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기독교는 독특하다. 우선, 아프리카 교회의 역사는 교회사 전체 역사만큼이나 유구하다. 아프리카에는 역사상 최초의 교회들이 있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으로 사도들이 복음을 전했을 때,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에 흩어져 살다가 예루살렘에 모여든 디아스포라 공동체 출신 유대인들이 이 복음에 반응했다. 이렇게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받아들인 후 자신들이 온 곳으로 가서 이웃에게 새로운 교리를 전하고 신앙 공동체를 세운 이들 중에는 "애굽과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아 여러 지방"(행 2:10)에서 온 이들도 있었다. 오늘날의 북아프리카에 해당하는 이 지역에 여러 교회가 세워졌다. 성경 증거 외에도, 초기 문헌들에 의하면, 당시에 오늘날의 이집트와 리비아, 튀니지를 포함한 북아프리카 전역과 에티오피아 지역에 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이런 고대성을 가진 오랜 역사에도, 아프리카 교회는 오랫동안 기독교 세계의 외면을 받았다. 7세기 이전까지는 키프리아누스, 테르툴리아누스,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라틴어권 교부,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아타나시우스 같은 그리스어권 교부들을 배출한, 고대 교회에서 제일가는 교리와 신학의 수원지였다. 그러나 이슬람 등장 후 한때 기독교 지역이었던 북아프리카 전역이 이슬람화되었다. 고립된 이집트의 콥트교회와 에티오피아교회를 제외하고는 19세기까지 기독교와는 거의 관계없는 지역이 되었다. 16세기 이후 가톨릭과 18세기 이후 개신교가 열정적인 해외 선교에 투신할 때에도, 아프리카는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아메리카 전역, 그리고 인도와 중국을 중심으로 아시아 대부분 지역에서 선교 활동과 교회 개척이 안정화되던 시점에, 아프리카에서는 막 선교가 시작되고 있었다.

한때 기독교의 가장 위대했던 중심지였지만, 그러나 가장 오래도록 기독교 세계의 외면을 받은 모순된 현실이 아프리카 기독교의 양면성이다. 그러나 19세기 선교가 시작된 후 아프리카 기독교는 빠른 속도로 이전의 위대한 유산을 회복했다. 21세기가 시작된 지 약 20년이 지난 오늘날의 시점에서, 기독교가 신앙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전반을 주도하는 세계를 의미하는 '크리스텐덤'(Christendom)에 가장 어울리는 대륙은 전통적인 크리스텐덤이었던 유럽이 아니다. 이들의 후계자였던 북아메리카와 호주도 아니다. 오히려 가톨릭 크리스텐덤의 유산을 상당 부분 여전히 유지하는 남아메리카, 그리고 새로운 기독교의 중심 세계로 부상한 아프리카다. 실제로 1945년 이후 "기독교 무게중심의 남반구 이동"이라는 명제가 실현되기 시작한 이래로, 오늘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인구 대비 기독교인의 비율에서도, 지역 교회의 열정과 헌신도에서도 다른 어떤 지역보다 훨씬 기독교적이다. 종교사회학자 필립 젠킨스(Philip Jenkins)의 유명한 책 제목 <The Next Christendom>, 즉 "다음 기독교 세계"1)는 바로 아프리카 기독교의 현상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아프리카 기독교의 또 하나의 독특성은 아프리카 교회의 주체적 특징이다. 고대교회와 단절된 후 근대 서양 교회에 의한 해외 선교 운동의 하반기에야 기독교를 접했음에도, 성장 속도에서 두드러졌다. 그뿐 아니라, 주체성과 주도권, 독립성 면에서도 아프리카 기독교는 특별하다. '주도'(initiated), '독립'(independent), '토착'(indigenous), '시작'(instituted)과 같은 단어들이 이 지역 기독교의 특징을 드러내는 대표 용어들이다. 오늘날 'AICs'라는 용어로 지칭되는 교회들, 즉, 아프리카 독립/주도/토착/시작 교회들(African Initiated/Independent/Indigenous/Instituted Churches)은 선교사들이 아니라 아프리카인이 주도적으로 설립하거나, 주도하는 교회를 지칭한다. 이 교회들도 선교사들이 전래한 성공회·장로회·침례회·감리회·가톨릭·오순절 등의 서양 교회 전통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아프리카 현지인의 주도하에 아주 두드러진 아프리카적 특징을 유지한다. 교파와 조직이 워낙 다양해서 정확한 통계를 내기는 힘들지만, 1980년대 초에 이미 모든 아프리카 기독교인의 15%가량이 이 유형의 교회에 속했고, 지금은 최소 30% 이상이 이 아프리카 토착 교회 소속이다. 또한 여전히 소속은 전통적인 서양 교파 교회에 있다 하더라도, 이들의 예배 및 믿음, 실천의 유형은 그 교파의 전형이라기보다는 아프리카적인 경우가 많다.2)

그렇다고 해서 아프리카 기독교인 다수가 오랜 공교회 전통과 역사, 유산을 무시하고, 아프리카 문화에 과도하게 토착화하려고 시도하는 비정통 유사類似(pseudo-) 기독교인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프리카 기독교인은 다른 어떤 대륙 기독교인보다 보수적이다. 역사적 기독교가 지켜 온 교리와 신앙고백 대부분을 의심 없이 믿고 따른다. 신앙에 대한 감정적, 실천적 반응과 헌신에서도 이들은 다른 어떤 지역 신자들보다 뜨겁다.

페스토 키벵게레.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근현대 아프리카 기독교인 중에는 이른 시기부터 세계 기독교 무대에서 두각을 드러낸 이들이 있었다. 1864년이라는 이른 시기에 아프리카인으로서는 최초로 성공회 주교로 서임받은 인물이자, 선교사·번역가·저술가·행정가 등으로 활약하면서 아프리카인의 긍지와 재능을 전 세계에 확신시킨 나이지리아인 새뮤얼 아자이 크라우더(Samuel Adjai Crowther, c.1807~1891)3)가 대표적이다. 20세기에 오면 전도자, 주교, 부흥사, 학자, 지역 교회 목사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인물이 수없이 많다. 이들이 이런 명성을 얻게 된 원인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가진 재능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식민지 지역에서 성장하고 활동하면서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고, 영국과 미국 등 중심부 영어권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세계 무대에서 활약할 길이 열린 탓도 있었다. 이들 20세기 아프리카 기독교의 주요 인물 중 세계 무대에서 가장 두드러진 명성을 남긴 인물로 우간다인 페스토 키벵게레(Festo Kivengere, 1919~1988)가 있다. 키벵게레는 탁월한 개인 재능 위에, 영어권 기독교 세계 네트워크가 제공한 기회 또한 활용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단지 큰 무대에 서서 유명해진 인물이라고 해서 한 대륙의 한 세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칭송할 수는 없다. 그는 20세기 아프리카 종교와 정치를 각각 대표하는 두 요소인 부흥과 독재를 모두 경험했다. 20세기 중반기 세계 최대의 부흥인 동아프리카 부흥을 통해 회심하며 자신의 기독교적 정체성을 형성했고, 최악의 독재자 이디 아민(Idi Amin, c.1925~2003) 체제하에서는, 그리스도가 그랬듯, 저항하며 동시에 용서하는 기독교인의 양심을 보여 주었다.

1. 동아프리카 부흥

동아프리카 부흥은 1920년대 말과 1930년대에 동아프리카 지역의 개신교 교회에서 일어나, 오늘날까지도 그 여파를 감지할 수 있는 대규모 부흥이었다. 이 부흥에는 이중 기원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하나는 당시 우간다의 성공회 교회의 영적 침체 상태에서 비롯되었다. 성공회 복음주의 선교회인 교회선교회(CMS) 선교사들이 1870년대에 개척한 성공회는 오늘날의 우간다, 케냐, 탄자니아(잔지바르+탕가니카)가 속한 동아프리카 지역이 영국 식민지였기 때문에, 사회적 특권을 누렸다. 따라서 일부 신실한 기독교인이 보기에, 우간다성공회는 사회·경제·정치적 번영과 특권을 누리기 위해 신앙의 본질을 상실한 무력한 교회였다. 우간다의 한 지방이자 고유한 문화를 지닌 부간다(Buganda)의 추장 가문 출신 시메오니 은시밤비(Simeoni Nsibambi, 1897~1978)가 이 무력한 교회의 실상을 비판하며 동아프리카 부흥의 첫 불을 지핀 인물이다.

동아프리카 부흥의 또 하나의 기원은 교회선교회 활동 구역 중 서남부 우간다 지역을 담당한 지부격에 해당하는 선교회인 루안다선교회(Ruanda Mission)의 선교 활동이다. 이 선교회는 우간다 서남부와 당시 벨기에가 통치한 르완다와 부룬디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다. 루안다선교회는 영국 케직사경회의 영향을 받은 복음주의 성결 운동에 깊이 헌신한 선교 단체였다. 따라서 영적 갱신과 성화, 부흥에 대한 관심이 컸다. 영국 의료 선교사 조 처치(Joe Church)가 이 단체가 주도한 부흥을 이끈 대표자였다. 우간다인 은시밤비와 잉글랜드인 처치의 협력으로 1930년대 초에 르완다 동부 가히니(Gahini)에서 첫 부흥이 일어난 후, 1930년대까지 르완다, 브룬디, 우간다 전역으로 퍼져 갔다. 1940년대부터는 케냐와 탄자니아, 수단도 부흥의 영향권 안에 들었다. 이 부흥이 처음 일어나서 퍼진 지역인 가히니 지역의 언어인 루간다(Luganda)어 단어 '발로콜레'(Balokole)가 이때부터 이 부흥을 지칭하는 다른 이름이 되었다. 발로콜레는 루간다어로 "구원받은 사람"(the Saved People)을 뜻했다. 죄 고백과 회개, 회심,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전적인 믿음과 헌신, 성령세례, 성화와 성장을 강조하는 '발로콜레' 부흥은 17세기 경건주의 이래로 모든 부흥 운동이 전형적으로 강조해 온 요소(죄·회개·회심·십자가)에, 케직 운동 등 19세기 성결 운동의 성화 사상이 가미된 부흥이었다.4)

1944년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동아프리카 부흥은 이 부흥에 관련한 선교사 및 아프리카인 지도자들이 유럽 및 북미 순회 여행을 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심지어 서양 세계를 넘어 브라질부터 아시아의 인도와 극동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역 교회에 영향을 끼쳤다. 선교사 조 처지와 로렌스 바럼(Lawrence Barham), 그리고 현지인 지도자 윌리엄 나겐다(William Nagenda)와 페스토 키벵게레가 유명했다. 동아프리카 부흥의 십자가 영성 확산에는 책자와 정기간행물도 크게 기여했다. 특히 로이 헤숀과 레블 헤숀이 쓴 <갈보리 길 The Calvary Road>(1950)5)과 노먼 그립의 <끊임없는 부흥 Continuous Revival>(1952), 두 소책자는 오늘날까지도 널리 읽히는 고전이 되었다.6)

활동기에 키벵게레는 동아프리카 부흥의 전파자였지만, 그 자신이 이 부흥의 여파로 회심한 수혜자이기도 했다. 페스토 키벵게레는 1919년에 우간다 서남부의 반유목 시골 마을인 루쿵기리의 비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페스토는 어린 시절을 주로 소를 치며 보냈다. 그러나 소를 지키면서 예수의 생애를 다룬 어린이책을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이것이 그가 처음으로 기독교를 접한 계기였다. 10살이 되어서는 마을에 세워진 미션스쿨에 다녔고, 중고등학교 교육을 받은 후에는 교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재직한 학교가 기독교 학교였기 때문에, 그는 의무적으로 교회에 출석해야 했다. 그러나 불가지론자였던 19세의 키벵게레는 기독교를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다. 오히려 삶에 대한 좌절감으로 거의 자살 직전이었기에 교회에도 출석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동아프리카 부흥의 발원지에서, 여전히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던 시기에 살았던 그가 이 여파를 피하기는 힘들었다.

어느 날 술 마시는 모임에 참석했다가 비틀거리며 자전거를 몰고 귀가하던 길에 그는 한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예수를 만났고, 죄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생생하고 기쁨에 찬 얼굴로 고백했다. 친구와는 완전히 다른 자신의 상태에 절망한 그는 집으로 돌아온 후 깊은 영적 고뇌와 기도 속에서 결국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심을 경험했다.7) 이 경험을 키벵게레는 성공회 주교 자격으로 1974년에 참가한 로잔 대회에서 부흥사다운 언변으로 흥미진진하게 간증했다. 이 간증에 담긴 고백이 동아프리카 부흥에 참여한 이들이 공유한 전형적인 경험이자 표준이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내 불쌍한 인생을 끄집어내서 노출시켰습니다. 나는 고통 속에서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를 갈보리로 이끈 그 사랑과 그분의 놀라운 은혜에 내 텅 빈 상태를 맡겼습니다. 어떻게 그분이 그 대적의 마음으로 들어오셨는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그분은 혼돈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현실적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시자 나는 이해했습니다. 그분이 내 상처를 만지셨습니다. 그분이 내 짐을 벗겨 내셨습니다. 그분이 내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분이 나를 해방시키셨습니다. 나는 무릎을 들고 일어났습니다. 달리고, 껑충껑충 뛰고, 흥분했습니다! 모든 아프리카 분들에게 이 얘길 하고 싶네요. 저는 성공회 주교이고, 성공회 주교는 늘 흥분하지 않습니다. 우리(성공회 주교)는 스위스 사람들만큼이나 신중합니다. 그러나 그분이 나를 만나 주신 후, 저는 흥분했습니다. (하략)"8)

죄에 대한 인식, 십자가의 그리스도 조우, 고백과 회심, 해방감, 절망을 벗어난 환희는 동아프리카 '발로콜레' 부흥의 공통 요소였다. 이전 시기의 다른 부흥 및 대각성도 마찬가지였다. 회심 직후 키벵게레는 오랫동안 그가 미워했던 불신자 아프리카인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화해했다. 이어서 그가 수년간 증오해 왔던 잉글랜드인을 만나기 위해 50마일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친구가 되었다. 회심 이후의 상호 죄 고백과 용서, 화해 역시 동아프리카 부흥이 양산한 공통의 유산이었다. 이후 교사로 계속 활동하다가, 40대 중반에 잉글랜드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목회자가 된 그는 일평생 전 세계를 다니며 이 회심과 갱신 경험을 설교와 연설, 활동을 통해 공유한 동아프리카 부흥의 대변자 중 하나가 되었다.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페스토 키벵게레.

2. 아프리카의 빌리 그레이엄

페스토 키벵게레는 '아프리카의 빌리 그레이엄'이라는 별명으로 세계에 잘 알려져 있다. 아프리카나 아시아 등 '대다수 세계'(Majority World, 이전의 '제3세계')에서 유력한 활동을 한 인사를 서양인 명사 이름을 빌려 지칭하는 관습이 오늘날에는 비판을 많이 받는다. 그러나 키벵게레는 재능면에서 빌리 그레이엄만큼 탁월한 데다, 그와 유사한 활동을 한 인물이기도 했다. 한편 그레이엄이 가진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세계적 명사로 올라서는 데 도움을 얻기도 했다. 따라서 그를 '아프리카의 빌리 그레이엄'이라 불러도 큰 무리는 없다.

키벵게레는 잉글랜드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미국에서 부제(deacon)가 된 후 우간다에서 48세 되던 1967년에 성공회 사제(priest)로 안수를 받았다. 동아프리카 부흥이 처음부터 영국계 선교사들 주도하에 진행되었기에, 교사이자 연설가로서 재능이 뛰어났던 그는 복음주의 국제 네트워크의 일원으로 이른 시기부터 활약할 기회를 얻었다. 키벵게레가 국제 무대에서 활약한 시발점은 1959년으로, 회심 후에도 목회에 뛰어들지 않고 계속해서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시기였다. 호주 교회선교회(ACMS)는 그해에 동아프리카인 두 사람을 초청해서 동아프리카 부흥의 유산을 자신들에게도 나누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초청받은 두 사람은 중부 탕가니카(오늘날 탄자니아의 일부) 성공회 교구의 부주교였던 요하나 오마리(Yohana Omari)와 당시 도도마(Dodoma) 소재 얼라이언스 고등학교 교사였던 무명의 우간다인 페스토 키벵게레였다. 키벵게레는 여기서 한 달가량 머물면서 북부 특별지구에서 호주 원주민(Aborigine)을 대상으로 사역했다. 이 사역을 통해 그는 원주민 교회의 부흥을 자극했을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에서와 마찬가지로, 원주민들이 부흥 신앙을 자신들의 틀에 맞게 토착화할 수 있게 도왔다.9)

영어권 주류 세계에서 동아프리카 부흥의 대변자 중 하나로 알려지면서, 키벵게레의 사역은 빌리 그레이엄과의 동역으로 이어졌다. 성공회 사제로 안수받은 지 3년 후인 1970년부터 그는 아프리칸엔터프라이즈(African Enterprise) 지도자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1961년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 성공회 신자 마이클 캐서디(Michael Cassidy, 1936~)가 21살에 설립한 이 단체는 아프리카 전역의 도시를 중심으로 지역을 복음화하려는 목적으로 세워진 선교회였다. 빌리 그레이엄 영향을 크게 받은 그는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963년에 졸업했다. 졸업 후 남아프리카에서 대규모 전도집회를 기획한 이후, 아프리카 전역으로 서서히 조직을 확장했다. 이 선교회의 두 번째 지부가 1971년에 우간다에 세워졌는데, 이 우간다 지부 책임자가 바로 키벵게레였다. 특히 키벵게레가 1972년에 우간다 서남부 키게지(Kigezi)의 성공회 주교로 임명되면서, 이 선교회 위상도 높아졌다.10)

영향을 받으면서 목표와 지향성, 방법론과 성격이 비슷해졌기에, 빌리그레이엄전도협회(BGEA)와의 연대가 강화되었다. 1970년과 1978년에 키벵게레는 시드니와 멜버른에서 열릴 빌리 그레이엄 전도 대회 준비위원으로 호주를 다시 방문했다가, 이번에는 호주 원주민 지도자 셋을 탄자니아로 데리고 갔다. 거기서 동아프리카 부흥의 현장과 유산을 목격하고 익힌 호주 원주민들은 귀국 후 아프리카에서 배운 바를 자신들의 사역지에서 시도했다. 이로써 1979년에 호주 원주민 구역에서 동아프리카 부흥과 비슷한 유형의 부흥이 일어났다.11)

동아프리카 부흥은 1942년 8월에 탕가니카(오늘날 탄자니아의 일부)에서 활동하던 미국 메노나이트선교회에도 영향을 끼쳤다. 2차 대전 여파로 이곳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은 펜실베이니아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들은 동아프리카 부흥의 영성을 미국 메노나이트 공동체에 선물했다. 당시 신학적 자유주의의 침투, 메노나이트식 율법주의, 전쟁 중 역사적 반전 평화주의를 위반한 문제로 분열 위기에 처해 있던 미국 메노나이트 교단은 이 부흥으로 상당한 내적 회복을 경험했다. 전쟁 후 1954년에 다시 탄자니아로 돌아간 메노나이트 선교사 도널드 제이콥스와 그의 아내 애나 룻 제이콥스는 나중에 키벵게레의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하나가 되었다. 도널드 제이콥스는 1988년에 키벵게레가 사망한 후 열린 장례식에서 연설한 두 사람 중 하나였다. 키벵게레가 맡았던 아프리칸엔터프라이즈 이사장직을 계승하기도 했다. 이로써 주로 복음 전도와 회심, 아프리카 기독교의 초교파, 초인종적 연합에 집중하던 이 단체가 아나뱁티스트 전통의 제자도, 평화주의, 사회정의 유산과 결합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12)

키벵게레와 빌리 그레이엄은 개인 우정도 깊었다. 빌리 그레이엄 전도 집회가 미국과 세계 여러 곳에서 열렸을 때, 키벵게레는 빌리 그레이엄과 함께 수일간 연속으로 열린 집회에서 강사로 활약했다. 그는 그레이엄의 영어 설교를 동아프리카 지역 주요 언어인 스와힐리어로 번역하기도 했다.13)

1972년 페스토와 그의 아내 메라.

키벵게레가 국제적 저명인사였다는 사실은 1974년에 로잔에서 열린 복음주의자들의 대회에서 그가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로 활약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회 기획위원장 빌리 그레이엄과 호주 성공회 보조주교 잭 데인(A. J. 'Jack' Dain)은 로잔 대회가 유럽과 북미의 백인들만의 대회가 아니라, 전 세계 복음주의자 모두를 대변하는 대회여야 한다고 합의했다. 그래서 이들은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지도자들도 기획위원회에 포함시켰다. 아프리카인으로는 두 사람이 참여했는데, 케냐 나이로비에서 침례교회를 담임하던 가나 사람 고트프리드 오셰이-멘샤와 페스토 키벵게레였다.14)

로잔 대회에서 키벵게레가 맡은 역할은 크게 두 가지였던 것 같다. 하나는 아프리카 대표로서, 세 차례에 걸쳐 간증과 강연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서로 다른 두 모임에서 신앙 간증을 하면서 동아프리카 부흥이 자신에게 준 구원 이야기를 편안하게 나누었다.15) 강연에서는 동아프리카 부흥의 핵심인 십자가가 전도와 세계 복음화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나누었다.16) 또 하나의 역할은 동아프리카전략그룹에 참여하여 여러 주제를 논의하고 의견을 조율하는 것이었다. 로잔 대회 당시 가장 크게 이슈가 된 주제는 남아메리카 복음주의자들이 주장한 복음주의의 사회참여 문제와 동아프리카 장로교 총무이자 케냐 사람인 존 가투(John Gatu, 1925~2017)의 '선교 모라토리엄' 주장이었다. 남아메리카 복음주의자들의 주장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진 결과, '새의 양 날개' 혹은 '칼의 양날' 비유로 흔히 알려진 복음 전도와 사회참여의 동반 중요성 문구가 등장했다.17) 서양 선교사가 아프리카에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외친 가투의 선교 모라토리엄 선언도 대회에서 큰 논란이 되었다. 당시 동아프리카전략그룹에서는 가투의 주장을 놓고 격론 끝에 공식적으로는 "전체적 모라토리엄이라는 개념을 부인했지만, 외국 자본에 건강하지 못한 모습으로 의존하는 문제를 지적하고 특수 상황에서 고려할 수 있는 '모라토리엄 이면의 개념'이 필요하다고 선언했다."18) 가투를 반대하는 아프리카 지도자들과 가투 지지자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중재하는 자리에 키벵게레가 있었던 것 같다.

3. 화해: 무한한 사랑

주교이자 전도자로 맹활약하던 키벵게레의 삶에도 어둠의 골짜기가 있었다. 우간다는 1962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옛 왕이었던 무테사 2세를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밀턴 오보테를 총리로 임명했다. 그러나 식민지 상태에서 독립한 근대 아프리카 국가 대부분이 그랬듯, 식민지 정부가 임의로 나눈 선을 따라 서로 다른 역사와 혈통, 언어, 종교를 가진 종족들이 한 국가로 편입되면서, 우간다에서도 독립 초기부터 끊임없는 내부 갈등이 이어졌다. 1966년에 밀턴 오보테가 쿠데타로 무테사 2세를 축출하고 대통령이 되었다.

영국 식민지로 있다가 독립한 탓에 독립 이후에도 우간다에서 성공회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독립 이후 권력을 잡은 대통령 7명 중 6명이 성공회 소속이었다. 1971년부터 1979년까지 통치한 이디 아민(Idi Amin, 1928~2003)만 무슬림이었다. 독립 이후 1980년대까지 지속된 독재정치에 대한 교회의 대응을 놓고 성공회 지도부는 날카롭게 분열되어 있었다. 키벵게레는 1972년에 성공회 키게지 주교로 임명되면서, 정치 문제에 연루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이 되었다.

1971년에 오보테를 축출하고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인 이디 아민은 권력 장악 직후에 오보테를 지지했거나 쿠데타에 반대한 학자·언론인·장교·법관·교사 등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아시아인 5만 명을 추방했고, 장교 약 3000명에, 민간인 1만 명 이상을 살해했고, 1976년에는 자신을 종신 대통령으로 선언했다. 그가 통치한 1979년까지 최소 10만 명에서 최대 30만 명에 이르는 우간다인이 끌려가 고문당하거나 살해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1978년에는 군 내부 소요를 무마한다는 명목으로 탄자니아 침공을 명령했으나, 반군이 탄자니아군과 연합하여 오히려 역으로 수도 캄팔라를 점령했다. 해외로 도주한 그는 2003년에 사망했는데, 그가 자행한 대학살 때문에 "아프리카의 검은 히틀러"라는 악명을 얻었다.19)

이디 아민의 통치기에는 교회 지도자들도 잔혹한 핍박을 받았다. 1977년부터 무슬림인 아민은 성공회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인으로서는 최초로 성공회 대주교 자리에 오른 에리카 사비티(Erica Sabiti, 1903~1988)는 때로 독재자에 단호한 반대를 표하기도 했으나, 교회의 수장으로서 여러 정치적 입장을 내야 할 때 신중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를 이어 1974년에 대주교가 된 자나니 루윔(Janani Luwum, c.1922~1977)은 이디 아민의 폭정이 더 심해진 1977년에 대통령의 폭정과 살육을 비판하는 연설을 했다. 특히 그해에 성공회 지도부가 우간다성공회 10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자, 이디 아민과 정부는 이들이 해외로 망명한 우간다인들이 우간다를 침공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모아 제공하려 한다는 누명을 씌웠다. 2월 16일에 대통령은 대주교와 그의 두 보좌사제들을 체포한 후, 캄팔라 시내에서 이들을 반역자로 몰아 굴욕적인 거리 행진을 시킨 후 결국 처형했다. 루윔의 처형 이후 다른 성공회 지도자들이 다음 표적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1973년에 자기 교구 소속 세 사람이 살해당한 문제 때문에 이디 아민을 만나 항의한 적이 있었던 키벵게레도 그중 하나였다. 여러 다른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키벵게레 가족은 야음을 틈타 이웃한 르완다 국경의 산악 지대를 건너 국외로 탈출했다.20)

<나는 이디 아민을 사랑한다 Ich Liebe Idi Amin>의 독일어판 표지. 페스토 키벵게레와 이디 아민의 사진이 나란히 실려 있다.

아민의 통치기에 해외에서 망명 생활을 했던 키벵게레는 아민이 축출된 후 우간다로 돌아갔다. 해외에서 그는 전도자인 동시에, 핍박받는 우간다 교회의 대변자로서 세계에 현실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국외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와중에 키벵게레는 동아프리카 부흥의 주요 주제이자, 그가 회심 직후에 행동으로 옮겼던 용서와 화해에 대해 다시 깊이 고뇌했다. 그러던 중 1977년에 <나는 이디 아민을 사랑한다>21)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했다. "원수를 사랑하라"(눅 6:27)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고뇌에 찬 묵상에서 기원한 것이었다.

"나는 아민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에 대한 나의 태도를 정리해야 했다. 성령께서는 나에게 내 영이 점점 굳어지고 있으며 핍박하는 자들을 향한 나의 굳은 마음과 증오심이 영적인 손실을 가져온다고 보여 주셨다. 이러한 상태는 하나님의 사랑과 교통할 수 있는 능력을 나로부터 앗아 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내 사역과 증거의 핵심이 아닌가. 그러므로 나는 주님께 아민 대통령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더욱 풍성히 달라고 간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정한 평화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며 언제나 마음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향할 때 찾아온다. 그러나 이 평화는 항상 어떤 대가를 요구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고난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며 이런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마다 그 사랑은 어떤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실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22)

키벵게레는 귀국 후에도 새로 정권을 잡은 오보테 대통령이 인권 탄압을 자행할 때 이에 대담하게 맞섰다. 그는 동아프리카 부흥 유산을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호주, 남태평양에까지 퍼뜨린 이 부흥의 대표적인 대변인 중 하나였다.23) 그는 1988년에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무한한 사랑 Love Unlimited>은 키벵게레가 남긴 많은 책과 연설, 설교 중 한글로 번역된 유일한 유산이다.24)

1) 젠킨스의 3부작 중 1부에 해당하는 이 책은 옥스퍼드대학출판부(OUP)에서 2002년에 처음 발간된 후 학계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후, 2007년에 확대 개정판이 나왔다. 한국에서는 이 2007년 개정판이 『신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발간되었으나, 현재 절판 상태다. 필립 젠킨스, 『신의 미래』, 김신권, 최요한 역 (서울: 도마의길, 2009).
2) AICs에 대한 간략하면서도 명료한 소개로는 다음 두 글을 보라. https://www.oikoumene.org/en/church-families/african-instituted-churches/african-instituted-independent-churcheshttps://www.dandc.eu/en/article/why-african-independent-churches-matter. 한글로 된 자료로는 앤드루 월스, 『세계 기독교와 선교 운동』, 방연상 역 (서울: IVP, 2018)의 제9장 "아프리카 독립 교회의 도전"이 대표적이다.
3) 티모시 라슨 편, 『복음주의 인물사』, 이재근, 송훈 역 (서울: CLC, 2018), 291-293을 보라.
4) Kevin Ward and Emma Wild-Wood, The East African Revival: History and Legacies (London: Routledge, 2012), 3f.
5) 한국어 번역판도 있다. 로이 헷숀, 『갈보리 언덕』, 장기순 역 (서울: CLC, 2012).
6) 브라이언 스탠리, 『복음주의 세계 확산: 빌리 그레이엄과 존 스토트의 시대』, 이재근 역 (서울: CLC, 2014), 135-141.
7) 존 우드브리지 편, 『그리스도의 대사들』, 권성수 역 (서울: 횃불, 1995), 304f.
8) Festo Kivengere, "Testimony," in J. D. Douglas, ed., Let the Earth Hear His Voice: International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 Lausanne, Switzerland, Official Reference Volume: Papers and Responses (Minneapolis, MN: World Wide Publications, 1975), 416f.
9) 스탠리, 『복음주의 세계확산: 빌리 그레이엄과 존 스토트의 시대』, 137f.
10) https://uganda.africanenterprise.com/about-us/.
11) 스탠리, 『복음주의 세계 확산: 빌리 그레이엄과 존 스토트의 시대』, 138.
12) 스탠리, 『복음주의 세계 확산: 빌리 그레이엄과 존 스토트의 시대』, 139-141.
13) https://dacb.org/stories/uganda/kivengere-festo/.
14) 스탠리, 『복음주의 세계 확산: 빌리 그레이엄과 존 스토트의 시대』, 248.
15) Festo Kivengere, "The Work of the Holy Spirit in Evangelization, Individually and through the Church," in J. D. Douglas, ed., Let the Earth Hear His Voice: International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 Lausanne, Switzerland, Official Reference Volume: Papers and Responses, 277f; Kivengere, "Testimony," ibid, 416f.
16) Kivengere, "The Cross and World Evangelization," ibid, 400-404.
17) 이재근, 『세계 복음주의 지형도』 (서울: 복있는사람, 2015)의 제5장과 스탠리, 『복음주의 세계 확산: 빌리 그레이엄과 존 스토트의 시대』, 255-259를 보라.
18) 스탠리, 『복음주의 세계 확산: 빌리 그레이엄과 존 스토트의 시대』, 259-262.
19)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Idi-Amin. 이디 아민의 생애를 묘사한 영화 '라스트 킹 The Last King of Scotland'(2006)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45430.
20) Kevin Ward, A History of Global Anglicanism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 184-186.
21) Festo Kivengere, I Love Idi Amin: The Story Of Triumph Under Fire In The Midst Of Suffering And Persecution In Uganda (Old Tappan, NJ: F. H. Revell Co., 1977).
22) 존 우드브리지 편, 『그리스도의 대사들』, 권성수 역 (서울: 횃불, 1995), 307에서 재인용.
23) Ward and Wild-Wood, The East African Revival: History and Legacies, 185.
24) 페스토 키벤게레, 『무한한 사랑』, 김대옥, 정금년 역 (서울: 프리칭아카데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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