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루터교회를 담임하는 최주훈 목사가 글을 보내왔습니다. 최 목사가 중앙루터교회 당회원 워크숍에서 나눈 글입니다. - 편집자 주

한 해를 시작하고, 존경하는 당회원들과 함께 벌써 반 바퀴 이상 달려왔습니다. 올해 우리는 '거룩한 사귐의 공동체'(Communio Sanctorum)라는 기치 아래 결의를 다졌습니다. 공동의회에서 새롭게 선출된 장로님들과 더불어 한 단계 기어를 올리는 맘으로 역주했습니다. 지금 이 자리 역시 그런 열정과 소망을 키우는 연장선일 겁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를 하나님이 주신 소명으로 알고 매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의 주요 선생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잘 아실 것입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때로는 의견 차이로 톱니바퀴 어긋나듯 치열하고 아슬아슬한 순간도 있었지요. 하지만 그 모든 사건은 교회를 사랑하는 순수한 열정이 없었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었던 것이기에 그 또한 감사한 일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이 저에게 숙제를 내주신 대로, 제가 품고 있던 목회 철학을 여러분과 나누려 합니다. 어쩌면 교회 '발전'과 '성장'을 꿈꾸는 여러분의 생각과 어긋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내 놓습니다.

우리는 매 주일 공동 예배 때 키리에(KYRIE) 찬트를 이렇게 부릅니다. "온 세상의 평화, 주님 교회의 번영, 온 인류가 하나 되도록, 우리 함께 기도드리세.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찬트를 통해 우리 모두 엄숙히 고백하듯, 교회는 반드시 '발전'해야 하고, 교회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이 발전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의 번영, 발전, 성장이 무엇인지 묻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의 발전이 무엇인지, 그 온전한 의미를 함께 숙고해 보려고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교회의 번영을 위해 우리가 선행해야 할 첫 번째 과업은 성장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적용하며 사람을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교회 번영을 위해 세움을 받은 교회 중직자들은 교회 발전을 위해 방향을 설정하고 주도권을 행사하는 데 무력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오늘 강조하려고 합니다. 교회가 '권력'에 무력할수록, 중직자가 힘을 뺄수록 그 교회는 교회다워지고, 직분자는 직분자다워질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중직자로 세워진 분들이 '저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며 분개할지 모르겠습니다. '교회 발전을 논하는 자리에서 찬물을 끼얹는 것 아니냐'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교회가 무엇인지' 우리 스스로 물어보면 좋겠습니다. 왜 하필 '교회'인지 말입니다. 교회의 고유한 역할과 존재 이유에 대한 이 질문은 '교회가 발전해야 할 이유'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중직자인 여러분의 깊은 숙고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에게 교회는 무엇입니까. 더 직접적으로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다니는 근본적 이유, 교회에 원하는 근본적 필요는 무엇입니까? 교회의 발전과 성장을 통해 얻어 가려는 최종적인 것이 무엇인가요. 인격적 성숙? 수준 높은 신학? 청소년과 아동을 위한 건전한 교육? 깊은 묵상과 신비적 체험? 영웅적 선행? 속을 털어놓는 교제? 이런 것들은 교회가 아니라 다른 종교,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무신론자도 신학적 정확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불교도나 신비주의자, 심지어 이단이라는 낙인이 붙은 이들도 영웅적 헌신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것을 교회 성장과 발전 목표로 삼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저 부수적인 일일 뿐입니다. 교회 밖 전문 기관들이 교회보다 더 충분히 잘할 수 있는 일들을 교회가 최종 목표로 삼을 수 없습니다. 대신, 교회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파킨슨 법칙'(Parkinson’s law)이란 말이 있습니다. 영국의 정치사학자인 C.N. 파킨슨이 업무량 증가와 관료 조직 비대화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관료 수는 일의 분량과 관계없이 증가한다는 사실을 통계적으로 보여 주면서 제시한 법칙입니다. 즉, 일이 많아서 일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게 아니라, 일하는 사람이 많아 일이 늘어난다는 말입니다.

관료 조직뿐 아니라 교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1990년대까지만 교회는 사회의 모든 기능과 사람들을 흡수하는 동네 만물상이나 전파사 같은 곳이었습니다. 온갖 고장 난 것들은 다 고칠 수 있고, 수도꼭지나 전구 하나라도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찾아가는 그런 곳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들은 양적으로 성장했던 그 시절 그때를 추억거리 모델 삼아 온갖 기능을 섭렵하기 시작했습니다. 공룡 같던 시절, 당시에는 교회 성장의 척도를 등록 교인 숫자와 헌금으로 보았습니다.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앞뒤 가리지 않고 뭐든지 했습니다.

한때 교회에서 운영하는 어린이집과 유치원이 유행했고, 사회복지 기관 기능을 담당하고, 동네 사랑방 노릇을 하기 위해 카페를 운영해 보는 붐이 여기저기서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교회 역할을 온전히 유지한 곳이 얼마나 될지는 의문입니다. 목사가 성경과 씨름하며 말씀을 준비하는 대신, 노란 봉고차 운전사가 되거나 계산대 앞에서 입출금을 계산하며 돈 세는 일이 주 업무가 되어 버리기 일쑤였습니다. 모두 '교회 성장'과 '선교'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던 일입니다. 주객이 전도되어 버린 것이지요.

일하는 사람이 많다고 교회가 성장하는 것도 아니고, 프로그램이 많아 바쁘게 돌아간다고 교회가 발전하는 것도 아닙니다. 시대가 변하니 우리도 변해야 한다면서 매번 호들갑 떨 일도 아닙니다. 시대가 변하고, 위급하면 위급할수록 교회의 고유한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거기 집중해야 합니다. 그것을 붙잡지 못하고, 유행과 주류에 따라 방향을 정한다면, 사람들이 고안해 낸 모든 것이 교회의 역할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교회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역할이 있습니다. 2000년 역사를 통해 변하지 않고 꾸준히 우리를 지탱해 준 역할, 끔찍한 자연재해와 전쟁 속에서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교회의 고유한 역할, 그것이 바로 우리가 키리에를 통해 엄숙하게 찬미했던 '교회 번영'에 대한 해답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건져 올리는 일이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 가장 근본적이고 거룩한 직무요,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일은 '예언자적 감수성'을 필요로 합니다. 이를 교회 전통에서는 '교회적 감수성', '교회적 감각'이라는 뜻의 라틴어 '센수스 에클레시아'(Sensus ecclesiae)라고 부르곤 합니다. 간단합니다. 교회가 관심을 두고 해야 할 일이란, 우리의 시간과 삶 속에 들어와 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일인데, 말씀에 침잠하며, 공동체가 성찬을 함께 나누고, 그 안에서 선한 미래를 위해 기도하는 일로 바꿔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교회를 찾아올까요?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교회 시설이나 주차장, 교육 공간 같은 것 때문에 찾아올까요?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단언하건대, 교회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도대체 하나님은 나와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까'에 대한 답을 듣고 싶어 합니다. 너무 뻔한 것 같지만,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의 답도 뻔합니다. 말씀과 성찬, 기도가 결국 답입니다.

이 일에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도래할 하나님나라를 우리 안에 실현하는 일이며,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의 나라를 키워 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교회가 해야 할 가장 고유한 기능은 기도와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비를 묵상할 수 있도록 인도하고, 성찬의 나눔을 통해 거룩한 사귐을 이 땅에서 이뤄 나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역할을 통해 교회에 속한 신자들은 자신의 일상이 녹아 있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면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 말을 달리 하면, 교회의 고유한 역할이란 변화하는 세상을 기독교적으로 축복하는 임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리고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현재 교회가 가진 '선행을 베풀 권력'과 주도권을 조금씩 포기해야 합니다. 교회와 중직자들은 힘과 주도권을 쥐는 욕망의 주체가 되기보다 주도권을 넘겨주는 사람들의 거룩한 허브(HUB)가 되어야 합니다. 억지로 프로그램이나 조직을 만들어 달달 볶기보다 자발적인 모임이 생길 수 있도록 축복해 주고, 기다려 주며 힘을 실어 주어야 합니다. 교회 중직자들이 만든 틀과 모임에 교인들이 참여하길 독촉하는 대신, 교인들이 만들어 내는 비정형적인 모임에 찾아가고 녹아 들어가는 모양새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신 케노시스(빌 2:7)의 삶이며 성육의 실천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논쟁을 벌이고, 거기서 자유와 쉼, 위로와 연대감을 얻어 가는 곳이어야 합니다. 중직자들은 이런 자유롭고 자발적인 모임과 행동들이 더욱 창조적으로 생겨나며, 모임이 반복·지속되도록 힘을 실어 주어야 합니다. 교회의 리더 그룹은 규율과 규제로 틀을 만들고 감시하며 통제하는 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히려 선한 당회는 그런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모임이 더 많아지고, 반복되며, 그 모임이 승화해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의 번영을 이루도록 기도하고 축복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계산기를 두드리기보다 더 중요한 임무가 이런 것입니다.

이런 창조적이고, 비정형적인 모임들은 항상 우리 기대대로 순탄하게 진행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고, 위협과 도전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이 생길 때 개인과 집단에는 다양한 반응들, 애매하고 복잡한 반응들이 연출될 것입니다. 매일매일 변화와 발전, 성장에 반응하다 보니 요즘 시대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특별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고유한 역할을 붙잡고 있는 한, 거기서 생겨나는 복잡하고 다양한 경험들을 통해 우리는 분명히 예기치 못했던 통찰들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 비로소 새로운 시야가 열리고, 마침내 우리가 또 다른 도전적인 선택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기쁨도 얻게 될 것입니다. 즉, 부활과 구원을 위해 신앙의 도전이 얼마나 유익한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의 발전과 번영 아닐까요?

그때 비로소 우리는 효율이니 안락함이니, 재정의 풍요니 등록 교인 수니 하는 것들이 교회 발전과 변화의 질을 가늠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변화와 성장의 객관적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마음뿐입니다. 인간의 마음을 고려하지 않고 변화와 성장을 측량하는 모든 시도는 순진하거나 아니면 사악한 것입니다. 교회 성장은 자로 잴 수 있는 게 아니라 삶의 경험으로만 측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변화의 방향을 제시하지도 않으며 변화에 대한 대응법을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대신 믿음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는 보편적 가치를 심어 가는 곳입니다.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초월의 의미가 깃들어 있다는 사실은 교회의 고유한 역할인 말씀과 성찬을 통해 건져 올릴 수 있는 진리입니다. 복잡하고 다양하며 난해한 세상, 유리 파편처럼 깨져 버린 개인주의 세상 속에서도 연대 의식의 가치를 말할 수 있고 공동체를 경험할 수 있는 통로가 있다는 점을 성찬은 가르칩니다. 우리는 이 성찬을 통해 산산이 깨져 버린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가 거하시며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 인도하심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과 성찬은 세상을 위한 우리의 책임이 있다는 사실도 가르칩니다. 권력과 탐욕에 자신을 빼앗기기보다 나눔과 섬김, 정결함으로 자신을 채우라고, 남을 심판하기보다 신뢰하라는 요청이 성찬에 담겨 있음을 교회는 기억하고 상기시켜야 합니다. 이런 것이야말로, 교회 밖에서는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시대가 변하니 교회도 함께 변화되어야 한다는 말에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가 변화의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는 말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다가올 새 시대 속에서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거나, 어떤 중요한 임무를 맡아야 한다는 것은 교회의 본질과 상관없는 일입니다. 교회는 그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미래는 이미 우리 안에 이미 깃들어 있는 것이지, 갑작스레 도래하거나 맘대로 잡아당길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래는 이미 우리의 현재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교회가 거룩한 사귐의 공동체(Communio Sanctorum)이라는 말은 누군가의 현재가 누군가의 과거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미래가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서로의 시간이 융합되는 집단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의 과거를 위로하고, 현재를 다독이며, 미래를 축복할 때 비로소 '거룩한 사귐의 공동체'인 교회가 됩니다. 교회의 진정한 변화란,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의 축복 속에서 서로의 과거·현재·미래를 공유할 때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교회가 교회 된다는 것은 곧 각 개인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신자 개인에게 '참사람 됨'이고, 교회가 추구하는 최종 목표에 속합니다. 이처럼 참사람으로 가는 길은 한 사람의 지혜로운 계획이나 독단적인 카리스마로 일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각자 부여받은 역할이 무엇인지 깊게 고민하고, 최소한의 것, 그러나 가장 래디컬(radical)한 직무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런 고유한 역할이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 후에라야 참된 교회의 발전을 말할 수 있는 단계에 이릅니다.

그렇게 존재의 이유와 역할이 분명하게 보인다면, 개인이건 조직이건 집단이건 각자 부여받은 교회와 일상의 자리에서 시대의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본보기가 교회에서 다양하게 출현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창조적인 변화를 기쁨으로 환대하는 잔치를 열게 될 것입니다.

이런 과정은 앞서 말한 대로 '예언자적 감수성'을 가져야 이룰 수 있습니다. 유심히 관찰하지 않으면, 이 길은 시대를 거스르는 바보의 길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가 이 길을 가고자 한다면, 하나님을 향한 예언자의 믿음과 용기, 그리고 모든 것을 내어주어도 흔들리지 않는 뚝심 이 필요합니다. 교회의 중직자로 세움 받는다는 것은 바로 이 길을 먼저 걸어가 볼 수 있는 거룩한 특권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길을 걷고 있는 동지들 눈을 바라보며 서로를 기쁘게 축복하며 기도해 줘야 합니다.

교회의 과제는 현재 안에서 미래를 실현하고, 장차 다가올 삶의 본보기로 사는 것을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실현하는 일입니다. 갈등을 화해로 바꾸고, 문제를 기회로 삼으며, 제도와 틀을 넘어 근본을 바라보며, 불가능에 맞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어디에나 성령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교회 공동체가 보여 주어야 합니다. 교회의 중직자로 부름을 받은 우리가 먼저 그 모습을 보일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교회의 일을 수행하는 이유가 효율과 유용성 때문이 아니라, 오직 사랑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빛나고, 성찬의 감동을 나누기 위한 것임을 기억합시다.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분명히 사회 개혁가들의 길과 다릅니다. 사회운동가들은 목표가 세워지면 그 목표를 위해 전술과 전략을 능수능란하게 바꿀 수 있습니다. 필요에 따라 폭력을 사용하기도 하고, 전략에 따라 오늘의 가족을 내일의 적으로 바꿔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가르치는 것은 다릅니다. 사상적 진보나 보수, 정치적 진보나 보수, 성향적 진보나 보수 같은 가름의 구분선과 상관없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했지, 구획과 구분선을 창조하지 않으셨다는 점을 교회는 기억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 때문에 어느 한쪽 편을 메어꽂기보다 서로의 다름을 아우르며, 어떤 생각이든 이곳을 지나갈 수 있도록 시원스레 대문을 터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유용하고 효율적인 것들과 달리 바보들만 선택하는 그런 길을 걷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바보 같아 보이던 십자가 복음이 해골 그득한 산등성이에 세워진 이래로, 그 십자가를 붙잡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포기해도 괜찮다는 사실을 역사가 증언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증언자 대열에 우리도 서길 바랍니다.

비본질적인 것은 비본질적인 것에 맡깁시다. 그리고 교회의 고유한 역할이 증대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읍시다. 이 일을 위해 교회의 지체로 부름 받은 우리가 서로의 다양성을 기쁨으로 수용하며, 서로를 믿어 주고, 기다려 주고, 존중하며, 각자의 직무에 충실한 믿음의 일꾼들이 되길 바랍니다. 저는 교회의 지체가 된 여러분들이 이런 믿음을 함께 나누며 십자가 복음의 증언자가 되길 소망합니다.

최주훈 / 루터대학교 신학과와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레겐스부르크대학교에서 조직신학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중앙루터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저서로는 <루터의 재발견>(복있는사람), <신론>·<교회론>(대한기독교서회, 공저)이 있고, <마르틴 루터 소교리문답·해설>·<마르틴 루터 대교리문답>(복있는사람), <기독교와 현대사회>(크리스천헤럴드)를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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