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는 장로교회 목사인 나에게도 결코 낯설지 않다. 교회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있는 사람은, 웨슬리가 조지 윗필드와 함께 영국 대각성 운동을 일으킨 주역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칼뱅주의 교리 때문에 한국교회는 대체로 조지 윗필드를 선호하지만, 웨슬리를 빼놓고 영국 대각성 운동을 논할 수 없다. 종교개혁 이후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은 인간의 행위와 공로를 부정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터부시했다. 루터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칼뱅에 이르러 구원 이후 삶에 대한 질문이 일어났고, 결국 성화론에 집중하게 된다. 18세기 영국 교회는 영적으로 무능을 넘어 죽은 상태였다. 산업혁명 결과는 참혹했다. 수공업자는 몰락과 사양의 길로 접어들었고, 개인의 도덕성은 생존 경쟁과 물질주의에 함몰해 상실되고 말았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했던가. 조지 윗필드와 웨슬리 형제는 혜성처럼 일어나 영국을 개혁해 나갔다. 조지 윗필드가 개인적으로 행동했다면, 웨슬리 형제는 조직적이었다. 무엇보다 땅에 떨어진 도덕성을 끌어올리고자 성화와 실천을 강조했다. 칭의를 강조한 윗필드와 실천을 강조한 웨슬리의 긴장 관계는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두 사람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읽을 필요가 있다. 필자는 저자가 제시한 일차 독자인 "목회자, 신학생, 교회학교 교사, 웨슬리안 전통에 익숙한 교인"(19쪽)의 관점에서 본서를 살필 것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소속의 신학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읽기보다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는 데 우선할 것이다. 본서가 웨슬리 신학의 정수를 소개하고 있다는 점을 배움의 기회로 삼고자 한다.

PART 1과 PART 2로 나뉘는데, PART 2는 웨슬리의 논문 두 편을 번역해 붙인 것이다. 저자 논지는 PART 1에 담았다. 총 13장에 걸쳐 웨슬리의 교리를 빼곡히 설명하고 해석한다. 내용은 크게 두 부분이다. 1~3장은 서론부다. '사명', '교리의 필요성', '신학 방법론'을 다룬다. 4~13장은 웨슬리의 교리를 신론에서 종말론까지 다룬다. 웨슬리 신학의 정수는 케네스 콜린스가 출간한 <성경적 구원의 길>(새물결플러스)에 있다. 루터와 칼뱅으로 대표되는 종교개혁 신학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웨슬리 신학은 익숙한 듯 낯설다. 필자는 '선행 은총'이 루터가 그토록 싸웠던 중세 공로 사상과 닮았다고 느꼈다.

<웨슬리안 실천 교리 -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 김민석 지음 / 샘솟는기쁨 펴냄 / 296쪽 / 1만 8000원

아직 살아 있습니까

18세기 부흥 운동은 단연 찰스 웨슬리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웨슬리 홀로 부흥 운동을 주도하지 않았다. 수많은 헌신자가 있어 가능했다. 부흥은 철저히 하나님이 주도하시지만, 헌신된 사람들을 사용하신다. 18세기 부흥 운동 형태는 '교회 밖'에서 시작됐다. 하나님 말씀을 들고 교회 밖 사람들을 찾아 설교하기 시작한 것이다. 야외 설교자라고 불린 그들은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렸다. 헌신의 대가는 컸다. "복음을 전하다 병으로, 낙마로, 테러로, 강도 상해"(24쪽) 등으로 수많은 전도자가 목숨을 잃었다. 지난해 보았던 이들을 보지 못하는 일이 빈번했다. 찬송가 '생전에 우리가'에는 배경이 있다. 가사를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아직 살아 있습니까? 그리고 서로 얼굴을 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에 예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립시다!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여기 충만한 구원으로 인도된 우리는 그분 앞에서 예수를 찬양하기 위해 모여 있습니다." (25쪽)

쉽게 간과할 수 없다. 웨슬리 신학이 갖는 독특성과 정체성을 모두 포함하는 이야기다. 절대적 헌신과 실천적 신앙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하고, 하나님나라 부흥을 꿈꾸던 웨슬리안의 마음을 담고 있다. 루터의 이신칭의 교리를 기반으로, 칼뱅주의 신학은 신론에 중심을 둔다. 츠빙글리 역시 신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개혁주의 사상의 기저를 보여 준다. 웨슬리 신학은 많은 부분은 개혁주의 관점을 견지하지만 하나님 은혜로 구원받은 이들의 결단과 헌신, 성화에 집중한다. '어떻게 구원 받았는가'보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문제에 골몰한다. 웨슬리 신학이 실천적 성향을 강하게 갖는 이유는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200년이 지났다는 시대 상황과 기독교 국가인데도 도덕적으로 심각한 퇴보가 일어난 영국의 사회현상과 맞물린다. 웨슬리 신학을 들여다볼 때 역사적·사회적 맥락을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메소디스트' 설교자들 소명은 '개혁'과 '성결'로 압축된다. 개혁은 국가 개혁과 교회 개혁으로 구분된다. 성결은 "개인의 변화와 세상의 변혁"(27쪽) 수단이다. 성결 개념은 칼뱅주의 정의와 약간 다르다.

"성서적 성결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피조물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온 땅에 성서적 성결이 전파된 상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을 통해 온 땅이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으로 충만해진 상태이다." (28쪽)

칼뱅주의 신학이 '성결'을 다룰 때 개인의 성화적 차원에 집중한다면, 웨슬리는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한다. 웨슬리안이 사회적 헌신과 실천적 사랑을 강조한 이유에는 당시 시대적 배경이 담겨 있다. 그렇다고 교리를 무시하고 실천만 몰입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실천적 성향이 강했지만, 웨슬리 역시 교리를 중요하게 여겼다.

신학과 교리의 중요성

웨슬리는 교리와 실천 사이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교리를 우상화하거나, 교리 없는 삶의 맹목으로 떨어지는 일을 경계했다. 기독교 교리를 "핵심 교리(fundamental doctrine)와 의견(opinion)"(39쪽)으로 구분했다. 신학자보다 운동가에 가까워, 웨슬리는 핵심 교리를 명징한 표나 저술로 드러내지 않았다. 웨슬리 저술에 전반적으로 나타난 핵심 교리는 원죄와 칭의, 마음과 삶의 성결 교리로 추측할 수 있다. 웨슬리는 칭의를 정적 정의를 넘어, 삶이라는 동적 형태로 정의하고 싶어했다. 칭의가 "마음과 삶의 성결로 나아가야 한다'(40쪽)고 강조했다. 교리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의 기준"(41쪽)이다. 또한 "변증 기능"(42쪽)과 "훈련의 가이드라인"(43쪽) 기능을 한다.

웨슬리는 성경 각 본문이 "성경 전체와 상응하는 평이한 의미"(50쪽)를 지니며,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인 구원 사역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구속의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할 때 해석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삼위 하나님께서 성경적 진리를 체험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과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신다"(51쪽)는 성경관은 교리와 삶을 놓치지 않으려는 웨슬리의 성향과 닮았다. 웨슬리에게 이성은 어떤 대상일까. 저자는 웨슬리가 일반 이성을 "이해를 위한 영혼이 능력이며 도구"(55쪽)로 보았고, 하나님을 알려면 "믿음이 필요하다"(56쪽)고 말했다고 지적한다.

첫 사람의 타락으로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의 손상과 상실"(96쪽)이 일어났다. 그 결과, 도덕 형상 상실이 이어졌다. 두 번째 결과는 "단절과 죽음"(96쪽)이며, 세 번째 결과는 "삼중 욕망으로 가득 찬 존재"(97쪽)가 된 것이다. 삼중 욕망은 육신의 소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지칭한다. 삼중 욕망은 치명적 질병이다. 삼중 욕망을 만족하게 하려는 노력은 "이 세상에 대한 사랑"(97쪽)으로 정의된다. 웨슬리는 인간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 사역과 하나님의 은총으로 보는 동시에 "거듭남의 순간에 도덕적 형상이 본격적으로 회복되기 시작한다"(98쪽)고 말한다. 웨슬리는 구원이 곧 도덕적 회복으로 나아간다고 강조한다. 하나님 형상 회복의 중심에 "도덕적 형상"(98쪽)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성경적 구원'이란

웨슬리 신학의 핵심 중 핵심 성경적 구원의 길을 살펴보자. 칼뱅주의 신학과 현저히 다르게 나타나는 부분이 바로 이곳이다. 웨슬리는 하나님이 구원 이전에 '선행 은총'을 허락하시고 다가오셨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콜린스 주장을 인용해 선행 은총의 다섯 가지 유익을 설명한다(119~120쪽).

① 선행 은총으로 하나님에 관한 가장 기본적 지식을 얻게 된다.
② 하나님의 부르심에 '네'라고 대답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선행 은총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어느 정도 자유 의지를 주신다.
③ 선행 은총을 통해 이 세상에 도덕법(하나님의 법)이 어느 정도 다시 주어졌다.
④ 선행 은총을 통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초자연적 선물로 양심을 주셨다.
⑤ 선행 은총의 유익들을 잘 활용하면 인간과 사회의 사악함을 어느 정도 제약할 수 있다.

칼뱅주의 신학을 따르는 필자가 가장 난해하고 모호했던 부분이 바로 이곳이다. 웨슬리는 거듭나기 이전에 어느 정도의 '선'이 가능한 것처럼 이야기한다. 루터, 칼뱅의 경우는 거듭나기 이전에 이성과 지성의 문제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선의 개념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다만 중생 이전에도 보편 은총 개념으로 하나님에 관한 신 지식이 아닌 자연적 지식과 일반적 도덕성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선행 은총 문제는 웨슬리와 윗필드의 가장 뜨거운 논쟁 주제였던 '하나님의 예정'으로 확장될 수밖에 없다. 선행 은총 개념이 인간의 자유의지 문제로 연결된 경우, 하나님의 예정은 논리적 모순을 갖게 된다. 구원 주도권이 하나님의 '미리 아심'이 아닌 인간의 선택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이중 예정론을 부정한다. 이중 예정은 창세 이전 하나님의 작정과 유기(버려둠)가 이미 결정되었다는 칼뱅주의 교리다. 웨슬리는 이중 예정론이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이 충돌할 뿐만 아니라 거룩한 사랑을 뒤로 밀어내는 경향이 있다"(128쪽)고 본다.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책임성이 훼손되며, 인간의 어떠한 행위도 불필요하게 만들며, 성화와 설교의 필요성을 약화하고, 결함 있는 해석에 기초하며,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들이 결정론적 예정의 가르침을 파괴한다고 보았다. 저자는 토마스 오덴 입을 빌려 이렇게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역사를 미리 아셨다. 따라서 세상이 시작되기 전의 영원부터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시는 것을 결정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제안을 하나 하시기 위해서였다. (중략)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거나 믿지 않을 것을 선택할 수 있다. 그 선택의 결과로 영원한 생명을 받거나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된다." (129~130쪽)

오덴의 주장을 분석하면, 웨슬리 주장은 확연히 알미니안적이며, 에라스뮈스의 자유의지와 닮아 있다. 그들과의 결정적인 차이가 바로 '선행 은총'이다. 저자는 타락 때문에 인간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께 응답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인정하면서(130쪽), 선행 은총으로 하나님께 응답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초대하셨지만 응답 여부로 "구원받거나 멸망받는 것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131쪽)이라고 말한다. 이 부분은 칼뱅주의 5대 교리 중 하나인 '불가항력적 은혜'와 대치된다. 어떤 면에서 칼뱅주의 교리는 모순적이다. 하나님 은혜를 강조하는 동시에, 인간 책임을 묻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이러한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최종 결정을 인간 손에 맡긴다.

존 웨슬리.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저자는 웨슬리 신학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성경적 구원의 길'(9~11장)에서 깊이 있게 다룬다. 선행 은총은 하나님께 응답하기 위해 조건을 갖추는 것부터 성화의 모든 단계에서 역사한다. 선행 은총은 양심을 일깨워 하나님을 인지하도록 도우며, 양심은 자유의지를 도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게 한다. 믿는 순간 그리스도의 의가 덧입혀지고, 그리스도 의는 우리 구원의 공로적 원인으로 작용한다(151쪽). 구원의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인간적 의(칭의)가 덧입혀진다. 덧입혀진 의는 다시 '새겨짐(거듭남)'로 나아간다.

"칭의는 용서, 용납, 화해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 변화를 의미하는 반면에 신생은 그리스도를 닮으러 나아가게 하는 실제적 변화의 첫 시작, 즉 성화의 시작을 의미한다. 칭의는 관계의 변화인 반면에 신생은 실제적 변화이다." (153쪽)

신생, 즉 거듭남은 "성화의 시작이며 성화로 들어가는 문"(155쪽)이다. 웨슬리는 "지속적인 믿음"(160쪽)을 통해 신자 안에 남겨진 죄를 치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죄는 신자의 타락의 결과이며, 타락하지 않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자녀 됨을 끊임없이 점검받아야"(160쪽) 할 필요성이 상존한다. 점검의 방법은 '경건의 행위'와 '자비의 행위'로 구분된다(161쪽). 주의 만찬, 예배, 금식, 기도, 성경 연구, 성경 묵상, 경건의 글 읽기, 찬송, 설교, 말씀 묵상 등과 같은 것이다. 자비의 행위는 긍휼을 베풀고, 나그네는 환대하는 것을 말한다.

나가면서

칼뱅주의 목회자였기에, 웨슬리는 교회사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는데도 2차 문헌이나 조지 윗필드 이야기 속에서 읽은 것 외에는 없었다. 기껏해야 <존 웨슬리의 일기>를 단편적으로 읽은 것뿐이었다. 김민석 교수 저작으로 접한 웨슬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웨슬리는 신학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후대 학자들이나 메소디스트들이 체계화하려고 노력했지만, '웨슬리 신학은 이것이다'고 정의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이 책 역시 필자가 잘못 읽은 것이 아니라면 적지 않은 부분에서 모호하다. 칼뱅주의 신학에 익숙한 탓이기도 하고, 웨슬리 신학 자체가 갖는 실천신학적 측면 때문일 수도 있다. 두 번째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책임을 다하려는 몸부림이 느껴진다. 적지 않은 부분에서 필자가 몸담은 칼뱅주의 신학과 거리감이 있다. 하지만 웨슬리 신학에는 장로교단이 잃어버린 성화의 갈망과 사회변혁을 향한 열정이 담겨 있다. 지성적 믿음으로만 구원과 중생의 의미를 담으려는 이들에게 불편한 느낌을 줄 것이다. 심각한 도덕의 타락과 실천 없는 종교적 타성으로 안주해 있는 영국 교회에 불을 지폈던 웨슬리 신학은 변혁을 요구하고 사랑의 실천을 강요한다.

한국교회가 마이너스성장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이 위기는 헌신과 사랑의 부재 탓이 아닐까. 주일학교가 무너지고 있다는 염려와 통계는 끊임없이 나오고 있지만, 주일학교를 위해 기도하고 재정을 투자하며 교사로 헌신하는 이들은 계속 줄어드는 이유는 무엇을 말하는 걸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대로 살아가려는 몸부림으로 점철된 웨슬리의 생애는, 교리는 있으나 실천을 상실한 현대 교회에 던지는 도전이다.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거룩한 목적을 위해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도전받기 원한다.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정현욱 /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인, 양구장로교회 목사

외부 기고는 <뉴스앤조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