수입이 이천칠백 원이라 합디다"였다.9) 그 기간에 권정생은 종종 이웃들이 나누어 주는 음식을 받았다. 이현주가 권정생에게 "형은 지가 젤 불쌍하면서 남들 불쌍하다는 말만 해!"10)라고 핀잔을 주었던 것처럼 종종 권정생에게 음식을 나누어 준 이웃들도 빈곤한 삶을 이어 가는 사람들이었다.

권정생 사진과 그가 남긴 작품들. 뉴스앤조이 이은혜

동화 작가로 널리 알려지면서 경제적 형편이 훨씬 나아졌는데도 권정생은 작은 흙집에 살았고 소박한 음식을 먹었다. 자신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생활비만 쓰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데는 인색하지 않았다. 그의 나이 70세, 의료사고로 소천하자 기자들이 몰려오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많은 사람들이 오는 것을 보고 이웃들은 적잖게 놀랐다. 오랫동안 이웃들에게 권정생은 홀로 사는 외롭고 가난한 노인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었다. 그의 예금통장 잔고가 5000만 원에 달하고 약 10억 원에 달하는 인세가 있음이 알려졌을 때 이웃들은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가 남긴 모든 재산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소식은 권정생의 이웃은 물론 그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과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나의 통장에 있는 돈으로 옥수수를 사서 굶주리는 북한 어린이들이 먹도록 해 주시오."

권정생이 경험한 것처럼 우리도 일상에서 주님께서 베푸신 성찬을 경험하며 살고 있지 않을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위의 평범한 손길을 통해 성찬을 베풀어 주신다. 고난 속에 있을 때 더욱 그렇다. 안병무가 경험한 것처럼, 권정생이 경험한 것처럼 말이다. 때로는 나보다 더욱 어려운 이웃에게서 주님의 성찬을 공급받을 때도 있다.

권정생이 어려운 이웃들에게 받은 주님의 성찬은 그의 손길을 통해 국내외 어린이들에게 퍼져 나갔다. 누군가로부터 우리가 받아 온 주님의 성찬도 우리의 손길을 통해 널리 널리 퍼져 나가야 한다. 지금 내가 가난하고 넉넉하지 못한 것 같아도 나눌 것이 있다. 주님의 성찬은 머물러 있지 않고 널리 퍼져 나가기 때문이다. 혹 나의 삶에 기쁨이 없다면, 내 손을 움켜쥐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까지 주님의 성찬을 공급받아 살아왔는데도 말이다. 나에게 있는 보잘것없는 소유라도 나눌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신다.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베푸신 성찬이기 때문이다.

홍인표 / 백석대학교 기독교전문대학원에서 역사신학(한국교회사)을 전공해 장동민 교수 지도로 박사 학위(Ph.D.)를 취득했다. 주요 연구 영역은 한국교회사지만, 아동문학에도 관심이 있다. 종종 동시, 동요 노랫말을 창작해 발표한다.

1) 김명수, 『안병무의 신학 사상』(서울: 한울아카데미, 2011), 42-43.
2) 김명수, 『안병무의 신학 사상』, 43.
3) 권정생, "오물 덩이처럼 뒹굴면서," 원종찬 엮음, 『권정생의 삶과 문학』(서울: 창비, 2013), 38.
4) 권정생, "오물 덩이처럼 뒹굴면서," 30.
5) 권정생, "오물 덩이처럼 뒹굴면서," 29.
6) 권정생, "오물 덩이처럼 뒹굴면서," 26-27.
7) 권정생, "오물 덩이처럼 뒹굴면서," 33.
8) 권정생, "오물 덩이처럼 뒹굴면서," 35.
9) 이현주, "동화 작가 권정생과 강아지 똥," 원종찬 엮음, 『권정생의 삶과 문학』, 75.
10) 이현주, "동화 작가 권정생과 강아지 똥," 76.

외부 기고는 <뉴스앤조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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