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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교가 태종에게 공인받기까지
나의 고대 동방 기독교 유적 답사기(6)
  • 성기문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9.09.18 10:35

장안성에 들어간 선교사들

이번 기사에서는 아라본 일행이 태종의 관리하에 경전을 번역한 일과 3년 뒤 공인받은 일을 살펴보려고 한다. 아라본 일행이 장안성에 들어갔던 공식적인 절차를 다른 자료들을 통해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공식적으로 서교에서 재상 방현령房玄齡이 황제의 위임을 받아 귀빈을 영접하고, 장안으로 인도해 들어갈 길일吉日을 정해 황제를 알현할 계획을 마무리한 후, 방현령의 인도로 이들은 장안성 서문을 통해 들어갔을 것이다. 서문으로 들어가 대로를 지나면 당의 중앙정부 청사들과 관공서들의 구획(일종의 내성內城으로 둘러싸인 황궁皇宮), 고관들이 살던 저택들, 공적이며 국내 물건들을 팔았던 동시東市가 있다. 그 반대편에는 서민들이 살던 지역, 외국인들 거주 지역, 서역 물건들을 주로 팔던 서시西市가 있었다.

여러 건물(들)이 군집한 구획을 방이라고 불렀는데, 구획 자체가 폐쇄된 성이다. 방의 사면은 높고 견고한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4개 혹은 2개의 대문으로만 출입할 수 있었다. 새벽과 밤에 울리는 종소리를 따라 방의 문을 폐쇄하고 개방하는 방식으로 모든 방을 엄격하게 통제했고, 출입을 위반하는 경우 엄격한 처벌이 따랐다(다쓰히코 127~130).

알로벤 일행은 다른 외교사절들이 그랬듯이 황궁에 위치한 홍려시의 관리를 받으며, 홍려객관에서 본격적인 중국 생활을 시작했을 것이다[홍려시와 홍려객관의 세부적인 업무 등에 대해서는 아래 참고 문헌 목록에 등장하는 최재영(조공을 바치고 당황실을 방문한 나라들을 중심으로 연구)과 염경이(홍려시의 최고 직책, 홍려경에 대한 사행使行 등 다양한 활동에 대한 연구)를 참조하라]. 문제는 이들이 단기적으로 머무는 외교사절들을 위해 마련된 홍려객관에서 본격적인 장기 체류를 위한 준비와 번역 작업을 어떻게 수행할 수 있었을까에 대한 것이다.

경교 경전 번역 논란

당대에 외래 종교가 국가의 통제와 후원을 받아 전파되고 성장했다는 것은 상식적이다. 서양의 경우처럼, 중국에 국교가 있지는 않았지만 도교·불교·유교는 항상 황제에게서 관심과 사랑을 받으려고 경쟁하는 형국이었다. 반대로 황제 입장에서 종교는 개인적 선호일뿐 아니라 국가 통치에 유용한 수단이었다.

우선 아라본이 가져온 것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보자. 경교비는 두가지 모순적인 언급을 하고 있다. 이전 언급에서는 경전을 가지고 왔다고 하지만(而載眞經。), 그 아래 태종의 말을 인용한 비문에는 "대진국 대덕 아라본이 멀리서 경전과 성상을 가져와 상경하여 바쳤다"(大秦國 大德 阿羅本。遠將經像。來獻上京。)고 나온다. 물론 이러한 표현들을 서로 모순된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경전과 성상을 가져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아라본 일행이 어디서 태종을 만났을까. 다른 사례들을 비추어 보았을 때, 태종이 아라본을 공식 접견한 곳은 궁내의 태극전이었을 것이다. 이제 아라본이 가지고 온 경전의 의미가 무엇인지, 경전 번역은 어디서 했는지, 태종의 반응과 그 이유 등을 살펴볼 것이다.

당 태종. 당나라 2대 황제.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앞서 경교 비문 번역의 논란을 다루었는데, 기록된 경전을 보유하고 있는 모든 종교의 문헌은 경전經典과 서적書籍으로 나눌 수 있다. 중국의 전통적인 종교 문헌 분류에 따르면, '사서삼경四書三經'이라 말하듯이 경과 서 사이에 큰 차이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불경이나 기독교 경전의 경우에는 확실한 구분이 필요하다.

모든 경전이 그렇듯, 경이 성경 자체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해설서(주석이나 확장본, 축약본의 형태)나 논증서, 예배나 찬송가 형태의 종교 문헌을 포괄적으로 의미할 수 있다. 따라서 '경'을 논할 때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조금 더 부연해 설명하도록 한다.

경교 경전 번역이 어디서 어떻게 이뤄졌을지 살펴보자. 그에 대한 경교비의 언급은 너무 단순하다. 고대 한문을 해석하는 것은 관련 문헌이나 설명이 없는 상태에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태종이 선교사 일행으로 하여금) 경전 및 관련 서적들을 궁궐에서 번역하게 하셨다"(翻 經書 殿)(바우머 329)거나, "경전을 궁궐 내의 도서관에서 번역하게 하였다"(翻經 書殿)고 번역할 수 있다[구범회 85(이 해석은 Saeki, 165에서도 나온다). 혹은 "경전 및 관련 서적들을 (특정한) 전각殿閣에서 번역하게 하였다"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단순한 네 글자를 통해 이해하기 어려운 당시 사정을 재구성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알려면, 즉 경교의 경서가 황궁에서 번역되었는지, 아니면 그것들을 어떤 집(그 집)에서 번역하게 했는지, 단 네 글자로 기록된 경교 경전 번역 과정을 이해하려면, 당시에 불경 번역과 관련해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대 불경 번역사를 조금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중국 경전 번역사 혹은 불경 번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경교 선교사 아라본 개인이 성경을 번역했다고 추측(가정 혹은 단정)한다. 만약 당 제국이 경교 선교사들의 입국과 포교, 교회 건축을 허락하고 지원했을 정도라면, 번역 자체는 개인 혹은 한 종교의 사업이 아니라 국가적 혹은 국책 사업이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국가가 재정 지원을 넘어 사업을 주관하고 전반적으로 통제했다는 의미다. 이러한 역경 사업은 불경 번역을 예로 든다면 그에 대한 피상적 이해나 궁금증이 더 명확해질 것이다.

아마도 이들은 황궁(정부 종합 청사)에 출입하면서 역경이라는 일차적으로 주어진 임무를 수행했을 것이다. 이들이 출입했을 만한 곳은 다음과 같다. 당태종 즉위 두달 만에 황성 내의 태극궁太極(겁) 내에 문하성門下省 내의 홍문전弘文殿에 홍문관弘文館(기존의 수문관修文館의 개칭)을 설치하고, 당시 장서 20만 부를 소장했다고 한다. 홍문관은 국가적인 도서 수집, 관리, 연구, 강학講學, 출판까지를 총체적으로 담당하는 곳이었다. 홍문관이 일반 대중에 개방된 공공시설이 아니기 때문에 관료가 아닌 외교사절 혹은 외국 종교인들에게 그곳을 종교 서적 집필과 경전 번역 장소로 제공했다면, 공적 영접이라는 특혜라고 할 수 있다. 황실 관청(홍문관?)에 역장을 마련할 수 있었다면, 그 또한 하나의 중요한 특혜가 추가된 것으로 여길 수 있다.

경교와는 반대로, 불교의 경우에는 역경 작업의 역사가 이미 깊었다. 경교 선교사 아라본이 입당[635년(정관 9년)]한 지 몇 년 뒤 정관 3년(629년)에 인도로 떠났던 현장 법사가 645년(정관 19년)에 산스크리트어 불경 수백 권을 구해 장안으로 돌아왔다. 현장은 곧 당태종 윤허하에 인도에서 가져온 여러 불경을 번역할 때 장안 내 불교 사원에 역장譯場을 설치하고 불경 번역을 진행했다.

경교는 태종의 공식 재가 후에야 비로소 장안의 의녕방에 대진사를 건축했다(即于京 義寕坊。造 大秦寺 一所。)는 점에서 경교 시설 가운데 역장을 마련할 수는 없었다. 위에서 가정한 바 있듯, 아마 이 경우에 태종은 황궁의 한 건물에서 역장을 마련하도록 배려한 것일 수 있다.

불경 번역의 예를 들어 보면, 아라본에게도 그와 유사한 담당자들과 역할이 주어졌을 수 있다. 불경 역장에는 다음과 같은 전문가들이 배치되어 원활하게 번역하도록 도왔다.

역경 책임자로 모든 번역 임무를 맡은 역주譯主가 있었다. 역주의 조수가 되어 역문과 원문을 대조하는 증의證義가 있었다. 역주가 원본을 낭독할 때 착오가 없는지를 확인하는 증문證文이 있었다. 정서整書하는 일을 맡았던 서수書手가 있었다. 주로 범문을 번역하는 필수筆手가 있었다. 번역문들을 대조하는 참역參譯이 있었다. 불필요하게 중복되는 내용을 삭제하는 간정刊定이 있었다. 유창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만드는 윤문潤文이 있었다. 음절을 수정하고 외우기 쉽게 만드는 범패梵唄가 있었다. 번역 작업을 보호하는 고급 관리인 감호대사監護大使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번역이 끝난 후 황제에게 최종 검토와 윤허를 위한 최종 번역본을 진상했다(첸원중, 후나야마 도루 등을 참조하라).

역사 기록에도 남아 있듯이, 불경 번역의 경우 이 일을 맡을 전문가층이 상대적으로 두터웠을테지만, 경교는 희박했을 것이다. 아마 최초의 작업이라 더디고 시행착오가 많았을 수 있다.

아마도 현장처럼 아라본의 경우에 번역 총책임자는 방현령이 맡았을 것이다. 그는 역장과 황궁 사이의 모든 필요한 일과 절차를 총괄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아마도 아라본은 번역자 측면에서의 부족함 때문에 역장 규모가 최소로 꾸려졌을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지 일반적으로 번역 역장이 마련되면, 태종이 와서 첫날 성대한 의례를 개최하면서 그날 명예 필수筆手로 입회하고 그와 같은 의례가 끝난 다음에 다른 사람, 즉 실무자에게 필수를 맡겼다(후나야마 도루, 113). 중국 말을 잘하지 못했던 아라본은 현지 상황과 이질적인 문화와 그 장애를 넘기에 익숙한 사람도 아니었으며, 번역할 시간도 짧았다(물론 그가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비슷한 문화와 선교에 대한 경험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아라본이 중국어를 전혀 몰랐다면, 번역 작업을 할 때 그의 역할은 작거나 거의 없었을 것이다. 중국어를 알았더라면 역할은 좀 더 커질 수 있었을 것이다. 역장을 펼쳤더라도 위와 같이 번역의 다양한 단계에서 도움을 줄 만한 전문 조력자들도 구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불경 번역 역사에서도 이러한 경우가 많았다. 아라본처럼 불경 번역 작업을 할 때 역승 자체의 역할이 미미했던 경우는 629~633년에 바라파가라밀다라가 초당初唐의 장안에서 역경을 수행한 경우였다. 바라파가라밀다라는 역경 총책임자였지만, 통역이 필요했기에 역수는 아니었다. 필수는 혜색과 범람 두 명이 각각 담당했다(후나야마 도루, 114, 130ff.).

반대로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경우는, 바로 구마라집과 현장 법사가 역경을 했을 때였다. 현장은 원래 중국인이었고 경전 원어를 익혔을 뿐만 아니라, 인도에 가서 경전을 익히고 인도 경전을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구마라집은 출신이 외국이지만, 중국어도 잘했기 때문에 훌륭한 불경 번역 작업을 해낼 수 있었다. 게다가 불경의 역장에는 전문 승려들이 다수 가담했다(첸원중, 582~595). 현장은 역경 사업에서 당 조정의 전폭적 지원을 받았고, 번역팀을 꾸리기 위해 전국의 전문 승려들을 모아 중의 12명, 철문 9명, 증범어범문 1명, 자학 1명. 이외에 참역, 간정, 윤문, 범패를 몇 명 두었다. 현장 자신이 역주를 맡았고, 당시의 경사유수京師留守 양국공梁國公 방현령을 감호대사로 두었다. 그는 역장 출입을 엄격 통제했다(이종철, 127).

경교 경전의 비밀

전교 초기에 경전을 번역했다고 하는데, 아라본 문서라 여겨지는 경전은 수가 무척 적고 사용된 표현들도 기독교 고유의 것이라기보다 중국 종교들을 모방한 듯 보인다. 이에 대해 몇 가지 논의할 내용이 있다.

첫째, 초기 번역본들이 성경 번역은 아니라는 전제이며, 둘째, 당시 번역되어 황제에게 진상된 문서 내용은 기독교의 본질과 변증적 요소가 강했으리라는 점이다. 성경 번역 지체는 여러 내외적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황제에게 공인을 받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였다는 점과 경전 번역이 매우 신중하고 오래 걸리는 과제였다는 점이다. 진상된 문서가 갖고 있는 의외의 '이질성'은 번역 원칙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모든 경전이나 외국 서적 번역이 그렇듯, 번역 원칙에 따라 직역 우선과 의역 우선의 입장이 갈리기 마련이다.

구마라집은 의역에 중점을 두었다면, 현장은 직역과 의역 사이의 조화로운 번역을 택했다(첸원중, 588ff., 642-43). 구마라집이 번역 작업을 대중에 개방해 토론하고 번역 작업을 확장했다고 한다면, 현장은 번역 작업을 전문가들만으로 폐쇄적으로 운영했다[여기까지의 불경 번역에 관련된 논의는 후나야마 도루, "3장 번역은 이렇게 이루어졌다"(89~127)를 주로 참조했다].

경전 번역 임무를 받았던 아라본 일행에게는 할 일이 산적해 있었다. 가장 시급했던 황제의 윤허는 물론이고, 실제적으로 복음을 전하려면 선교 본부와 인적 자원과 재정이 필요했다. 그 과정 중에 경전 번역 과제가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일차적으로 곧 만들어지게 될 경교도들 예배 처소에서는 (최소한 외국인 거주지에서라도) 시리아어로 예배를 시작했을 것이며, 우선적으로 중국인들과 공적 문서로 변증 차원에서 중국어로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시 말하자면, 기본 문서들은 성경과 교리서들이 시리아어로 적혀 있었으며, 선별적이고 의도적·변증적으로 한자 문서로 기록되었을 가능성을 그동안 학자들은 간과했다는 것이다.

경교의 신속한 소멸을 이야기할 때, 토착화에 무관심했다고 하지만 불교도처럼 경교도들이 경전과 기독교 전파에 노력했음을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경전들이나 문헌들이 방증한다고 할 수 있다. 이슬람의 경우에는 경전 번역을 금지했다. 심지어 불경은 단순히 주문처럼 변한 경우도 있다.

번역된 아라본 문서(들)에 대한 당태종의 태도도 무척 진지했던 것 같다. 경교비는 "태종이 내전에서 도를 물었고 그 참된 진리를 깊이 이해하고 특령을 내려 진리를 전할 수 있게 하였다"(問道禁闈。深知正眞。特令傳授。)고 말한다. 그러면 아라본 문서(들)은 언제 완성했을까. 경교비는 당태종 허가가 떨어진 때를 "정관 12년 가을 7월"(貞觀 十有二年。秋七月)이라고 말한다. 피상적으로밖에 추측할 수 없지만, 아라본의 일차적 임무는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다음은 당태종 칙령 내용이다.

"도에는 정해진 이름이 없고 성에는 정해진 모습이 없으니 방편에 따라 가르침을 베풀어 군생을 면밀히 제도한다. (道無常名。聖無常體。隨方設教。密濟羣生。) (중략)

그 교지를 자세히 살펴보니 현묘 무위하였다. 그 으뜸 되는 가르침을 보니 생성이 요체가 세워져서 사에 번잡한 내용이 없고 이에 망천의 효용이 있다. 만물을 제도하고 인간에 이로우니 마땅히 천하에 행하도록 하라." (詳其教旨。玄妙無為。觀其元宗。生成立要。詞無繁說。理有忘筌。濟物利人。宜行天下所司。)

[경교 비문 해석은 역자마다 천차만별이다. 경교 비문의 우리말 (표준) 비평 번역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이번 연재가 끝나면 필자가 학술적 측면에서 시도해 보려고 한다.]

참고 문헌

P. Y. Saeki, Nestorian Monument in China (London: SPCK, 1928).
구범회, 『예수, 당태종을 사로잡다: 당(당), 원(원)시대 기독교 이야기』(서울: 나눔사, 2012).
세오 다쓰히코, 『장안은 어떻게 세계의 수도가 되었나』, 최재영 역 (서울: 황금가지, 2006).
염경이廉景伊, "唐前期鴻臚(少)卿의對外活動과 變化樣相," 『中國史硏究』 第79輯 (2012. 8): 35-58.
이종철, 『중국 불경의 탄생: 인도 불경의 번역과 두 문화의 만남』(서울: 창비, 2011).
첸원중, 『현장 서유기: 중국 역사학자가 파헤친 1400여 년 전 진짜 서유기』임홍빈 역 (서울: 에버리치홀딩스, 2010).
최재영, "唐代長安의 朝貢使節의 변화와 鴻臚寺의 기능," 『동북아역사논총』 24호 (2009): 257-299.
크리스토프 바우머, 『실크로드 기독교: 동방교회의 역사』, 안경덕 역 (서울: 일조각, 2016).
후나야마 도루, 『번역으로서의 동아시아』 (서울: 푸른역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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