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해외선교연구센터(OMSC)가 발행하는 <국제선교통계보고서 IBMR>에서 발표한 '2013년 세계 선교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 23억 기독교 인구 중 장로교인은 1800만 명으로 집계됐다. 비율로 따지면 전 세계 기독교 인구 중 불과 0.8%만이 장로교인이며, 주로 미국과 한국에서 교세를 형성하고 있는 장로교 안에서 한국 장로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1/3에 불과하다. 후하게 잡아도 전 세계 기독교 인구 중 한국 장로교 비율은 고작 0.3%밖에 되지 않는다. 기독교는 2000년 역사를 이어 오면서 다양한 신학과 교회 공동체를 만들어 왔으며, 이제 겨우 100살 좀 넘은 한국 장로교의 유산은 그 속에서 한 줌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한국 장로교는 한국 개신교 주류 위치에 있으면서 어떤 기독교 종파보다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자신들이 유일한 기독교 진리의 담지자라는 확신에 빠져 기독교 국가를 대상으로도 선교사를 파송하고, 심지어 자신들에게 기독교를 전해 준 북미 장로교를 향해서도 교리적 단죄를 서슴지 않는다. 한국교회 안에 끊이지 않는 '이단 논쟁'과 '인권유린'은 교회의 독선과 오만을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최근 교회에서 양산하는 '반동성애' 이슈는 한국 장로교의 배타성과 독선의 극치를 보여 준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할 정도로 꽉 막혀 있는 이 집단에 속한 나는, 종교개혁 기념 주일을 맞이해 한 명의 전도사로서, 또 양심적 신앙인으로서, 광기에 휩싸여 타인에게 무차별적 폭력을 행사하는 이 교회를 바로잡고자 한다. 기독교인은 동성애를 반대할 수밖에 없는가.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것과 기독교 신앙을 지키는 일은 공존할 수 없을까. 그렇지 않다. 그것은 무지와 오만에 빠진 한국 개신교인들의 편견과 오해일 뿐이다. 나는 이제부터 한 명의 신앙인으로서 한국 개신교의 반동성애 운동을 왜 비판하는지,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성소수자의 인권과 행복한 삶을 지지할 수 있는지 열 가지 이유를 밝히려 한다.

1. 하나님이 주신 양심에 따라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따라 창조하셨다. 이 고백이 오늘 이 시대를 향한 나의 신앙고백(credo)이며 선포(kerygma)다. 나에게 부여된 양심을 주재하는 이는 하나님이시기에 어떠한 상황과 사람 앞에서도 이 양심을 거스를 수 없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양심의 자유를 주어 신앙에 대하여 지나친 교훈이나 명령을 받지 않고, 그 양심대로 할 권리를 주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신앙에 대해 속박받지 않고 양심대로 할 권리가 있으니 아무도 나의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지 못한다.

2. 하나님이 허락하신 경험에 의해

나에게는 성소수자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시스젠더 이성애자인 나보다 훨씬 더 경건한 삶을 살아왔으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삶으로 살아 내고자 노력해 온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성소수자로 사는 것과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공존할 수 없는 충돌 관계가 아니다. 동성애자로 살면서 더 엄격하게 경건 생활을 지키는 경우도 있으며, 이성애자로 살면서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인 성생활을 하는 사람도 많다. 우리가 정말 이야기해야 할 것은, 무절제하며 폭력적으로 이루어지는 성적 행위에 대한 것이지 존재 자체에 대한 가치판단이 아니다.

나는 앞서 언급한 내 친구의 정체성을 결코 죄라고 말할 생각이 없다. "동성애는 죄"라는 말이 한 사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며, 그것이 그 친구에게 얼마나 큰 폭력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설령 내가 교회 안에서 '동성애 옹호자'로 낙인찍히고, 그 결과 소속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못 받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결코 그런 폭력을 휘두르고 싶지 않다.

3. 하나님이 주신 이성에 의지해

동성애는 선천적인가, 아니면 후천적 요인에 의한 정신 질환 또는 장애인가. 동성애 문제를 판단할 때 이 질문은 정말 중요하다. 만약 동성을 향한 성적 지향이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이라면, 또는 치료하거나 교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면 어떻게 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수천 년 동안 동성애는 범죄로 여겨져 처벌 대상이 되었다. 나치 집권 당시에는 이른바 '민족 우성화' 작업의 일환으로 수많은 동성애자가 수용소에서 학살당했다. 겨우 19세기에 들어서야 동성애를 심리 장애나 정신 질환으로 인식하는 정신의학적 접근이 시도되었다. '동성애는 범죄가 아니라 질병이므로 처벌 대신 치료를 해야 한다'는 분위기 전환은 1942년 미국정신의학협회(APA) 진단 치침이 결정적 공헌을 했다. 2008년 APA는 '성적 지향에 대한 올바른 치료적 대응'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현재 효과가 입증된 동성애 전환 치료는 존재하지 않으며, 성적 지향을 억지로 바꾸려는 치료는 치료 대상자의 우울, 불안, 자살 시도 등을 증가시킬 수 있어 그 치료가 오히려 동성애자의 정신 건강을 악화시킬 수 있다."

APA는 2011년 또다시 "개인이 이성애나 양성애나 동성애로 성적 지향이 다르게 발달되는 정확한 이유에 관해 과학자들 간의 일치된 의견은 없음"을 명확히 했다. 또 APA는 "동성애의 요인은 알 수 없으며 그것이 당사자의 선택과 무관하게 주어지는 것"임을 공식화했다.

이에 따라 1976년부터 37년간 '탈동성애 운동'을 이끌었던 단체 '엑소더스인터내셔널'(Exodus International, EI)은 2013년 6월 30일부로 전환 치료를 일체 중단하고 해산했다. EI 회장 앨런 챔버스는 "그동안 성적 정체성을 바꾸려 시도해 온 것과 동성애자들에게 낙인을 찍는 '회복 이론'에 대해 사과한다"고 밝혔다. 또한 "그동안 우리의 이웃인 사람과 성경 모두를 존중하지 않는 세계관에 갇혀 있었다"며, "동성애를 치료의 대상으로 여긴 것이 무지한 일"이었고, "지금까지 성소수자들에게 도움보다는 상처만 안겨 준 것"을 인정했다. (황재하, "미 기독교 단체 '동성애 치료, 무지의 소산' 사과", <머니투데이> 2013, 6. 21)

한국상담심리학회는 2019년 2월 7일 학회 회원인 ㄱ 씨가 전환 치료를 한다는 이유로 영구 제명했다. 학회는 "ㄱ 씨가 내담자의 성적 지향과 정체성을 존중해야 하는 상담자로서 직업·윤리적 의무를 준수하지 않았다"며 "이러한 태도·행위는 상담자로서 윤리 자격과 전문 자격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보라, "동성애 '전환 치료' 시도한 상담사 첫 퇴출", <경향신문> 2019, 2, 8)

한편, 1990년 5월 17일 세계보건기구(WHO)는 43차 총회에서 동성애를 정신장애 항목에서 삭제했다. 바로 이날을 기념해, 매년 5월 17일을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로 지키고 있다. 1999년 WHO는 43차 총회 결의를 반영해 '동성애'라는 용어를 '성적 지향'으로 재개념화했고, "성적 지향 자체는 장애로 여겨져선 안 된다"고 명시했다. 2000년 발표한 한국표준질병분류(KCD)는 WHO 권고와 마찬가지로 "성적 지향이 정신적 장애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밝혔다. (허호익, <동성애는 죄인가>, 235~241쪽)

성적 지향의 원인이 선척적인지 후천적인지는 아직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세계적인 정신의학적 권위, 의학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APA와 WHO가 성적 지향을 질병이나 장애가 아닌 것으로 분류했다는 점은 분명하고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일부 기독교인이 여전히 동성애자를 전환 또는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의학적으로 더 이상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이러한 시도는 병을 낫게 해 주겠다며 안찰기도(?)하다가 사람을 때려 숨지게 하는 일과 다를 바 없는 명백한 불법 의료 행위에 해당한다. 한국교회에 팽배한 반지성주의 때문에 목회자들은 동성애에 관해 축적된 의학적 성과를 너무 쉽게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어떤 목사들은 서구 의학계가 동성애자들에 의해 장악되어 왜곡된 결과가 나왔다고 믿는다. 그들의 음모론을 듣고 있으면 우습다 못해 애처롭기까지 하다.

하나님이 주신 이성이라는 선물을 최대한 잘 활용해서 지혜로운 판단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목회자의 마땅한 도리이다. 이성을 무시하고 배제해야 믿음이 좋은 것처럼 착각하는 어리석은 과오를 이제는 그만 멈추어 주길 바란다.

4. 내가 공부한 신학에 근거해

"동성애는 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단순하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구약 성서 전체를 통틀어 극히 일부에 불과한 본문에 등장하는 내용으로 정말 그런 신학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일까. 그들의 주장이 신학적 설득력을 지니려면 성서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문자 그대로의 하나님 말씀'이어야 한다. 성서의 한 글자, 한 글자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축자영감설'과 그래서 성서 텍스트에는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다는 '성서무오설'이 전제되어야 하고, 성서를 해석할 때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는 '문자적 성서 해석'만이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분명,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한국교회에 깊이 뿌리내린 문자적 해석과 근본주의 신학을 극복해야 한다고 배웠다. 내가 배운 신학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지 '이성을 배제하는 신앙'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학창 시절 근본주의 신학뿐만 아니라 슐라이어마허, 불트만, 바르트, 본회퍼, 니버, 틸리히, 하우어워스의 신학을 공부했고, 또한 정치신학과 공공신학, 민중신학과 해방신학, 여성신학과 생명신학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신학 담론에 대한 이해를 쌓았다. 이러한 현대신학의 다양한 흐름에서 근본주의 신학 방법론이 얼마나 극단으로 치우쳐 있는지, 그 신학적 토대가 얼마나 부실하며 빈약한지는 신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신학을 전공한 한 사람으로서 오늘 우리가 '동성애'에 대한 신학적 판단을 내릴 때, 단순히 "성경에 그렇게 쓰여 있으니까!"라는 터무니없는 주장 때문에 논의가 더 진전되지 않는 현실을 솔직히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 논리라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고전 14:34)라는 본문에 따라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주어 설교하도록 하는 것 역시 성경의 가르침을 위반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성 목사 안수를 허용하고 있지 않은가.

한국 근본주의 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박형룡 박사 신학을 '진리'라고 믿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의 경우에는 그런 신학적 주장이 가능하다. 여태껏 여성 목사 안수를 허락하지 않고, 심지어는 여성 목사 안수 허락을 위해 기도한 교수의 강의를 폐강하는 몰상식이 존재하는 그 신학 노선에 따르면 일관성이라도 있다는 말이다. 내가 속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에서는 단순히 성서의 문자적인 서술만을 가지고 신학적 논쟁이 있는 '동성애' 문제를 덮어놓고 죄라고 규정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우리는 성서 비평을 공부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서비평학의 여러 방법론을 동원해, 동성애와 관련한 성서 텍스트가 기록된 그 배경에 어떤 콘텍스트가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성서 텍스트는 그것이 쓰일 당시 콘텍스트의 결과물이므로 성서의 1차 독자는 현대인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서 본문과 우리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본문 너머에 있는 정보들을 통해 본문을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논란이 되는 본문이 현대사회 성소수자 이슈에 어떻게 해석 및 적용되어야 하는지 공적인 논의와 절충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한국 교인들에게 잘 알려진 복음주의 진영 목사 존 스토트(J. sttot)는 동성애 문제를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하고 다루어야 할 이유를 다음 두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 성경의 저자들은 자신의 상황과 연관된 질문을 다루고 있으며, 그것은 우리의 질문과는 매우 다르다. 소돔과 기브아 사건은 손님 대접의 환대와 적대 문제를, 레위기는 고대의 신전 창기의 다산 의식을, 바울은 헬라의 남색 선호 문화를 다루고 있으며 전부가 너무도 오래전 이야기이다.

둘째, 성서 저자들이 '지금 우리'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부분도 문제가 된다. 바울조차도 '타고난 동성애 성향'에 대해서 들어 본 바가 없으며, 두 남자끼리 서로 사랑에 빠질 수 있고 결혼을 할 정도로 깊이 사랑하다 안정적인 관계로 발전해 나갈 수 있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요약하자면 성서가 말하고 있는 것은 '어느 특정한 성행위'에 대한 것이지 '성적 지향'에 대한 것이 아니며, 성서의 저자들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의 '동성애'를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동성애를 인정한 주요한 해외 교단들의 경우 대개 이런 접근을 바탕으로 동성애 관련 본문을 재해석했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은 벌써 진행되었어야 할 위와 같은 신학적 연구와 논의조차 시도할 수 없는 억압적인 분위기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상황을 정치적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는 신학교 교수들과 선배 목회자들의 태도가 매우 유감스럽다. 이 문제는 정치적으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라 신학적 논쟁을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다. 동성애 이슈가 한국교회의 '역린'이라는 이유로 학자의 책임을 회피하는 동안, 결국 그 대가는 학생들과 교회 안의 크리스천 성소수자들에게 폭력이라는 이름으로 돌아가고 있다.

5. 성서의 가르침에 근거해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며, 성서의 가르침 역시 한마디로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거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기독교 주류 교단은 동성애자들을 사랑에서 제외하고 있다. 입으로는 동성애자들 역시 목회 대상이며, 사랑할 대상이라고 말하면서도 온갖 차별과 혐오, 배제와 폭력을 일삼고 있다. 내가 만약 "성도 여러분! 우리 다 같이 게이바(gay bar)에 가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셨듯이 그들을 사랑하며 섬깁시다"라고 설교하면 어떻게 될까. 분명 엄청난 항의와 공격을 받을 것이다. 당장 교회에서 쫓겨나지 않으면 다행이다. 실제로 얼마 전 분당우리교회에서 한 부목사님이 동성애자를 향한 차별과 혐오를 자제해야 한다는 뉘앙스로 설교했다가 교회가 발칵 뒤집힌 사례가 있다.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한국교회는 결코, 절대로 동성애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교회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성서 해석은 '성서를 성서로 해석한다'는 방법론이다. 현대 개신교인들은 희년, 안식일, 성결법 등 구약 율법을 거의 다 지키지 않으며, 구약 족장들처럼 일부다처제를 따르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오늘날 문화와 맞지 않는 내용, 또는 아주 제한적으로 등장하면서 해석에 어려움을 주는 일부 본문을 성서 전체 신학적 가르침 안에서 재해석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개신교인들은 실제로 성서 본문의 문자적 내용을 그대로 규범화하지 않는다. 그런데 동성 간 성행위와 관련한 극히 일부에 해당하는 본문에는 그러한 해석을 적용하지 않는다. 어떤 본문은 재해석하고 또 어떤 본문은 재해석하지 않는다면, 그 기준은 무엇인가.

만약 성서 본문에 근거해 동성애자를 죄라고 말하는 사람이,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막10:21)는 본문에 따라 자기 재산을 다 나눈 사람이라면 그 주장을 비판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성경 본문을 근거로 동성애자들을 향해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사람 중 99.9%는 자기 재산을 최대한 축적하기 위해 노력하며 사는 사람이다. 나는 그들이 보여 주는 성서 해석의 이중성 때문에, 성서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을 비판할 수밖에 없다.

동성애와 관련한 일부 본문을 해석하는 바람직한 방식은 다음과 같다. 먼저 우리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며 원수조차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최우선으로 의지해야 한다. 또한 "은사가 아무리 충만하고 예언하는 능력으로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아는 자들이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말짱 꽝"이라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한다. 이와 같은 '사랑'과 '포용'의 원칙을 통해 동성 간 성행위에 관한 본문에 접근하는 것이 성서의 권위에 순종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6. 그리스도의 삶을 묵상하며

예수께서는 높은 영광의 위치에 있을 수 있음에도 스스로 낮은 곳을 택하셨다(고후 8:9). 내가 살아 내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몸소 보이신 성육신의 영성이다. 그것은 또한 십자가 도상에서도 드러난 예수의 자기 비움(kenosis)이다.

나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장신대 신학과를 2007학번으로 입학했고, 교단 신학대학원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는 장신대 신대원을 111기로 졸업했다. 나는 이른바 장자 교단이라는 예장통합에서도 메이저에 속하는 서울노회에 속해 있으며, 서울노회 안에서도 손꼽히는 큰 교회에서 5년간 사역했다. 또한 나는 올해 재시로 목사 고시에 합격했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그리스도인 중의 그리스도인이요 직책으로는 전도사요 곧 목사 안수를 받을 사람이다. 그러나 또한 바울의 표현을 빌려 내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해 다 해로 여길뿐더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을 본받아 그 고난에 참여하고 더불어 '타자 사랑'이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서 부활하고자 함이다.

내가 사랑하고자 하는 타자는 이 사회의 '지극히 작은 자'인 성소수자들이며, 오늘 나의 선언은 "그들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며, 그들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마25:40)이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실천(praxis)이다.

7. 동성애 정치 공학을 분석하며

동성애 때문에 한국교회와 한국 사회가 무너질 것이라며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분들께 묻고 싶다. 당신은 WCC(World Council of Churches, 세계교회협의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장담컨대 그런 부류 사람들 중, 열에 아홉은 WCC를 종교다원주의 또는 종교 통합의 음모를 가진 적그리스도적 단체라고 말할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사실상 지금 동성애 이슈를 물고 늘어지며 신학교와 학생들을 공격하는 세력은 그 학교의 신학 노선과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나는 신대원 재학 중이던 2017년, 그들이 장신대 홈페이지 게시판에서 날뛰기 시작할 때부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상을 접했고, '도대체 저 사람들은 왜 예장고신, 예장합동으로 가지 않고 이 교단에서 목사를 하는 걸까?'라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지금의 반동성애 광풍은 신학의 포용성과 다양성이라는 가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보수적인 부류들의 정치적 반격인 셈이다.

미국 최대 장로교단인 미국장로교(PCUSA)는 2011년 5월 총회 결의로 동성애자 목사를 안수할 수 있도록 했다. 이어 2014년 총회에서는 결혼 규정을 '한 남자와 한 여자'에서 '두 사람 사이'로 바꾸며 동성 결혼을 인정했다. PCUSA는 한국 기독교 초기에 선교사를 파송한 교단이며, 지금도 예장통합과 긴밀한 교류와 협력을 이어 나가는 곳이다. 그러므로 만약 동성애가 정말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는 적이라면, 무엇보다 먼저 PCUSA와의 교류 및 협력을 끊으라고 주장해야 옳다. 하지만 소위 반동성애 세력은 PCUSA가 그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40년 가까이 쌓아 온 신학적 연구와 논의들에 대해 관심조차 없으며, 사실상 PCUSA가 내린 결정을 이해하거나 또는 반박할 만큼 신학적 소양도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그러한 접근은 시도하지 않는다. 해 봐야 본인들이 얻을 것이 없을 테니까.

바로 이러한 대목이, 누군가(고만호 목사, 이광선 목사 등)가 동성애 이슈를 정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판단되는 지점이다. (참고로 여수은파교회 고만호 목사는 5·18 망언으로 논란이 되었던 이력이 있으며신일교회 원로인 이광선 목사는 한기총 금권 선거 파문으로 물의를 빚은 장본인이다. 이 둘은 모두 예장통합 내 반동성애 진영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8. 교단이 곧 하나님은 아니기에

목사 고시 면접을 볼 때의 일이다. 면접장에 목사 후보생들을 앉혀 놓고 "주사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어떤 장로 고시위원이 있었다. 나는 그를 보면서 '누가 저 사람에게 내가 목사가 될지 말지를 결정할 권한을 주었나?'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적어도 그 권한이 하나님이 직접 부여한 게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내가 속한 교단은 '동성애자 또는 동성애 옹호자의 목사 안수 및 신학교 입학을 불허한다'는 결의를 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겠지만, 갈 때 가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다. 교단의 결정이 곧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우리 교단은 1938년 신사참배를 결의했던 과거가 있으며, 지난 104회 총회에서는 '교회를 살리고 지킨다'는 명분으로 명성교회 세습을 사실상 용인하기도 했다. 교단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결정을 할 때, 종교인은 교단의 결정을 따르지만 신앙인은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

9. '차별금지법'을 번번이 무산시키는
교회의 횡포에 책임감을 느끼며

'개인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보장되어야 한다.' 이 윤리적 원칙은 민주주의 사회가 유지되도록 만드는 중요한 원칙이다.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적 소수자들이 그들의 성적 지향 또는 성 정체성을 가지고 사는 것으로 타인에게 주는 피해는 없다. 동성애는 전염되는 것도 아니며, 그들 역시 이성애자들처럼 합의된 성적 관계를 즐긴다. 또한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즉 에이즈의 발병 원인은 항문 섹스가 아니다. 동성애를 에이즈로 결부해서 공격하는 것은 의학적 근거가 없는 편견 또는 선동에 불과하다.

만약 그들이 전통적 가족 형태를 해체해 '인구 생산이라는 국가 유지를 위한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이 국가적 피해를 준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결혼한 지 2년이 지나도 자녀 계획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이나, 비혼주의자 역시 똑같은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더불어 무책임한 이성애자들이 낳고 유기하는 아이들을 입양해서 키우는 동성 커플도 해외에는 많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싶다.

그에 비해 교회의 편견과 무지로 일어나는 '반동성애 운동'이 성소수자들에게 주는 피해는 엄청나다.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차별적 사회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으며, 동성 커플의 법적 결혼이 불가능하게 막고 있으며, 당사자에게 심리적·육체적 고통을 주는 전환 치료를 강요하고 있으며, 트렌스젠더의 법적 성별 정정을 무산시키고 있으며, 성소수자를 향한 무차별적 혐오 발언을 퍼붓고 있다. (인간의 뇌가 폭력적인 말을 통해 받아들이는 화학적반응은 물리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을 당했을 때와 똑같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교회가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가로막는 결정적인 걸림돌이라는 점이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인 2007년 입법이 예고되었던 이 법은, 보수 기독교 세력의 조직적인 방해로 아직까지 표류 중인 법안이다. 쟁점이 되는 부분은 "병력, 출신 국가, 언어, 가족 형태 또는 가족 상황, 범죄 및 보호처분의 전력, 성적 지향, 학력", 이 일곱 가지다. 보수 기독교 세력은 위와 같은 항목에 있어서는 "차별을 할 수 있다", 아니 "반드시 차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법이 통과되면 목사들이 범죄자가 되고 교회가 탄압받게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가짜 뉴스를 유통하면서 말이다. 적반하장격으로 그들은 이 사회의 소수자들을 향해, "내가 당신들을 차별하고 혐오할 수 있는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누구에게도 그런 자유(?)와 권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이런 교회의 모습이 중세 가톨릭의 십자군처럼 보인다.

내가 만난 성소수자 그리고 성소수자의 가족들은 이 대목에서 가장 분노하고 슬퍼했다. "어떻게 '이웃 사랑'을 말하는 교회가 타인을 향해 이토록 무례하고 폭력적일 수 있느냐?"고 항의하면서. 나는 너무 참담하고 죄책감이 들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교회가 이래서는 안 된다. 지금과 같은 교회의 행태는 사람을 살리는 길이 아니요, 오히려 죽이는 길이다. 이런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교회는 앞으로 이 사회에서 더욱더 고립될 것이다.

10. 비판과 회의를 두려워하면
어떤 진리라도 '헛된 독단적 구호로 전락'하기 때문에

존 스튜어트 밀은 말했다. "전체 인류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 다른 생각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 이것은 어떤 한 사람이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나머지 사람 전부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만큼이나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현재 세대뿐만 아니라 미래의 인류에까지 강도질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이 바로 그의 저서 <자유론>의 핵심이다.

밀은 왜 그렇게까지 사상의 자유를 강조했을까. 만일 그 한 사람 의견이 옳다면, 그 사람 의견을 묵살하는 행위는 잘못을 드러내고 진리를 찾을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한 사람의 의견이 잘못됐더라도, 그것을 억압하게 되면 틀린 의견과 옳은 의견을 대비해 진리를 더 명확하게 드러낼 소중한 기회를 놓치고 만다. 그러므로 진리를 사랑하는 집단은 그 어떤 생각이라도 자유롭게 주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John Stuart Mill, 서병훈 역, <자유론>, 251~252쪽)

맺는말

내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동성애가 자기 선택적인지, 또 정말 치료가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반동성애'를 외치는 어떤 목사라도 과학적이고 명확한 근거를 제시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들은 그렇게 확신에 가득 차 있는가. 정말 묻고 싶다. 목사, 장로 자녀 중에 성소수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고. 단 한 번이라도 그 친구들을 직접 만나서 진솔한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있느냐고. 당신들은 지금 목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직무 유기에 해당한다.

보수 기독교인들이 동성애를 공격하는 신념과 성서 해석은 모두, 그들이 자신들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 낸 허상이다. 다시 말해, 비존재다. 그러나 그들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동성애자 및 성소수자들은 존재한다. 우리와 함께 숨 쉬며 살아가는 생명이고 이웃이다. 나는 전통과 권위, 이념과 관습이라고 하는 '비존재' 때문에 고통받는 '존재'들을 구원하는 일이 오늘 이 시대의 교회에 맡겨진 사명이라고 믿는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여! 비존재로부터 벗어나 존재를 향해 나아가라. 그것이 오늘날 썩어 빠진 종교와 무능력한 신학에 생기를 불어넣을 유일한 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한-번! 생각해 보라. 그들의 성적 지향이, 성 정체성이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것이라면,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사랑해야 한다"는 당신들 주장이 얼마나 허망한 말인지를.

한승민 /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111기 졸업,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서울노회 소속 목사 후보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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