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발의안을 통해 삭제되는 것은 수많은 법률 조문 속 '성적 지향'이라는 네 글자가 아니다. 이번 개악안을 통한 성소수자들의 인권 박탈은 시작일 뿐 그다음에는 또 다른 소수자가 목표가 될 것이며 종국에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당신들 인권은 정치적 필요에 따라 언제든 희생해도 된다'는 결과로 귀결될 것이다. 이런 행위는 혐오와 차별을 정치 자산 삼아 대중을 현혹하고 선동했던 히틀러가 한국에서 부활했음을 알리는 것이며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부산성소수자인권모임QIP 다나

[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국가인권위원회법에서 '성적 지향'을 삭제하고 '성별'의 정의를 신설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국가인권위원회법 일부 법률 개정안'을 향한 규탄 기자회견이 열렸다. 성소수자차별반대무지개행동·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차별금지법제정연대·한국여성단체연합 등은 11월 20일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의원들을 향해 "국민을 대표할 자격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가인권위원회법은 평등권 침해 행위 사유 중 하나로 '성적 지향'을 명시하고 있다. 이성애가 아닌 동성애·양성애자라는 이유로 취업, 교육 등에서 차별을 받았다면 이 법을 근거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할 수 있다. 자유한국당 안상수 의원 등이 '성적 지향'을 삭제하자는 것은 "동성애자는 차별받아도 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참석자들은 이번 개정안에 이름을 올린 국회의원들이 얼마나 인권 의식이 국제사회 흐름과 맞지 않는지 지적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이종걸 공동대표는 "에이즈를 난치병 운운하며 혐오를 조장한다.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는 행위는 국제 인권 규범과 인권법상 명백한 차별 행위"고 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김영순 공동대표도 국회의원들이 국제 인권 흐름에 많이 뒤쳐져 있음을 고백하는 꼴이라고 했다. 김 공동대표는 "이성애가 아닌 성적 지향은 차별해도 된다는 이야기인데, 국제적 흐름을 좀 배우고 오시라. 해외 외유성 여행만 다니지 말고 다른 나라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좀 보고 오시라"고 했다.

성소수자 인권 단체들은 국가인권위원회법 개정안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11월 20일 국회 앞에서 개최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개정안의 또 다른 문제는 '성별'의 정의를 신설했다는 점이다. 반동성애 진영에서 주장하는 "젠더는 사회적 성이기 때문에 70가지 성이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내용을 그대로 담았다. 태어날 때 생물학적 성 외에는 인정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공교롭게도 기자회견이 열린 날은 '국제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이다. 21년 전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살해당한 리타 헤스터를 기념하면서 시작됐다. 김영순 공동대표는 "태어날 때 성으로만 성별을 국한하면 트랜스젠더, 인터섹스(간성) 등 또 다른 성소수자들의 차별을 용인·선동하게 되는 것이다. 혐오 선동 법안을 발의한 국회의원들이 일부러 이 날을 앞두고 발의한 것이라면 너무 악의적이다"라고 말했다.

국내 첫 트랜스젠더 변호사로 활동하는 성소수자차별반대무지개행동 박한희 집행위원은 "오늘은 트랜스젠더 존재를 기억하고 떠나간 이들을 추모하는 날이다. 전 세계적으로 차별과 혐오에 희생된 트랜스젠더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이 날에, 혐오를 퍼뜨리는 법안을 마주하고 이렇게 국회 앞에서 규탄 기자회견을 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고 또 화가 난다"고 말했다.

박한희 집행위원은 국회의원들이 법안의 근거로 든 대법원, 헌법재판소 판례가 판결 취지에 반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헌재는 역사적·구성적 관점에서 성별을 바라보며 성차별이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설시한 것이지 이를 이용해 차별을 정당화하라고 한 게 아니다. 대법원은 트랜스젠더도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한 결정이다. 트랜스젠더의 인권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명시한 결정을 왜곡해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부정하는 법안에 동조한 국회의원들을 어떻게 시민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가"라고 되물었다.

참석자들은 각 정당이 이번 개정안을 발의한 국회의원들은 21대 총선에 공천하면 안 된다고 했다. 이들은 "혐오가 지지를 얻을 것처럼 보던 환상은 이제 깨져야 한다. 누군가의 인권을 헌납해 권력을 얻으려는 정치인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혐오를 대변하는 정치인은 필요 없다. 21대 총선은 당신들을 버릴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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