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의 삶을 살펴보면 '꼬여도 이렇게 꼬인 삶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권정생은 우리 현대사에 개인에게 강요한 수난을 조금도 비껴가지 못한, 철저한 피해자였다. 그는 일생토록 아팠고, 아픔 속에서 기도하고 견뎠다"1)라고 하는 이계삼의 표현은 권정생의 삶을 잘 함축하고 있다. 초기 권정생의 삶을 대략 살펴보도록 하자.2)

권정생은 1937년 일본 동경 시부야 하따가야 혼마치 3쪼오메 595방 헌옷장수집 뒷방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이른바 빈민가였다. 그곳의 한국인들은 길가의 인분이나 쓰레기 같은 오물을 치우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다. 권정생의 가족은 무허가 판잣집 셋방에 살면서도 방세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 어린 권정생과 그의 동생을 제외한 다른 가족들 모두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는데도 끼니를 잇기조차 힘들었다.

해방 다음 해인 1946년에 가족들과 함께 귀국했지만3) 거주할 곳조차 마련할 수 없어서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다. 1년 후 그의 아버지가 안동군 일직면에서 소작 농사를 짓게 되면서 가족들이 다시 모일 수 있었지만 극빈한 처지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1953년 권정생이 16세라는 늦은 나이에 안동 일직초등학교를 전교 1등으로 졸업했는데도 중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다. 권정생이 12살이던 1949년부터 그의 어머니는 권정생을 중학교에 보내기 위해 행상 등을 하며 돈을 모았지만 다음해 일어난 6·25 한국전쟁의 여파로 화폐가치가 1/100로 폭락했기 때문이다. 본래 그의 어머니가 모은 돈은 소 세 마리를 살 수 있을 만큼 넉넉했지만, 화폐가치 폭락으로 염소 새끼 한 마리조차 살 수 없었다. 진학을 포기할 수 없었던 권정생은 고학을 하면서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1955년부터 1957년까지 부산의 재봉기상회 점원으로 일하는 등 외지 생활을 하였지만, 오히려 늑막염에 폐결핵까지 얻고 치료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는 평생 질고疾苦에 시달리게 되었다.

권정생은 그의 나이 29세이던 1966년 5월에 콩팥을 들어내는 수술을 하였고, 12월에는 방광을 들어내는 수술을 하였다. 그의 수술을 집도한 의사는 "잘 관리하면 2년은 살 수 있다"고 하였고, 간호사는 앞으로 "6개월도 살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다. 다음 해 동생을 결혼시키고 혼자 남게 된 그는 1968년 2월 안동 일직교회 종지기가 되어 교회의 문간방에 살기 시작했다. 그의 방은 서향으로 지어진 예배당 부속 건물의 흙담집이었기 때문에 외풍이 심해 겨울에는 귀에 동상이 걸렸다가 봄이 되면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런 환경에서도 그는 아이들을 만나고 글을 썼다.

경북 안동에 있는 일직교회 근처 권정생 생가(위)와 창호지 구멍으로 본 내부 모습(아래). 뉴스앤조이 이은혜

1969년 그의 나이 서른두 살이 되었을 때 권정생은 월간 <기독교교육>의 제1회 기독교 아동문학상 현상 모집에 '강아지 똥'을 응모하여 당선돼 작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74년 세종문화사에서 발간한 권정생의 동화집 <강아지 똥>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하였다.

"거지가 글을 썼습니다. 전쟁 마당이 되어 버린 세상에서 얻어먹기란 그렇게 쉽지 않았습니다. 어찌나 배고프고 목말라 지쳐 버린 끝에, 참다못해 터뜨린 울음소리가 글이 되었으니 글다운 글이 못됩니다."4)

극빈의 삶을 이어 온 권정생의 진솔한 고백이 느껴진다. 권정생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사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극도로 궁핍한 삶을 살았다. 그와 호형호제呼兄呼弟의 친분을 유지한 이현주5)는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더니, 그(권정생)의 눈에는 온통 불쌍하고 못난 인간들뿐이다"라며 한탄하였다. 덧붙여 이현주는 권정생에게 "형은 지가 젤 불쌍하면서 남들 불쌍하다는 말만 해!"라고 핀잔을 주기도 하였다.6)

여기서 나는 권정생이 하나님께 올린 기도를 생각해 보고 싶다. 그는 어떤 기도를 하나님께 올렸을까. 이현주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그는 오늘 새벽에도 따르릉거리는 자명종 소리에 일어나 예배당 마당에 높이 솟아 있는 종을 울렸을 것이다. 그러곤 차가운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뭐라고 하느님께 빌었을까? 아무튼 빌었을 것이다. 지금도 억울한 일을 당해 눈물 흘리는 이 땅의 가난한 백성이 이웃해 있으니만큼 그의 기도는 중단될 수 없을 것이다."7)

새벽마다 권정생은 긴 시간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기도를 하나님께 올렸고 자신을 위한 기도는 마지막에 올렸다. 점차 그가 기도해 주는 대상은 어려운 이웃들을 넘어 북한의 굶주린 어린이들, 세계 분쟁 지역 어린이들로 확대되었다. 여기서 나는 권정생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생각해 보고 싶다. 이를 위해 권정생의 초기 신앙생활로 잠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좋겠다.

권정생은 1958년 그의 나이 21세 때 신앙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권정생은 병으로 인한 고통을 참다못해 교회당에서 날마다 밤새워 하나님께 부르짖었다.8)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나는 집 나간 동생과 부모님께 도저히 그 이상 고생을 시켜 드릴 수 없어 차라리 죽어 버리길 바라고 기도했다. 밤마다 교회당에 가서 밤을 지새우며 하느님께 나의 고통을 눈물로 부르짖었다. 아마 구약성경에 나오는 욥의 모습만큼 참담했을 것이다. (중략) 추운 마룻바닥에 앉아 있으면 소변은 숨 돌릴 사이도 없이 마려워진다. 밤새도록 들락날락거리다 보면 새벽이 온다. 새벽종이 울리면 곧 일어서서 집으로 간다. 나중에는 아예 깡통을 기도하는 옆에 갖다 놓고 밤을 새웠다. (중략) 다만, '주여' '주여'를 되풀이하다 보면 어느 사이에 '어이 추워, 어이 추워'로 바뀌어 버린다. 어쩌다가 지쳐 그 자리에 쓰러져 잠이 들면 온통 바지가 젖어 있었다. 젖은 바지는 그대로 빳빳하게 얼어 버렸다."9)

그는 "차라리 죽어 버리길 바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그것은 "나의 몸을 치료하여 주소서"라는 간절한 기도였을 것이다. 그의 기도는 자신을 질고에서 건져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이었다. 덧붙여 권정생이 생활고와 건강의 악화로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학업을 향한 갈망 또한 하나님께 기도에 실어 올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권정생의 기도는 대략 다음과 같지 않았을까.

"하나님! 제가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저를 치료해 주세요. 하나님! 초등학교 졸업으로 더 이상 공부하지 못한 것이 너무 슬픕니다. 저의 중학교 진학을 위해서 어머니가 너무 고생하셨고 저 또한 일을 하다가 병을 얻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건강을 회복하고 공부를 더 하게 해 주세요.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는데 공부하지 못한 것이 너무 억울합니다. 저의 억울함을 풀어 주세요."

이렇듯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셨을까. 표면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간구에 응답하지 않으신 것 같다. 그의 건강은 회복되지 않고 점점 더 악화되었다. 헌신적인 어머니의 간호로 그의 건강이 호전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나이 27세 되던 1964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더 이상 손쓸 수 없을 만큼 건강이 악화되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19세에 늑막염과 폐결핵으로 시작된 그의 질병은 결국 전신 결핵으로 발전하였다. 견디다 못한 그는 29세 되던 1966년에 신장 한쪽과 방광을 들어내는 수술을 하였다. 평생 동안 그는 질고에 시달리며 살 수밖에 없었다. 3일 동안 글을 쓰면 열흘 이상 끙끙 앓으며 누워 있어야 했을 정도로 말이다.

권정생이 종지기로 일했던 일직교회 예배당. 뉴스앤조이 이은혜
일직교회 입구.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하나님께서 권정생의 기도를 철저히 외면하신 것 같다. 사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권정생이 "하나님의 부재不在"를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부재하심을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기도해 주는 대상은 이웃에서 북한으로, 그리고 세계로 확장되었다. 그의 주위에 사는 가난한 이웃들 그리고 굶주리는 북한 어린이들과 전 세계 분쟁 지역에서 살아가는 어린이들로 확장된 것이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권정생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셨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그의 나이 29세 때 신장 한쪽과 방광을 들어내는 수술을 받았을 때 그 수술을 집도한 의사와 간호사가 그의 기대 수명을 6개월에서 2년으로 생각하였지만, 그는 이후 40년을 더 살았다. 물론 70세에 소천한 그가 장수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는 의학적인 판단을 훨씬 넘는 삶을 영위하였다. 그는 소천하기까지 100여 편이 넘는 작품을 남겨 아동문학계는 물론, 한국 기독교 사상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둘째, 비록 초등학교 졸업이 그의 최종 학력이었지만 그는 현재 수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아 마땅한 석학일 뿐만 아니라 영향력이 지대한 사상가로 추앙받고 있다. 수많은 학자들이 그의 문학과 사상을 연구하고 있다는 점이 그러한 사실을 방증한다.

이처럼 심층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권정생의 기도를 외면하신 것이 아니라 더욱 풍성하게 응답해 주셨음을 알 수 있다. 일생 동안 질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그의 삶의 자리를 볼 때, 그는 능히 하나님의 부재를 말할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는 누구보다도 진실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권정생의 기도를 통해 우리의 기도, 아니 나의 기도를 생각해 본다. 자신이 속한 삶의 자리를 보며 낙망하지 않는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는 바울 사도의 말과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3)고 하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권면이 들리지 않을 때가 있지 않은가. '나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듣고 계실까', '기도 한다고 되기나 할까' 하는 생각에 탄식하지는 않았는가.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권정생의 기도를 들으셨음을 발견한다. 하나님께서 한 번도 그를 떠나지 않으셨음을 발견한다. 비록 그가 원한 대로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더 풍성하게 응답하셨음을 발견한다.

권정생의 기도에 더 풍성한 것으로 응답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기도에 더 풍성하게 응답하신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부재를 생각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 권정생의 삶은 바울 사도가 말한 것처럼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은 삶"이었다. 하나님은 언제나 권정생과 함께하셨다. 그의 삶을 인도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그리하시리라. 권정생에게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신실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권정생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는 것과 동일하게 주시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을 수 있다. 권정생의 삶과 기도는 그것을 말하고 있다.

일직교회 종탑(왼쪽)과 종탑 아래 자리한 나무판에 새겨진 권정생의 글귀(오른쪽).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홍인표 / 백석대학교 기독교전문대학원에서 역사신학(한국교회사)을 전공해 장동민 교수 지도로 박사 학위(Ph.D.)를 취득했다. 주요 연구 영역은 한국교회사지만, 아동문학에도 관심이 있다. 종종 동시, 동요 노랫말을 창작해 발표한다.

1) 이계삼, "권정생의 문학 세계: 진리에 가장 가까운 정신," 원종찬 엮음, 『권정생의 삶과 문학』(서울: 창비, 2013), 128.
2) 권정생의 초기 삶은 "권정생 연보," 『권정생의 삶과 문학』, 374-382를 참조하였다.
3) 가족들 가운데 조총련과 관련이 있던 권정생의 첫째, 셋째 형은 일본에서 귀국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평생 이산가족처럼 살아야 했다.
4) 권정생, 『강아지 똥』(서울: 세종문화사, 1974) 원종찬, "속죄양 권정생: 강아지 똥과 몽실 언니" 원종찬 엮음, 『권정생의 삶과 문학』(서울: 창비, 2013), 97에서 재인용.
5) 감리회 목회자였던 이현주는 당시 저명한 아동문학가이기도 하였다.
6) 이현주, "동화 작가 권정생과 강아지똥," 원종찬, "속죄양 권정생: 강아지 똥과 몽실 언니" 원종찬 엮음, 『권정생의 삶과 문학』(서울: 창비, 2013), 76-79.
7) 이현주, "동화 작가 권정생과 강아지똥," 73.
8) "권정생 연보," 380.
9) 권정생, "오물덩이처럼 뒹굴면서," 원종찬 엮음, 『권정생의 삶과 문학』(서울: 창비, 201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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