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다면 우리는 교회를 그분의 사역을 이어 가는 성령의 공동체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섬기며 이웃과 사귀고 나누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 회복과 연결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 속 교회는 하나 되기 어렵고 갈등이 많은 종교 집단처럼 보입니다. 인간의 양심과 이성에 의한 순수한 신앙, 다양한 교회는 가능한 걸까요. 어디서 무엇이 잘못되었을까요.

아이러니하게도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교회를 제국처럼 조직하고 통치하면서 신앙의 순수성, 교회의 다양성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국의 황제처럼 교회에도 교황이 생겨났습니다. 구약시대처럼 기독교는 다시 제도 종교가 되었습니다. 사도 시대의 관계를 잇는 리더십이, 조직을 이끄는 리더십으로 바뀌었습니다. 오랜 세월 이러한 리더십이 굳어져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됐고, 신앙의 혼란이 발생했습니다.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분하고, 신부나 목사를 예수님의 자리에 앉게 했습니다.

조직화·제도화한 교회는 1인의 슈퍼스타를 필요로 했습니다. 속성이 통일성·효율성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조직과 제도의 리더십은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슈퍼스타는 수단과 목적을 일치하게 만들고, 거룩한 존재가 됩니다. 조직 안에 있으면 선, 조직 밖에 있으면 악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잇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조직·교리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진리를 살아 내는 공동체입니다. 선악을 판단하는 조직이 아닙니다.

오순절 다락방에서 시작한 최초의 교회, 예루살렘교회는 인위적으로 조직된 모임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에 의해 끊어진 관계가 연결된 모임이었습니다. 이 교회의 12제자는 중요한 사역을 합의로 결정하며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켰습니다. 하나 된 공동체의 리더는 예수 그리스도셨고, 그 리더십이 12제자에게 위임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리더십은 제자 정체성이 분명한 두세 사람 이상에게서 나타납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공동체는 1인 슈퍼스타가 아니라 여러 제자의 헌신과 순종으로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조직과 교리를 뛰어넘어 성령으로 하나 된 공동체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자신을 제자라고 고백하는 두세 사람이 수치스러운 죄와 허물을 나눌 만큼 소통·관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께서 소통·관계를 위해,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증명됩니다. 제자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상호 의존하며 책임으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시는 것을 힘써 지킵니다. 이런 공동체에서 양심과 이성이 제대로 작동되고 하나님 말씀이 들리는 것입니다. 그분의 또 다른 제자들이 양육되고 배출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지 모르면, 자신도 속고 남도 속일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 조직을 이끄는 1인 슈퍼 리더십은 자신을 절대 권위의 대리자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커질수록 조직을 우선시하고 거룩한 사랑에 의한 소통·관계는 나중으로 미루고 맙니다. 오늘날 교회가 일치를 외치면서 보수와 진보로 나뉘고, 희생을 말하면서 싸우는 모순의 원인이 여기 있습니다. 신앙 왜곡의 뿌리입니다. 1인 슈퍼스타가 있으면 조직의 성장은 가능하지만 끊어진 관계를 연결하는 공동체, 하나님나라는 드러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순수한 신앙으로 다양한 하나님나라 공동체로 드러나려면, 관계 중심이면서 제자 정체성이 분명한 리더십 두세 사람 이상이 필요합니다.

홍종국 / 미국 시애틀 만남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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