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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교회는 개교회주의 넘어 만인의 고통 향해야
[한국에서 공공신학하기] 교회에 새 역할 요청하는 한국적 후기 세속 사회의 현실
  • 성석환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9.12.04 14:19

'개교회주의'를 이단적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 개교회에는 자신의 일을 독자적으로 결정할 정치권 권리가 있으며, 외부의 누구도 개교회에 간섭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편다. '개교회주의'는 교황 체제에 저항하여 개인이든 교회이든 모두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신앙적 원리이며, 만인사제론의 논리적 부수이다. 권위적이며 제왕적인 체제를 옹위하고, 자신들의 독선을 위장하려는 태도는 주님이 머리 되시는 교회의 공교회성을 치명적으로 훼손한다.

나의 공공신학은 다만 교회 입장을 공론장에서 대변하고자 함이 아니다. 우리 시민사회에서 민주와 공정의 정치가 더욱 발전하도록 돕고, 공동체적 가치가 소중하게 보전되도록 지원하기 위해 도덕적 토대를 놓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교회가 사회적 신뢰를 얻어야 하는데, 지금으로는 어려운 일임을 알고 있다. 이단적 '개교회주의'와 같은 독선을 버리고, 한국 사회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기독교윤리학자로서 신학적 문화해석학을 공부한 내가 공공신학을 연구하기까지는 몇 번의 시대적 계기가 작동했다. 우선 기독교윤리학을 공부한 것은 대학 시절부터 이어진 '한국 사회 변동에 대한 신학적 응답'이라는 실천적 관심 때문이었다. 민주화 과제가 문화적 과제로 변화되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1990년대 대중문화 담론이 급성장하면서 그 정치사회학적 함의가 한국 사회에 새로운 공론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IMF를 거치며 '문화 사회' 담론은 문화 산업의 자본 아래 놓이게 되면서 사회 발전 동력을 추진해 내지는 못했다. 다만 더 이상 획일적 문화를 통해 단일 대오를 이뤄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시민사회가 점차 벗어나는 데 나름의 유연성을 제공했다고 할 것이다. 이 모든 변화에 대처하는 한국 사회의 유아기적 태도는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문화 담론을 거부하고, 교조화한 근본주의적 문화 이해를 일관되게 견지해 왔으니 그 수준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미 수평적 의사소통의 문법이 요구되던 사회적 분위기를 이해하지 못한 교회는 외부와 소통하겠다며 설비와 도구에 막대한 자본력을 투자했다. 그러면서도 한국사회의 문화적 변화가 함의하는 근본적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오히려 내부의 동일성만 강화하는 고립화를 자처했다. 이렇게 되면 유일하게 채택할 전략은 비판과 부정, 거부와 비난이다. 한국교회는 근대주의의 끝자락과 포스트모던의 첫 자락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신학의 이유, 해석과 실천

내가 공공신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리처드 니버(Richard H. Niebuhr)를 공부한 후 학위논문을 정리하면서부터이다. 한국교회의 문화해석학이 지닌 한계가 뚜렷할 때, 그의 신학은 우선의 방법론을 제공해 주었는데 신학을 공부한 이들에게 대중적으로 알려진 <그리스도와 문화>만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신학적 해석학이었다. '변혁주의'와 사뭇 다른 개혁신학의 '변혁적 문화관'을 해석학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은 말미에 결국 공공신학과 만나게 해 주었다.

이미 여러 학자가 니버의 신학을 공공신학의 기초로 재해석하고 있었고, 이는 '대중문화 악마론', '뉴에이지 문화론', '프리메이슨 배후론' 등에 발목을 잡혀 새로운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던 당시 한국교회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능케 했다. 신학적 이론도 이론이거니와 한국 사회의 변동에 적절히 응답하지 못하고 거꾸로 걸림돌이 되어 가는 한국교회의 행태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나는 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말할 기회가 주어지면 우리 신앙의 본령이 현장과 실천에 있다고 줄곧 강조한다. 그래서 내가 서 있는 상황의 변화, 변동에 주목하는 것이야말로 신학자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신학적 훈련은 그 변화에 대한 해석을 위해 필요하다. 교회와 사이 사에서 교차 번역할 해석 능력이 여기서 나온다. 하여 신학자가 아닌 목회자는 반드시 타락하고, 목회자 영성 없는 신학자 역시 필연 타락한다 믿는다.

공공신학은 2010년 도시공동체연구소를 설립하게 된 직접적인 자양분이 되었다. 또 다른 변동을 거치며 새로운 사회 지형을 형성하던 시민사회 공론장에서 교회는 이미 '타자'가 되어 버린 상황이다. 복음을 어떻게 표현하고 증언해야 할지 고민을 안게 되었는데 그것은 곧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해석을 통해 도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2019년 봄에 출판한 <공공신학과 한국 사회>(새물결플러스)는 그 결과물이었다.

이 책 첫 부분에서 나는 공공신학의 자리를 오늘 상황에 대입했고, 신학의 해석은 곧 상황에서 실천이라 설명했다. 실천과 결별된 교실과 예배당의 신학이었다면 내가 공공신학을 제안할 이유가 없다. 그들의 변화된 상황에 대응하는 영미 주류 신학의 하나일 공공신학을 굳이 방법론적으로 채택한 것은, 그 해석과 실천의 장이 한국적일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래서 공공신학의 장을 '후기 세속 사회(post-secular society)'의 한국적 상황으로 제안했다.

후기 세속 사회의
새로운 종교 지형

'세속화 이론(theory of secularization)'은 근대화·도시화·산업화가 진전되면 종교는 더 이상 공공 영역에서 본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사적 영역에 국한된 제도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주창자 중 한 사람이었던 피터 버거(Peter L. Burger)조차 철회했고, 근대주의의 휴머니즘과 비판적 이성을 토대로 정치적 해법을 모색해 온 신마르크스주의자나 사회학자들도 서구의 도적적·윤리적 혼란의 원인을 공적 종교의 부재로 여기고 있다.

민주주의 발전과 사회적 진보에 종교가 기원적 요소라는 점을 강조하며, 지금 인류의 갈등과 충돌은 그동안 공론장에서 종교를 배제해 온 근대주의의 실패로 보기도 한다. 그래서 인류가 직면한 여러 공적 의제를 다루는 장에 종교와 신학의 공적 참여가 필요하다는 논의가 확산되고 있다. 특히 미국의 '9·11 사건' 이후 도덕적 토대 없이 정치적 해법이 실현되기 어렵다는 주장이 신학의 언어를 공론장의 언어로 번역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론을 요청했다.

서구인들에게 기독교적 유산은 우리와 달리 매우 자연스러우며 교회 출석 여부와 상관없이 공유하는 기독교 문화가 실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 출석률은 한참 떨어지지만,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독일인이나 프랑스인은 60%를 상회한다. 이들은 이민자들에 대한 태도나 관용 문제에서 미국 복음주의자들보다 훨씬 유연하고 포용적이다. 이러한 도덕적 자원들의 실제가 후기 세속 사회의 종교 담론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물론 공공신학이 대응해야 할 유럽의 종교 지형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최근 퓨리서치센터 조사에 따르면, 앞으로 종교 인구는 더 늘어나겠지만 무슬림의 성장세가 확연하고 기독교인은 증가는 하겠으나 탈교회적 그리스도인이거나 아예 타 종교로 개종하는 추세가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종교의 공적 역할에 대한 정치적 기대와 달리 제도권 기독교 이탈 현상은 여전하다는 말이다.

미국에서는 독립 교단, 침례교, 순복음 등 복음주의는 여전히 세력을 굳건히 유지하고 있지만, 가톨릭과 장로교와 같은 주류 제도권 기독교 인구의 이탈이 가속화하고 이들 대부분이 무종교인(None)으로 남는 추세가 지속되고 있다. 무슬림 등 타 종교의 확산으로 세계 종교 인구는 늘어나는 추세인데도, 기독교 인구는 감소 추세인 이 새로운 상황에서 종교의 공적 역할을 재고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한국의 종교 지형 역시 복잡하다. 한국은 최근 조사에 따르면, 종교 인구가 줄어들고 무종교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 여기에는 200만을 헤아린다는 '가나안 교인'이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하며, 여러 학자가 이들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제도권 종교를 이탈하는 면을 부각해 탈종교화 현상을 강조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오늘의 사회적 '유동성'에 따른 새로운 유형의 종교 활동 인구 증가로 파악해야 한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제도권 종교를 떠나는 이들의 원인은 한국의 경우 서구보다 명확하다. 지도자의 타락이나 종교의 비도덕적 행태에 실망해 이탈한 이들이 대부분인데, 한국의 경우 사태가 해결된다면 다시 복귀하고 싶다고 말하거나 자신들 비전에 적합한 공동체를 새롭게 구성하는 경우가 많다. 일단 이들을 다루는 종교 담론의 다층성과 복합성은 서구보다 훨씬 조밀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야말로 '한국적' 특수한 상황을 드러내는 '후기 세속 사회'의 종교 지형인 것이다.

후기 세속 사회의
공공신학

오늘날 후기 세속적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필요한 자원들은 대부분 초기 기독교적 유산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고, 상대적으로 보수적 방법론을 구사하는 케임브리지대학교 중심의 '급진정통주의(radical orthodoxy)'자들에 비해 에큐메니컬 전통을 따르며 사회윤리적 집중을 보여 온 에든버러대학교와 시민 종교에 대응하여 공론장에 참여해 온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의 공공신학은 새로운 '후기 세속적' 종교 지형에 더 관심을 표명하며 비기독교적 자원과 적극 대화한다.

후기 세속 사회의 종교 담론은 종교가 근대사회의 기원적 DNA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전자의 흐름이 유효하다 말할 수 있다. 또 후기 세속 사회의 담론은 전통적인 신학적 주장을 오늘의 언어로 번역해 줄 것을 요청한다는 의미에서 공공신학적 방법론이 더 적절할 것으로 본다. 양자의 주장 배후에는 어쩌면 주변부로 밀려난 신학의 영향력을 복권하려는 의도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서구에서는 합리적 설득이 가능한 주장들이다.

19세기 계몽주의 이래 세속화는 합리화의 필연적 귀결로 보았다. 그러나 세속화가 종교의 사사화 혹은 공공 영역에서 종교의 퇴거를 의미한다고 생각한 것은 논리적 귀결이 아니라 계몽주의자들의 기획이었다는 게 호세 카사노바(Jose Casanova)나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와 같은 이들의 주장이다. 근대적 정체성을 형성한 가장 강력한 계기가 종교개혁이었기에, 종교는 공론장 형성의 토대적 자원으로서 공적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후기 세속 사회의 공공신학을 재구성하고자 한다면 기독교의 기원적 지위에 대한 전제가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서구적 관점에서는 당연한 주장일 수도 있으나, 앞서 언급한 대로 새롭게 펼쳐지는 지구의 종교 지형이 예전과 다른 만큼 공공신학의 사회적 지위도 새롭게 고려되어야 한다. 공공성을 고양하고 시민사회의 소통에 참여해 더 좋은 사회를 위한 신학적 전망을 설득하고자 한다면 방법론적 유연성을 필수적이다.

그래서 공공신학의 한국적 실천은 서구와 다를 수밖에 없다. 한국은 오랜 역사 동안 다종교적 다원주의 사회였다. 기독교 역사도 가톨릭 포함해 200년 조금 더 지났을 뿐이고, 또 결정적으로 한국 기독교는 시민사회 형성에 서구의 종교개혁과 같은 기원적 성격을 제공하지도 않았다. 한국적 후기 세속 사회의 공공신학은 세속화에 대응하는 서구의 경우와는 달리 오히려 탈종교화에 대응하는 방식이어야 할 것이다.

내가 그리 판단하는 것은 후기 세속적 정황이 서구와 한국이 다르게 표현되고는 있지만, 제도권 교회를 향한 비판과 종교의 도덕적 역할에 대한 요청에 서 있다는 점에서 본질은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 사회의 종교성은 제도권 종교에 소속됐는지 여부만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사회의 주류 계층을 대변하게 된 종교는 역사적으로 쇠락의 길을 걸었던 것을 볼 때, 지금은 반전의 기회를 모색하기보다는 새로운 종교성을 모색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한편 해방 이후 외래 종교인 개신교가 '유사 국가 종교'화 되어 가는 과정을 추적한 강인철의 견해에 따르면, 국가권력과 결탁해 교세 확장을 모색한 우파 기독교와 사회의 소외된 이들과 연대하며 민주적 사회 발전에 기여해 온 진보 기독교 전통이 있지만 지금은 '유사 국가 종교'를 복원하고자 하는 우파들이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 그는 소통 능력과 도덕적 권위(moral authority)를 회복해 공공성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문한다.

나는 다른 글에서도 서구와 한국의 시민사회 형성사가 다르기 때문에 공공신학의 실천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한국 시민사회는 서구보다 훨씬 더 정치적이다. 서구의 정치적 혼란에서, 종교의 도덕적 토대를 복원해 공론장에 복귀하려는 영미의 공공신학과 달리, 우리는 지금 상황에서 해방 이후 기독교가 한국 사회 공론장에 참여해 왔던 전통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기존의 진보적 신학과 실천이 내재한 방법론적 한계는 극복해야 한다. 공공신학이 정치신학이나 해방신학·민중신학과 다르게 작동하는 방법론적 모색을 중히 여기는 이유이다. 주류 신학으로서의 공공신학에 대한 의심 또한 걷어 내야 한다. 영미의 공공신학을 소개하기만 하고 한국적 상황에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제안이나 모색이 결여된다면, 그것은 또다시 담론을 소비하고 마는 유행으로 전락할 것이다.

한국적 후기 세속 사회에서 개신교의 공론장 복귀는 아직까지 환영받지 못한다. 탈종교화되어 가는 한국 사회에서 향후 '가나안 교인'은 더 늘어날 것이 분명하고, 특히나 교회가 젊은 세대로부터 외면받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종교성의 총합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는 사회 문화적 흔적이 도처에 나타나는데, 기성 제도권 종교들이 한국적 후기 세속 사회에서 공적 역할을 제대로 모색하지 못한다면 이후 소멸의 길을 걷지 말라는 법도 없다.

탈종교화하는 한국 사회의 비극은 서구처럼 공론장의 도덕적 기반이 정치적으로 형성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종교든 정치든 어느 한쪽이라도 제대로 작동이 되어야 시민사회의 공론장을 위해 동원할 공적 자원들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인데, 2019년 한국 사회에서는 둘 다 불신의 대상이니 시민사회의 갈등과 충돌은 당분간 감내해야 할 사회적 비용이다. 정치권은 그렇다 치더라도, 종교가 이전투구에 앞장을 선다는 오명은 정말 참기 힘든 모욕이다.

다음 세대를 위한 전략을 세운다고, 작은 교회를 돕겠다고, 청년들을 지원하겠다고 떠들고 구호를 외치며 요란한 프로그램을 앞세우는 교회들의 장단에 놀아날 이들이 이제 더 없을 것이다. 후기 세속 사회의 종교 지형은 그런 요란한 언사에 좀처럼 얼굴을 밝히지 않을 것이다. 내가 공공신학으로 한국 사회 문법에 응하는 교회의 공적 역할을 모색하고자 하는 것은 종교 지형의 외피가 탈종교적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새로운 종교성의 갈망이라 보기 때문이다.

새로운 종교성의 정체는 오늘의 고통에 있다. 시민사회의 갈망과 고통의 진원이 무엇인지 분별하지 못하면, 새로운 종교성은 온통 돈·권력·사이비의 차지가 될 것이다. 한국적 후기 세속 사회의 교회는 이 고통의 진원과 대면하여 모래 위에 쌓은 성을 무너뜨리고 다시 집을 지어 만인이 기도하는 집으로 재생되어야 한다. 나는 공공신학이 그 일에 소용될 것이라 생각한다. 새로운 종교의 영성은 새 땅에 세워질 것이다.

성석환 / 도시공동체연구소 소장,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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