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박요셉 기자] 조용기 원로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한국교회사에 주요한 인물이다. 서울 대조동 빈민가에서 개척한 작은 교회를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초대형 교회로 성장시켰다. 그는 사람들에게 '삼박자 축복론'을 내세운 번영신학을 전했다. 영적 구원은 물질, 건강의 복과 함께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말년은 좋지 않았다. 각종 비리로 구설에 올랐고, 법원에서 교회 돈을 횡령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김진홍 목사(동두천두레교회)는 서울 빈민촌에서 활빈교회를 개척해 사회적 약자를 도왔다. 활빈活貧(빈자를 구한다)이라는 말처럼, 빈민들이 가난과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직업훈련, 건강관리 등 여러 사역을 벌였다. 권력의 불의한 정책에 투쟁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그의 말년도 좋지 않다. 부패한 정권을 지지하고 왜곡된 역사 인식을 퍼뜨렸다. 사람들은 이제 그를 빈민 사역자가 아닌, 뉴라이트 운동 주창자로 기억한다.

서명삼 교수(이화여대 기독교학과)는 9월 10일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월례 포럼에서, 조용기 목사와 김진홍 목사를 비교 분석했다. 그는 두 사람에게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한국전쟁 이후 재건과 개발이 한창일 때 도시 빈곤에 대한 신앙적 해결책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조용기는 번영신학, 김진홍은 개발신학이다. 서 교수는 두 사람의 성공은 시대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한 결과라며, 한국교회가 오늘날 과거 명예만 회상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포럼에는 신학자와 교인 10여 명이 참석했다.

서명삼 교수는 조용기 목사와 김진홍 목사가 시대 상황에 필요한 독자적인 대답을 내놓았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1960년대, 도시 빈민의 욕망·불안 급증
조용기 목사, '삼박자 축복론' 설파
대형 예배당 완공 후 빠르게 성장

1960년대 국내외 주요 화두는 '개발'이었다. 국제사회에서 체제 경쟁을 벌이던 자본주의·공산주의 두 진영은 어느 사회가 풍요와 번영을 보장해 주는지 보여 주고자 개발에 몰두했다. 이런 맥락에서 UN은 1961년, 1960년대를 '개발을 위한 10년'으로 지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국내에도 비슷한 흐름이 있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개발에 전념했다. 그가 당시 내건 공약은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 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였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이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내세우며 사회 전반에 구조 조정을 단행했다.

이러한 개발 정책은 산업화와 도시화를 가속화했다. 농촌을 떠나 서울과 인근 도시로 이주하는 사람이 증가했다. 도시 주변에는 빈민가와 판자촌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익숙한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은 도시에서 혼란을 겪었다. 이와 함께 신분 상승 욕구도 커졌다. 서명삼 교수는 "급증하는 도시인구의 욕망과 불안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종교인들에게 서울은 '추수할 것이 많은 선교지'였다"고 말했다.

서 교수는 도시 빈민이 처한 상황에 대한 개신교 반응은 두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했다. 보수 복음주의자들은 가난한 도시 민중들에게 성공과 번영을 약속하며 성장을 도모했다(번영신학). 반면, 에큐메니컬 진영은 빈곤을 줄이기 위해 공동체 기반의 방안을 내놓고 억압적인 국가 권력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냈다(개발신학). 양 진영을 각각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조용기 목사와 김진홍 목사다.

조용기 목사는 천막 교회를 세계적인 초대형 교회로 성장하게 했지만, 말년에 각종 비리로 구설수에 올랐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조용기 목사는 1958년 서울 은평구 대조동 빈민가에서 천막 교회를 개척했다. 조 목사는 궁핍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회개와 천국은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람들이 삶의 현장에서 겪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신을 믿고 싶어한다는 점을 알았다. 그가 내세운 건 '삼박자 축복론'이다. 죄에서 구원을 받으면 질병과 가난에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떠올리고 소리 내어 기도하면 성령이 반드시 들어준다는 '4단계 기도법'도 창안했다.

서 교수는 "조용기의 메시지는 동시대 사람들이 갖고 있던 욕망과 조응했다. 그의 '세속적 신비주의'는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과 비교하면 예외적이지 않았다. 전후 한국에서는 치유 은사와 물질 축복에 대한 요구가 널리 퍼져, 대다수 목사가 교파를 막론하고 비슷한 번영신학을 채택했다"고 말했다.

그는 조 목사가 투기 성향이 강했다고 했다. 조 목사는 1968년 예배당 건축 사업을 계획했다. 당시 아무도 살지 않는 여의도 매립지에 대형 예배당을 세우겠다고 결정했다. 이 사업은 교인이었던 당시 서울부시장 차일석의 제안에서 시작됐다. 그는 '서울의 맨해튼'을 만들겠다는 서울시 개발 사업을 미리 알고 조용기 목사에게 정보를 건넸다.

조용기 목사는 국회의사당 부지 바로 옆에 5000평 땅을 매입했다. 서 교수는 "당시 조 목사가 무모하다고 할 정도로 대규모 건축 사업에 착수했다"고 말했다. 건축 예산이 당시 재정보다 수백 배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건축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인근에 아파트를 지어 분양 사업을 하기도 했다. 서 교수는 조 목사의 1998년 설교를 인용하며, 그가 건축 당시 재정 압박을 견딜 수 없어 극단적 선택을 고려했다고 말했다. 조 목사 장모 최자실 목사는 1972년, 부도가 나면 돌아오지 않을 결심으로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떠났다고 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1973년 완공됐다. 이후 교회는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서 교수는 1973년 빌리 그레이엄 전도 대회, 1974년 한국대학생선교회 '엑스플로(EXPLO) 74', 1977년 민족 복음화 성회 등을 거치며 여의도가 야외 부흥회 중심지로 자리 잡았고, 조 목사는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 지도자 반열에 올랐다고 말했다.

김진홍, 빈민들과 활빈교회·두레공동체 조직
"지역사회 개발로 가난에서 구제하고자"
'작은 예수', '현대판 모세'로 불려

김진홍 목사는 신학생 시절, 연세대 도시문제연구소에서 교육받으며 도시 선교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그는 미국 사회학자 알린스키의 지역사회 조직화 이론에 흥미를 보였다. 1971년에는 도시문제연구소 활동 프로그램 일환으로, 서울 동부에 있는 빈민촌에서 활빈교회를 개척하고 도시 선교를 시작했다.

활빈교회는 지역 주민에게 유아 돌봄, 직업훈련, 건강관리 등 다양한 사회복지 서비스를 제공했다. 단체 행동을 위한 기지 역할도 수행했다. 행정 당국이 무허가 판자촌을 철거하려는 등 마찰이 발생할 때마다 지역사회를 조직해 투쟁에 나섰다.

서명삼 교수는 김진홍 목사 목회는 합리적·실용적 성격이 강했다고 했다. 그는 "조용기 목사가 가난한 신자들에게 신의 은총을 얻는 마법 같은 방법을 가르쳤다면, 김 목사는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한 개발 방식으로 가난한 이의 삶을 북돋고자 했다"고 말했다.

활빈교회 사역은 1976년 끝난다. 김 목사는 철거민들을 데리고 경기도 남양만으로 집단 이주를 한다. 두레공동체의 탄생이다. 서 교수는 "김 목사가 활빈교회 사역 이후 가난한 사람들 삶이 실질적으로 바뀌지 않자 좌절감을 느꼈다. 김 목사는 이때부터 활동 중심의 지역사회 조직화 전략 대신, 봉사 중심의 지역사회 개발 프로젝트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개인 갱생을 유일한 대안으로 여기며 남양만에 성인들의 공동체를 만들려 했다"고 설명했다.

남양만에서 신앙에 기초한 지역사회 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김 목사는 두레공동체가 사도행전에 나온 초대교회처럼 교인들이 각자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신앙 공동체가 되길 꿈꿨다. 두레공동체가 알려지면서 김 목사는 유명 인사가 됐다. 도시 재개발 피해자들과 함께 귀농 프로젝트를 조직했다며 '작은 예수', '한국판 출애굽의 모세'라고 불렸다.

김진홍 목사는 도시 빈민 사역자로 활동했지만, 돌연 뉴라이트 운동가로 전향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조용기·김진홍, 말년에 구설수
"시대 요구에 적절한 응답으로 성공
한국교회, 과거 영광 아닌 현실 주목해야"

서명삼 교수는 두 사람의 목회에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고 했다. 그는 두 목사가 지방에서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의 물질적 불안과 계층 상승 욕구를 예민하게 의식하고 현세적 담론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서 교수는 "조 목사의 번영 신학이 마법 같은 세계관에 기반을 두고 있고 개인 중심적이고 확신에 찬 투기자 모델을 제시한다면, 김 목사의 개발신학은 합리적 원칙에 바탕을 두고 있고 공동체 중심적이고 금용적 자수성가자 모델을 보여 준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말로는 비슷하다. 조용기 목사는 횡령, 친인척 부정 채용 등 온갖 비위로 구설에 올랐다. 그는 비판을 제기한 교인들을 출교하며 내부 반발을 진압했다. 그러나 10년간 법적 분쟁 끝에 2014년 법원에서 교회 돈을 횡령한 죄가 인정됐다.

김진홍 목사의 두레공동체도 실패로 끝났다. 한국교회에서 주목을 받았지만 재정적으로 자립하지 못하고 갱생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김 목사는 수도권으로 돌아와 전통 목회를 시작했다. 이후에는 보수적 성향을 내세우며 뉴라이트 운동가로 변신했다.

서 교수는 "조용기 목사를 비롯해 번영신학 승자勝者들은 국가 주도 개발의 광풍에 편승해 교회의 양적 성장이라는 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대다수 도덕적 결함과 교회 부패에 연루되어 개신교의 대중적 평판을 떨어뜨리는 데 일조했다"고 말했다. 또한 "김진홍 목사를 위시한 개발신학 실천가들은 그들의 이상향을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몇몇은 김 목사처럼 초기 비전을 향한 확신을 상실하고 보수 성향으로 돌아섰고, 일부는 조직 문제와 재정난으로 대중으로부터 잊혀졌다"고 말했다.

그는 조 목사와 김 목사 모두 자기 분야에서 신화적 업적을 이뤘지만 말년을 불명예스럽게 보내고 있는 점을 살펴보면, 과연 이들의 목회가 옳았는지 따질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대중 욕망과 국가 주도 개발이라는 시대 상황을 등에 업고 빠른 양적 성장을 이뤘다. 이들의 성공 사례는 오늘날 반복될 수 없는 과거 성공담일 뿐이다. 번영신학은 실패했고, 개발신학은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고 했다.

서 교수는 "두 목사에게 그나마 배울 점은 당시 대중이 겪고 있는 '빈곤' 문제에 나름 신학적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한 모습"이라며 "한국교회는 과연 이들처럼 시대 상황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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