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미하고 사색한 흔적이 깊게 밴 책이 있습니다. 가슴으로 읽어야 할 책이 있습니다. 좀처럼 그런 책을 만나기가 어려운 것은 왜일까요. 속도와 경쟁 속에 살아가다 보니, 빠른 호흡에 익숙해진 마음이 여문 생각을 담은 책을 멀리하게 만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대의 풍조만 탓할 수는 없겠습니다. 깊은 영혼과 정신은 다양한 흐름과 무늬를 통해 드러나게 마련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복음이 담긴 성서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제가 이런 물음을 던지는 까닭은 성서라는 고전이자 경전이 사람의 삶과 역사에 미친 영향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성서만큼 사람들 삶을 바꾸어 놓은 책은 드물 듯합니다. 삶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근본적 변화를 일으켰다는 점에서 성경만큼 영향력이 큰 책이 있을까요. 사람만큼 바뀌지 않는 존재도 없지 않은가 합니다(그 역도 맞는 말이긴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바뀐다는 것만큼 놀라운 사태가 있을까요). 그런데 성경은 사람의 삶을 뒤흔들었고, 성경을 읽기 전과 후의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성경을 만난 사람은 이전의 삶을 그대로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성경을 누가 어떻게 읽는가, 제대로 읽는가를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변화의 서이기도 하지만, 오독誤讀한 이들은 성경을 왜곡해 많은 사람들 삶을 잘못된 방향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정독正讀과 오독 사이에서 성경을 잘못 읽어 낸 이들이 사람들 삶을 망가뜨리기도 했습니다. 아전인수격으로 성경을 해석한 사람들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 성경 독서사를 떠올리면 두려워집니다.

책을 잘못 읽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잘못 읽은 사람들은 혼자만의 오독으로 끝나지 않고, 자신의 오독을 정독으로 확신하고 진리인 양 유포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독단, 독해해서 많은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습니다. 잘못 읽은 자들이 삶과 영혼을 황폐하게 만들었다고 한다면 너무 가혹한 비판일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 오독이 얼마나 잘못된 결과를 낳았는지 우리는 역사 속에서, 종교 공동체와 일상생활에서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요. 분명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은 연자 맷돌에 갈릴 만큼 준엄한 심판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제가 '한국 종교 사상가' 변찬린의 <성경의 원리 上>(한국신학연구소)을 소개하기 전에 이렇게 긴 말을 앞에 적어 두는 것은, 변찬린의 저서가 △성경을 왜 읽어야 하는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어떤 마음으로 읽어야 하는가를 깊이 일깨워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 속에 제시된 그의 사상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사실 제대로 이해했는지 저어되는 곳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왜 성경을 읽고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 적시한 것은 일반 독자로서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변찬린의 종교 사상에 대해서는 단행본과 신학적 평가들이 이미 나왔습니다. 따라서 저는 신학적 이론보다는 일반 독자로서 평심한 마음으로 읽은 소회를 간략하게 써 보고자 합니다.

<성경의 원리 上> / 변찬린 지음 / 한국신학연구소 펴냄 / 568쪽 / 2만 8000원

한국신학연구소에서 한밝 성경 해석학 시리즈 개정 신판으로 발간한 <성경의 원리> 4부작은 성경 66권을 조직신학적으로 해석한 <성경의 원리 上>, 구약을 해석한 <성경의 원리 中>과 신약을 해석한 <성경의 원리 下>, 그리고 <요한계시록 신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저는 먼저 변찬린의 책에서 <성경의 원리 上> 제1장 '성경론'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성경론'을 읽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어떤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야 하는가 깊이 반성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이 신학자나 목회자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고 믿는 이유입니다.

변찬린은 성경을 잘못 읽은 폐해를 이렇게 비판합니다.

"성경을 정독正讀하고 정독精讀하여, 정각正覺하고 정해正解하면 천국에 가는 씨가 되지만 성경을 사독邪讀하고, 사독私讀하여 오각誤覺하고 곡해하면 지옥에 떨어지는 씨가 된다. (중략) 성경을 성령을 따라난 언약의 씨가 읽으면 심전心田을 개발하여 중생의 변화를 일으키지만 혈맥을 따라 난 육신의 씨가 읽으면 종교적인 사기꾼이 되는 것이다. (중략) 우리는 성령의 감동에 따라 성경을 정독하고 정독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정말 성경으로 읽는 것일까. 성경을 읽고 변화되고 싶은 것일까. 의사가 육신의 질병을 잘못 고치면 환자는 그대로 병자로 남듯, 영적 지도자나 종교인이 누군가의 영혼과 정신을 망가뜨리면 그 사람은 살아도 죽은 자로 남으니 더 큰 죄악일 것입니다. 때문에 독사가 물을 먹어 독을 내어 버리는 꼴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변찬린은 성경 정독의 중요성을 강하게 권고합니다.

그는 "예수를 믿으면서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은 비유컨대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책을 읽지 않음과 같다. 성경을 읽지 않는 성도들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에게 쉽게 넘어가고 세상 지식으로 교묘하게 꾸민 목자들의 영력靈力 없는 설교에 귀 기울이지 말고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을 읽자"고 거듭 힘주어 말합니다.

신앙 서적이 범람하지만, 신앙의 태도와 믿음이 그다지 바뀌지 않는 까닭은 왜일까요. 성경 연구서들과 신학 서적들이 즐비하지만 왜 더 깊은 영성과 구도의 길을 걷는 자가 많지 않고, 그리스도인에게 삶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것일까요. 변찬린은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을 학생이 학교에 다니면서 책을 읽지 않는 것에 견주며, 성경 읽기를 게을리한 교인들이 결국 영력 없는 목자들에게 빠져들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왜 그는 우리에게 그토록 성경을 바로 읽을 것을 간곡하게 권고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타락한 비본래적 가인假人이지 참사람이 아니다. (중략) 신령한 몸으로 변신"되어야 할 존재이며 "죽음에서의 자유와 해방의 선언! 이것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유는 죽음에서의 자유와 해방이라면, 그것을 담은 것이 복음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성령의 감동을 따라 복음을 바르게 읽고 꼼꼼하게 읽어 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읽어야 성경을 바로 읽는 것일까요. 그는 고린도후서에 근거해 두 가지 성경 정독 방법을 제시합니다. 첫째, 수건을 벗고 읽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자유한 자가 되어 성경을 읽어야 한다. 수건을 벗고 읽어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수건은 여기서 생명의 실상을 못 보게 가린 막을 의미합니다. 그 막이란 다름 아닌 율법과 계명의 올가미, 죄와 죽음입니다. 변찬린에 따르면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은 율법과 계명에 매인 노예 상태였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도'를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성경을 혈맥血脈이 아닌 도맥道脈을 간직한 영적인 문서로 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성경은 "어느 특정종교의 전용 문서가 아닌 대도大道의 문서"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렇게 주장하는 까닭은 "성경의 진리가 로마에 이식되면서부터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곡해되고 헬레니즘과 혼음한 후 기독교(가톨릭)는 옷을 입고 서양화"되었고, "성경과 기독교를 동일시하는 착각이 2000년 동안 지속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어 "먼저 이 엄청난 미망과 허위와 독단을 타파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한 도맥은 그동안 서구 신학 수입 이론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아니 그는 도맥과 영맥靈脈을 살피려는 마음조차 빼앗긴 채 타자의 눈에 얽매여 있었음을 비판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흔히 신비주의를 연상하거나, 자칫 비합리적인 성경 독해를 연상하고, 성경을 동양 전통으로 곡해하는 줄로 선입견을 가질 분도 있겠습니다. 변찬린은 그런 기존의 왜곡된 신비주의를 경계하고, 성경을 성경으로 풀려는 정직한 자세를 잃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변찬린은 성경을 초역사적 산물 혹은 역사적 산물로만 환원할 수 없다는 맥락에서 성경 독해의 균형을 잃지 않습니다.

사실, 성경에 대한 해석과 방법은 서구 신학에서 더 이상 보탤 것이 없을 만큼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해석과 방법이 아무리 축적되어 있다 해도, 저와 같은 평신도에게는 마음에 잘 와닿지가 않습니다. 서구 신학 방법론이 성경을 읽는 잣대가 될 수 없다고 하여 동양이라는 문맥에서 성경을 보자는 것이 옳다는 말은 아닙니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성경을 잘못 읽었다는 것, 변찬린이 성경과 기독교를 등치해서는 안 된다고 볼 만큼 우리는 성경의 원리와 의미를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가 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되풀이 주장을 합니다.

"서구 기독교가 우리에게 주입한 교리와 교파의 잘못된 선입관념을 버리고 빈 마음자리에서 성경을 다시 읽자. 우리는 성경과 교리화된 기독교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성경=기독교라는 등식에서 빨리 해방되는 길만이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신과 해후할 수 있는 첩경임을 대각해야 한다. (중략) 우리는 절대 자유한 자리에서 순수 무잡한 마음자리에서 성경을 다시 읽어야 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자유한 자리에서 성경을 읽어야하는가. "예수는 우리를 자유케 하였다. 계명과 율법의 질고에서 자유케 하였고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자유한 자란 어떤 존재일까. 다름 아닌 "자유한 존재란 언약을 따라 난 자들이며 무덤에서 부활한 산 자를 의미" 합니다.

변찬린은 "하나님은 인간 그 자체에 거하시는 분이지 건축물 속에 거하지 않는다. 인간의 몸이 성전인데 돌과 시멘트로 성전을 세울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묻습니다. 이 물음은 예수가 성전이고 하나님은 성전, 즉 인간의 몸 안에 거하신다는 그의 믿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을 찾아가는 문서"임을 명백히 하고, 성경이 곧 인간이고 인간이 곧 성경임을 온전하게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정독正讀, 정독精讀했다면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변찬린의 <성경의 원리 上>은 성경을 참마음으로 읽고자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숙독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왜 성경을 읽어야 하는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를 변찬린이 고민한 것은 우리가 '성령이 거하는 성전'임을 자각, 변화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절박한 구원의 과제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만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인 변화의 뿌리는 바로 성경을 바르게 읽는 데서 시작한다는 그의 믿음이 이 책에는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이 책은 모두 18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경론, 도맥론, 타락론, 부활론, 하나님론, 예수론, 성령론, 대속론, 초림 및 재림론, 성모론, 장자론, 신부론, 천사론, 하늘론, 영혼론, 윤회론, 예정론, 종말론 등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말미에 개념과 용어 해설도 실려 있어, 변찬린의 성경 정독을 위한 길잡이가 되어 주고 있습니다. 교인분들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원리에 관심을 갖고 계신 분들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임종수 /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종교철학과 신학을,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한학을 연수하고,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에서 석사, 같은 대학 동아시아학술원에서 박사(동양철학 전공)를 받았으며,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동양미학과 예술사상을, 감리교신학대학교(객원교수)에서 동양철학과 고전, 종교학을 나누고 있다. <종교 속의 철학 철학 속의 종교>, <문명이 낳은 철학 철학이 바꾼 역사(1)>, <21세기 보편 영성으로서의 誠과 孝> 등을 함께 썼고, <그리스도인의 논어 산책>을 지어, 동양 고전을 통해 그리스도교 복음을 만나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힘을 모으고 있다.

외부 기고는 <뉴스앤조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