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배를 주관하는 처지에서 회중이 영혼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안식을 갈망한다는 사실을 안다. 아직 그런 준비가 덜 된 교인도 내면에는 안식에 대한 갈망이 숨어 있다. 그런 거룩한 갈망 자체가 사실은 은총이다. 은총 없이 갈망 없다. 그런 마음을 읽을 수 있기에 그들이 영적 안식을 경험하도록 예배에서 최선을 다한다.

우선 예배 참석만 해도 그렇다. 일 년 열두 달 52주일의 예배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이들이 있다. 보통의 열정으로는 이게 불가능하다. 습관적으로 나오는 이들도 있겠으나, 그런 습관마저 중심에는 영혼의 갈망이 담겨 있다. 이들의 영적 갈망을 생각할 때마다 목사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빠지는 신자들도 대단한 사람들이다. 영혼의 갈망이 강렬하지 않으면 이런 정도로 예배에 참석하기 어렵다. 그들과의 영적 연대감이 느껴진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예배에 참석하는 이들도 있다. 정말 바쁘게 돌아가는 한국 사회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다. 귀한 시간을 낸 분들이니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이 더 필요하게 않겠는가. 한 달에 한 번 정도 나오거나 그것보다 더 뜸한 이들도 없지 않다. 예배를 완전히 망각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인정받아야 한다. 이렇게나마 예배와의 끈을 이어 간다는 것은 영혼의 안식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예배 참석의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은 사람들이니 그들에게 목사의 역할은 더 크다.

나는 예배에 참석한 모든 회중을 똑같은 크기로 소중하게 생각한다. 예배에 자주 참석하는 분들은 자주 참석하기에 소중하고, 이따금 참석하는 분들은 자주 만나지 못하기에 또 소중하다. 나는 좌고우면하지 않고 그들이 예배에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안식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내가 먼저 예배에 온전하게 집중하는 것이 그들에게도 도움이 된다. 이것이 구원 지향적 목사에게 나타나야 할 가장 중요한 열매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배를 통해서 회중을 궁극적이고 종말론적인 안식으로 안내하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생명 현상의 가장 깊은 차원에 속하는 영혼이 안식은커녕 오히려 소란스러워지고 거칠어지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열광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에 은혜가 넘친다고 쉽게 말하지만 실제로는 영혼이 위축되는 것이다.

일단 설교에 한정해서 말하겠다. 설교 시간에 정치적으로 상식적이지 않은 발언을 쏟아 내고, 객쩍은 우스갯소리를 남발하거나 과학적으로 기본이 안 되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내뱉는 목사들도 있다. 잔소리꾼처럼 설교하거나 침이 마르도록 자식 자랑에 열을 올리는 목사도 있다. 어느 정도 생각할 줄 아는 교인들은 목사가 기독교의 진리를 제대로 선포하고 있는지,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아니면 포장만 그럴듯하지 실제로는 종교 장사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아도 꿰뚫어 본다. 알면서도 모른 척해 줄 뿐이다.

이런 사태를 눈치채지 못하는 목사는 자신에게 도취해서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를 배설하듯이 쏟아 낸다. 그런 방식으로 교회의 영적 수준은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중이다. 그런 설교에 은혜를 받는 신자들이 한국교회에 적지 않다는 사실은 아래와 같이 둘 중의 하나다. 신자들의 영 분별력이 형편없거나,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우리에게 차고 넘치거나!

회중의 영혼을 가장 크게 병들게 하는 설교는 혐오감을 부추기는 설교다.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해야 할 설교 시간에 일정한 대상을 향해서 마녀사냥하듯이 발언하는 목사들이 적지 않다. 노골적으로 혐오 발언을 하지 않지만, 그 바탕에 혐오감이 숨어 있는 설교도 제법 많다. 그런 설교에 반복 노출되는 회중의 영혼이 얼마나 혼탁해질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기독교를, 특히 개신교회를 강하게 불신하는 사회현상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혐오를 부추기는 설교가 한국교회 강단에서 심심치 않게 선포되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설교자의 신학적 몰이해, 회중의 왜곡된 세계관과 스타 목사를 향한 의존성, 사회 전반의 미숙성과 야만성 등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서 이런 현상을 부른다. 이런 현상이 한국교회에서만 나타나지 않지만 한국에서 두드러진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지금까지 이런 방식으로 교회가 일정한 저력을 보였지만 앞으로는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하는 결과를 부를 것이다.

내 생각에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목사(또는 일반 신자)는 이런 혐오 발언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도 않는다. 이런 혐오 발언의 대상은 셋이다. 첫째는 타 종교, 둘째는 동성애, 셋째는 좌파다.

타 종교 혐오

1985년도라고 생각한다. 당시 나는 독일에서 잠시 신학을 공부하는 중이었다. 한국에서 선배 목사가 유럽 선교 여행 중 독일에 들러 후배 목사들을 위로하는 모임이 있었다. 형식은 예배였다. 그는 당시 내가 속한 성결교회(기성)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가장 역사가 깊은 교회의 담임목사이고 잘나가는 부흥사였다. 다른 직함도 여럿이었을 것이다.

그의 발언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딱 한 가지다. 승려 흉내를 우스꽝스럽게 재연하면서 기독교가 왜 불교보다 우월한지를 강조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불교를 희화화하고 비하하는 내용이었다. 이런 일들은 한국교회에서 흔하게 나타난다. 심지어 사찰에 불을 낸다거나 부처상을 훼손하는 일들도 벌어지곤 했다. 탁발하러 온 승려에게 "우리는 교회에 다닙니다"라는 말로 거절한다.

얼마 전부터는 이슬람교에 대한 혐오 발언이 주를 이룬다. 혐오를 넘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슬람교가 한국을 이슬람 국가로 바꾸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음모를 꾸민다는 식이다. 제주도 예멘 난민도 그런 시각으로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와 관련한 가짜 뉴스가 신자들 사이에 유통된다. 영혼이 척박해질 수밖에 없다.

로마가톨릭교회보다 개신교회가 타 종교를 이렇게 훨씬 더 적극적으로 배척하는 이유에 대한 교회사적 분석과 사회과학적 분석은 이미 나올 만큼 나왔으니 내가 여기서 보탤 필요는 없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경험을 통해서 구원의 빛에 가까이 간 사람에게 타 종교가 어떻게 느껴지는지에 대한 내 관점을 설명하면 된다. 한마디로, 나는 타 종교에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어도 알만큼은 안다. 내가 타 종교에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지금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만으로도 내 시간이 너무 짧아서 타 종교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비유적으로, 나는 지금 어머니 밥상에서 음식 먹는 행위의 절정을 향해서 나아가는 중이다. 밥, 된장찌개, 김치, 각종 나물, 쌈, 불고기 등등, 먹으면 먹을수록 맛의 깊이가 더해진다. 옆집에서는 주로 빵과 스테이크 등의 양식을 먹는다. 나는 옆집 음식과 우리 집 음식을 비교할 생각이 없다. 이미 우리 집에서 충분한 맛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더러 그쪽 집 음식에 관한 소문을 듣거나 초청받아 맛본 경험이 있으나 내 입맛을 빼앗을 정도는 아니었다.

성경과 기독교 전통이 말하는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타 종교를 부러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시하지도 않고, 더더욱 혐오하지 않는다. 혐오한다는 것은 아직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자신의 영혼이 자유와 안식을 누리지 못하니 대신 타 종교를 비난해 상대적 만족감을 얻으려는 것뿐 아니겠는가.

한국교회에서 벌어지는 타 종교 혐오의 가장 큰 동기는 내가 보기에 목회 전략적 차원에 자리한다. 본인들이 의도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그렇다. 한국교회의 전반적 목회 성격은 전략적일 경우가 흔하다. 해외 선교사 파송을 경쟁적으로 펼친다거나, 무리수를 쓰면서도 대형 교회당을 건축해 회중의 관심을 한쪽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이런 전략의 극단이 타 종교 악마화다. 일정한 대상의 악마화는 기독교 역사에서 마녀사냥으로 나타난 적이 있다. 목회의 구심력을 강화하는 데 이보다 더 효과적인 게 없다.

이슬람에 의해서 한국 기독교가 큰 위기를 맞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교인들 마음을 사로잡으면 교회 내부의 다른 문제 제기는 잦아든다. 이슬람권 전도나 최소한 그들의 공격을 막아 내기 위해서 헌금을 더 많이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는다. 목회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전략의 차원으로 떨어진다는 것은 목사의 영혼이 병들어 간다는 조짐이 아니겠는가. 본인들은 복음 전파의 열정이라고 강변하겠지만.

동성애 혐오

동성애 문제는 앞에서 조금씩이나마 몇 번 언급되었다. 한국교회에서 이 문제만큼 풀기 어려운 주제도 없다. 신학적으로 열려 있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장로회신학대학교도 이 문제에서는 완고하다.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을 맞아 성소수자의 저항을 상징하는 무지개색 옷을 입고 채플에 참석하고, 채플 후에 무지개기를 들고 사진을 찍은 신대원 학생들에게 대학교 측은 정학 등의 징계 처분을 내렸다. 동성애를 지지한 게 아니라 혐오를 거부한 것인데도 그런 처분을 내렸다.

장로회신학대학교보다 더 보수적인 신학대학교 입장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다. 신학대학교가 아니라 일반대학교 중에서 기독교 정체성이 비교적 강한 숭실대학교와 한동대학교는 동성애 문제에서 매우 폐쇄적인 태도를 보인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성소수자 차별 금지 권고를 수용하지 않았다. 교수들이 실제로 동성애를 부정하거나 혐오하는 것인지, 아니면 교수들 인사권을 행사하는 이사들 눈치를 보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교회 안에서 동성애 문제는 아예 말을 꺼내지 못하는 상황이다. 동성애 단체 집회에서 설교했다는 이유로 타 교단에 속한 목사를 종교재판에 부치는 웃지 못할 일들도 벌어진다. 지동설과 진화론이 제기되었을 때 유럽 기독교가 크게 당황한 것처럼 오늘날 한국교회는 동성애 문제로 크게 당황하고 있다. 그동안 전개된 과정에 대해서는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다. 성경과 기독교의 가르침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목사에게는 동성애 혐오가 불가능하다는 나의 입장만 간략히 전하겠다.

동성애에 대한 혐오나 편견은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 나온다. 첫째, 성경이 동성애를 죄로 규정한다. 둘째, 동성애는 출산을 불가능하게 한다. 셋째, 동성애는 성적 변태로 나타난다. 넷째, 동성애는 일종의 질환이니까 치료를 받으면 고칠 수 있다. 다섯째, 동성애로 인해서 에이즈가 퍼진다. 이런 항목도 각각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한국 기독교계에서 존경받는 한 목사는 에이즈를 동성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설교 시간에 역설했다. 의학적 근거가 빈약한 주장을 이렇게 대놓고 펼치는 것은 일단 동성애를 혐오하기 때문이다. 마녀를 제거하려면 없는 이야기도 만들어 내야 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다섯 항목을 일일이 나눠서 말하지 않고 총괄적으로 내 생각을 전하겠다.

내가 목회하는 교회에 동성애자가 있다면 나는 그를 엄격한 채식주의자처럼 대할 것이다. 채식주의자와 함께 생활하려면 불편한 일은 많다. 식당을 가더라도 그를 배려해야 하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를 무시하지 않고, 구별하지 않고, 혐오는 더더욱 하지 않는다. 나는 근본적으로 채식주의와 동성애가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의 태도라고, 또는 성 지향성이라고 생각한다.

먹는 행위와 성행위는 다른 짐승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는 본능적인 요소다. 이것이 없으면 삶이 불가능하다. 성행위가 없다고 해서 당장 죽지는 않지만, 인간의 삶 전체를 놓고 볼 때 식욕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다. 이성애자들이나 동성애자들이나 이런 생명 본능에 충실하다는 사실에는 차이가 없다. 다만 성적 지향이 다른 것뿐이다. 동성애자들이 이성애자들을 배척하면 곤란한 것처럼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삼겹살 맛도 모르면서 어떻게 인생을 말할 수 있느냐 하는 식으로 채식주의자를 비난할 수 없듯이 이성애자들이 자신의 성적 지향성에 근거해서 동성애자를 비난할 수는 없다. 동성애자들에게서 성적 변태 행위가 많다는 비난도 마찬가지다. 그런 행위는 동성애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변태는 이성애자들에게도 똑같이 일어난다. 이슬람 난민들로 인해서 성폭력이 많이 일어난다는 억측과 마찬가지로 동성애자들에게서 변태적 행태가 많다는 것도 억측이다. 실제로 그런 행태가 좀 많다고 해도 그게 무슨 대수이겠는가.

다른 건 접어 두고 성경이 동성애를 죄로 규정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고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동성애를 명시적으로 비판한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롬 1:26-27). 바울의 동성애 비판을 지금의 상황에 직접 대입해서 판단할 수는 없다. 그가 살던 시대의 세계관이 오늘의 세계관과 다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바울은 여자들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고전 14:35). 그뿐만이 아니다. 바울은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며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고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라고 규정하면서 여자들은 교회에서 머리를 천으로 가려야 한다고 주장했다(고전 11장). 이런 주장은 2000년 전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만 정당하다.

'플라토닉러브'라는 단어에서 보듯이 자식을 낳기 위한 부부 사이의 성관계보다는 동성끼리의 성관계가 더 이상적인 사랑이라고 헬라인들은 생각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로마 시대에 동성애가 왜곡되기 시작했다. 세네카는 정욕에서 나온 동성애 관습이 사치와 도덕적 방탕에 연관된다고 보았으며, 플루타르크도 역시 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라고 보았다. 바울은 당시의 동성애 현상을 죄로 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더 중요한 것은 바울이 동성애만 비판하는 게 아니라 이방인들의 우상숭배와 유대인들의 율법주의까지 비판한다는 사실이다. 그가 주목하는 점은 인간이 총체적으로 죄의 지배 아래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동성애도 그중 하나였다. 이런 시대적 배경과 신학적 관점을 빼 버리고 바울의 동성애 비판을 문자적으로 오늘의 삶에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나는 개인적으로 동성애자들의 성적 지향성에 전혀 공감하지 못한다. 거칠게 표현하면 그들의 행위에서 역겨운 느낌도 든다. 그들은 아마 나의 성적 지향성에 공감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것이 차이의 문제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기에 몇몇 성경 구절을 근거로 그들을 매도할 생각이 전혀 없다.

나는 복음을 전하는 목사로서 동성애자들에게 복음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한다. 이성애자들이 이성애를 통해서 삶의 한 부분에서 희열을 느낀다면 동성애자들은 동성애로 삶의 한 부분에서 희열을, 즉 살아 있음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게 복음이다. 유럽과 미국 교회에서는 이미 동성애를 수용하는 게 대세로 자리를 잡았다. 동성애자이기에 목사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거나 성공회 신부 자리를 박탈당하지 않는다. 동성애자 주교도 이미 출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교단에 따라서 차이가 있긴 하다. 이런 추세는 앞으로 확대될 것이다.

다른 부분에서는 한국교회가 전반적으로 미국 교회를 따라가면서도 동성애 부분에서 다른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좀 더 고민해 봐야겠다. 끝으로 예수가 이런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실지 상상해 보라. 동성애자(성소수자로 부르는 게 더 적합하다)를 설교 강단에서 혐오하는 목사들을 향해서 "너나 잘해라"고 하시지 않겠는가. 동성애자들을 향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으니, 가시오."

좌파 혐오

타 종교나 동성애 문제보다도 좌파 혐오가 한국교회에 훨씬 더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현상이다. 앞의 두 문제는 최근에 불거진 것이지만 좌파 문제는 남북 분단과 함께 시작된 현상이다.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개입되었다.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에는 북한에서 공산당의 박해를 받아 월남한 기독교인들 역할이 컸다. 큰 정도가 아니라 절대적이었다. 이들 눈에 공산주의는 적그리스도다. 북한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풀어 가려는 집단 역시 그들에게는 적그리스도나 마찬가지다. 한국 사회가 지난 군사독재 체제 아래서 반공을 국시로 여긴 것처럼, 한국교회 역시 반공을 자신의 존재 근거로 여기는 것으로 보인다.

지인에게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평생 교육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교회에 성실한 기독교인 장로로 살았던 분이다. 학교나 교회에서 존경받을 만한 인격과 신앙이 있는 사람이다. 교회 개혁에도 나름으로 안목이 있다. 다만 북한 문제에서만은 완고한 입장이다. 젊어서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언젠가 이루어져야 할 남북통일을 위해서라도 지금부터 대화의 기회를 늘리는 게 필요하다고 내가 말하자 그는 북한과의 대화 자체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불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북한 공산당의 계략에 우리가 넘어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평화통일이라는 말도 깎아내렸다. 그렇게 북한을 불신하는 이유는 북한을 본인이 직접 경험했다는 확신에 근거한다. '내가 해 봐서 안다'는 식이다. 그는 육이오 참전 용사다. 육이오 전쟁터에서 겪었던 경험과 심리가 7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지속한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이렇게도 말한다. "북한군이 남한에 내려오면 목사를 가장 먼저 처단할 것이다." 이와 비슷한 뉘앙스의 발언을 교회 강단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다. 특히 남북 대화를 강조하는 정권이 집권할 때 그런 발언이 더욱 기세를 떨친다. 적개심 가득한 이런 발언을 들을 때마다 영혼의 안식은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일정한 대상을 향한 혐오 현상은 공포심에 연유한다. 한국 기독교는 위에서 거론한 타 종교와 동성애와 좌파에 대한 공포심이 극심하다. 악마에게서 느끼는 공포심과 같다. 타 종교를 인정하면 기독교의 구원론이 붕괴한다는 공포심이, 동성애를 인정하면 성경의 창조 원리가 부정당한다는 공포심이, 좌파를 용납하면 교회가 붕괴할 것이라는 공포심이 크다. 교회 지도자들은 회중을 향해서 그런 공포심을 자극해 목회의 성과를 올리기도 한다. 공포심은 기독교 신앙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만약 교회에서 공포심이 나타난다면 그건 신앙이 아니라 정치다.

기독교 신앙은 대상이 설령 악마라고 하더라도 연민을 느낄지언정 공포심을 느끼지는 않는다. 이미 악마는 극복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공포심에 사로잡힌 교회에 무슨 영혼의 안식이 가능하겠는가.

영혼의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빛으로부터 온다. 그 빛이 너무 강하기에 직접 쳐다보았다가는 눈을 버릴지도 모른다. 그 빛이 우리를 감싸기만을 조용히 기다려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빛은 기독교인에게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이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라는 '그리스도 찬가'를 신앙의 중심으로 삼은 기독교인은 사랑과 열정으로 예수의 우주론적 구원 능력을 세상에 선포하는 사람들이다. 그 사실을 알기에 기독교인은 누구도 혐오나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칼 바르트의 아래와 같은 진술이 이를 의미한다.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대한 희망 안으로 능동적으로 수용된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일 아침 우리에게 새롭게 제기되는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적 교회가 전하는 소식이며, 내가 그 소식을 들을 때 그것은 나의 고유한 과제가 된다. 한 그리스도인인 나에게 그 소식이 전해질 때 나는 그 소식의 전달자가 된다. 그때 나는 나의 입장에서 인간들 곧 모든 인간을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바라보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제 내게는 모든 인간을 위해 최선의 것을 희망하는 것 외에 다른 가능성은 없다." [칼 바르트, <교의학 개요>, 221쪽]

마지막 문장에 "모든 인간을 위해 최선의 것을 희망하는 것"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지금 한국교회가 혐오의 대상으로 여기는 이들이 바로 '모든 인간'이다. 그들에게 '최선의 것'을 찾아내는 수고가 바로 우리 복음 선포자들에게 요청된다.

정용섭 / 대구 성서아카데미 원장, 대구 샘터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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