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 내 마음 깊은 곳에 감동으로 자리 잡은 노래를 한 곡 소개하고 싶다. 그 노래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심정을 잘 말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창문 두드리며 비가 오네. 눈물의 빗줄기. 자녀들 위하여 오래 흐느껴 온 이 세상, 이 세상. 우리 위하여 죽으신 아기 예수께 우리는 무얼 배웠나. 왜 아직 서로 헐뜯고 평화 모를까. 왜 우리 눈은 이리 어둘까.

그 옛부터 들려오는 외침 내 귀에 들리네. 전쟁과 굶주림 못 견디어 우는 저 음성, 저 음성. 우리 위하여 죽으신 아기 예수께 우리는 무얼 배웠나. 왜 아직 서로 헐뜯고 평화 모를까. 왜 우리 눈은 이리 어둘까."

한국교회에서 가장 익숙한 말은 '영혼 구원'일 것이다. 나 역시 영혼 구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 가운데 '영혼 구원만큼 중요한 가치'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는지 생각해 보고 싶다. 그것은 '샬롬'(평화)이다.

기원전 8세기 남유다의 다사다난한 시대에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았던 이사야는 샬롬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사야는 남유다 웃시야왕의 죽음 직후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가 선지자로 활동하는 동안 웃시야의 아들 요담이 왕위를 이어받았고, 요담의 뒤를 이어 아하스가 왕위를 받았다. 이사야는 적어도 60여 년을 남유다 선지자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기간에 남유다는 이웃의 거대한 나라 바벨론으로부터 침공 위협을 받는 등 대내외적으로 혼란이 끊이지 않았다. 사실 이사야가 활동한 기원전 8세기뿐만 아니라 구약시대 전반이 전쟁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쟁은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후부터 지금까지 멈추지 않고 있다. 소천하기 몇 년 전 자신을 찾아온 기독교인 몇 사람에게 권정생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

"이라크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사람들에게 그 많은 고통을 주는 것도 하나님의 뜻인가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제강점기 36년과 6·25 전쟁의 고통을 주셨나요?"1)

권정생의 질문은 무슨 일을 하든 관성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갖다 붙여, 전쟁조차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하는 기독교인들의 습관에 대한 일침이었다.2) 질문을 한 후 잠시 침묵하던 권정생은 이렇게 말하였다.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이 한 짓입니다."
"인간 때문에 이런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서 착하게 살라는 설교를 귀가 따갑게 들으면서도 한 가지도 행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기 일쑤인데 왜 그럴까요? 세상에 교회가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세상에 교회와 절이 이렇게 많은데, 왜 전쟁을 막지 못하는 걸까요?"3)

권정생 작품에 나오는 사람과 동식물 중에서 이러한 권정생의 심정을 잘 말하고 있는 동물은 그의 유년 동화집 <하느님의 눈물>에 등장하는 토끼인 '돌이'일 것이다. 돌이가 하나님과 나눈 대화를 통해 선지자 이사야가 말한 '샬롬'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된다. 돌이와 하나님이 나누는 대화를 들어 보자.

"하느님, 하느님은 무얼 먹고 사셔요?"

"보리수나무 이슬하고 바람 한 줌, 그리고 아침 햇빛 조금 마시고 살지."

"어머나! 그럼 하느님, 저도 하느님처럼 보리수나무 이슬이랑, 바람 한 줌, 그리고 아침 햇빛을 먹고 살아가게 해 주셔요."

돌이의 소원을 들으신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래, 그렇게 해 주지. 하지만, 아직은 안 된단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너처럼 남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세상이 오면, 금방 그렇게 될 수 있단다."

그러자 돌이는 당황해 하며 하나님께 반문하였다.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요?"

하나님의 대답은 단호하기까지 하였다.

"그래, 이 세상 사람 모두가."

그러나 하나님은 잠시 후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애타게 기다리는데도 사람들은 기를 써 가면서 남을 해치고 있구나."4)

<하느님의 눈물>에 등장하는 토끼 돌이는 사실 성경에서 말하는 '샬롬'을 추구하는 인물의 이상적인 모습이 아닐까? 돌이의 모습을 조금 더 살펴보자.

돌이는 산에 사는 털빛이 노란 토끼이다. 돌이는 어느 날 살기 위해 식물을 먹어야 하지만 그럴 경우 식물의 목숨을 빼앗아야 하는 현실에서 고민에 빠진다.

"칡넝쿨이랑 과남풀이랑 뜯어먹으면 맛있지만 참말 마음이 아프구나. 뜯어먹히는 건 모두 없어지고 마니까. 하지만 오늘도 난 먹어야 사는 걸. 이렇게 배가 고픈 걸."

고민하면서 산등성이를 돌아다니던 돌이는 조그만 아기 소나무 곁에 돋아 있는 풀무꽃풀을 발견하고 이렇게 말한다.

"풀무꽃풀아. 널 먹어도 되니?"

돌이의 말을 들은 풀무꽃풀은 아무 대답도 못 하고 바들바들 떨 뿐이었다.

"널 먹어도 되는가 물어봤어. 어떡하겠니?"

그러자 풀무꽃풀은 바들바들 떨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갑자기 그렇게 물으면 넌 뭐라고 대답하겠니? 죽느냐 사느냐 하는 대답을 제 입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니? 차라리 먹으려면 묻지 말고 그냥 먹어."

돌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없이 돌아섰다. 깡충깡충 풀밭 사이를 뛰어다니며 "댕댕이 덩굴", "갈매 덩굴 잎사귀" 그리고 "비디취 나물", "고수대 나물", "수리취 나물"을 보면서도 말없이 돌아설 뿐이었다.6) 사실 먹힌다는 것, 죽고 죽는다는 것은 모두가 겪는 운명이고 마땅한 일이다.7) 하지만 돌이는 먹기보다는 먹히는 것, 죽이기보다는 죽임당하는 것을 자신에게 나은 일로 받아들였다. 돌이가 서산 너머로 넘어가는 해님과 나눈 대화를 들어 보자.

"해님 아저씨, 어떡해요? 나 아직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왜 아무것도 못 먹었니?"

해님이 눈이 동그래져서 묻자 돌이 토끼는 하루 동안 겪은 일을 모두 들려주었다.

"정말 넌 착한 아이로구나. 하지만, 먹지 않으면 죽을 텐데 어쩌지."

해님이 걱정스레 말하자. 돌이 토끼는 이렇게 대답하며 줄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어요. 괴롭지만 않다면 죽어도 좋아요."8)

돌이 토끼의 눈물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기도가 되었을까. 돌이 토끼가 설움에 복받쳐 허공에 하소연하자 하나님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응답하셨다. 돌이 토끼와 하나님이 나눈 대화 가운데 후반부를 다시 한번 들어 보자.

"그래, 그렇게 해 주지. 하지만, 아직은 안 된단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너처럼 남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세상이 오면, 금방 그렇게 될 수 있단다."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요?"

"그래, 이 세상 사람 모두가. 하지만, 내가 이렇게 애타게 기다리는데도 사람들은 기를 써 가면서 남을 해치고 있구나."

그리고 하나님은 돌이에게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주셨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돌이에게 눈물을 보여 주신 것이다.

"돌이 토끼 얼굴에 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습니다. 하느님이 흘린 눈물이었습니다."9)

구약성경에서 묘사되는 하나님의 속성은 '거룩성'이다. 하나님을 본 인간은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사야 선지자조차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사 6:5)라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돌이와 대화하신 하나님은 그런 모습과 거리가 멀다. 돌이에게 "애절한 심정"을 털어놓으시고 눈물을 보이기까지 하시는 하나님이다.

권정생은 우리에게 눈물 흘리시는 하나님을 말하고 있다. 인간들의 평화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말하고 있다. '샬롬'은 하나님께서 눈물을 보여 주실 만큼 소중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한국교회는 '개인의 영혼 구원'을 강조해 왔다. 물론 개인의 영혼 구원은 너무나 중요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염원하시는 샬롬에 대해서는 개인의 영혼 구원만큼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을 깊이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한국교회의 정치 참여가 대형화한 것은 2000년대 들어선 이후이다. 종교사회학자 강인철은 이를 일컬어 "보수 기독교인들이 광장으로 몰려오고 있다"라고 표현하였다.10) 강인철이 말한 것처럼, 광장으로 몰려온 일각의 기독교인 중에는 "계엄령이 답이다. 군대여 일어나라"라며 평화와 대치되는 보수 측 일부의 말에 동의하기도 하였다. 그뿐 아니라 사실상 우리 사회의 약육강식 경제 시스템을 묵인해 왔음도 부인할 수 없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고백하는 한국교회가 정작 하나님의 뜻에 역행한 모습은 아닐까.

자신이 창조하신 인간들이 "기를 써 가면서 남을 해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은 눈물을 흘리고 계시지 않을까. "군대여! 일어나라"고 말하는 한국교회 일각을 보면서 하나님은 눈물을 흘리고 계시지 않을까. '약육강식의 경제 시스템'을 묵인하며 그것을 성경의 정신으로 생각하는 한국교회 일각을 보면서 하나님은 눈물을 흘리고 계시지 않을까.

홍인표 / 백석대학교 기독교전문대학원에서 역사신학(한국교회사)을 전공해 장동민 교수 지도로 박사 학위(Ph.D.)를 취득했다. 주요 연구 영역은 한국교회사지만, 아동문학에도 관심이 있다. 종종 동시, 동요 노랫말을 창작해 발표한다.

1) 조현, 『울림: 한국의 기독교 영성가들』(서울: 휴(休), 2014), 27.
2) 조현, 『울림: 한국의 기독교 영성가들』, 27.
3) 조현, 『울림: 한국의 기독교 영성가들』, 27-28.
4) 권정생, 『하느님의 눈물』(서울: 산하, 2000), 15-18.
5) 권정생, 『하느님의 눈물』, 10-11.
6) 권정생, 『하느님의 눈물』, 12.
7) 권정생, 『하느님의 눈물』, 12.
8) 권정생, 『하느님의 눈물』, 13-14.
9) 권정생, 『하느님의 눈물』, 15.
10) 강인철, 『한국의 개신교회와 반공주의』(서울: 중심, 2006), 15-33.

외부 기고는 <뉴스앤조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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