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음악회는 뮤지컬 '영웅'의 '장부가'에서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오늘이 과거로 바뀌는 이 순간, 나는 무엇을 생각하나. 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큰 뜻을 품었으니 죽어도 그 뜻 잊지 말자. 하늘에 대고 맹세해 본다. 하늘이시여, 도와주소서. 우리 꿈 이루도록."

남성 중창단 '라클라세'가 절규하며 노래를 마치자, 종교교회 예배당은 300여 명의 환호성과 박수로 꽉 찼습니다. 더불어배움 주최, 현대해상 후원으로 8월 22일 열린 제24회 광화문 음악회 '걱정 말아요, 그대'의 광경이었습니다.

더불어배움은 2013년부터 서울 은평구 교회들이 교육 안전망을 만들기 위해 구청·서부교육지원청과 협력해 교사 공감 캠프와 학부모 교육을 진행하고, 학생 정서 지원 사업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경기도·대구·부산 등으로 확대됐고, 곳곳에서 마을 음악회도 엽니다. 종교교회 '광화문 음악회'는 우울한 시대에 지역 주민을 격려하고, 호응이 크다는 점에서 교회 이름에 걸맞습니다. 종교교회가 '宗敎敎會'가 아니라, '다리 교'를 써서 '宗橋敎會'인 까닭입니다.

종교교회 터 광화문 근처에는 종침교琮琛橋라는 다리가 있었습니다. 종침교를 바탕으로 '마루 종'을 사용해 '宗橋敎會'라고 교회명을 쓴 것입니다. 교회 앞 돌비에 "하나님과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섬기며,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시는 능력에 힘입어 하늘과 땅, 동과 서, 너와 나를 이어 주는 다리가 되기를 원하는 처음 교인들의 신앙과 선교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고 새겨져 있습니다.

종교교회 예배당. 이근복 그림

종교교회는 윤치호 선생 요청에 따라, 1887년 미국 남감리교가 한국 최초 여선교사로 파송한 캠벨(Campbell)에 의해 1900년 4월 15일 설립했습니다. 민권운동가·외교관·언론인·교육자·정치인·기독교운동가 등 이력이 화려한 윤치호는 1865년 충남 아산에서 충청감영 중군으로 있던 윤웅렬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형조판서였던 부친이 갑신정변 실패로 쫓기자, 그도 1885년 1월 상하이로 망명했습니다. 윤치호 선생은 상하이 중서서원에서 공부할 때 본넬(Bonnel) 교수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됐습니다.

윤치호 선생은 1888년 9월 미국 밴더빌트대학과 에모리대학에서 유학한 후, 1893년 11월부터 1년여 동안 중서서원에서 영어를 가르칩니다. 귀국 후 <독립신문> 발행인과 사장 등을 역임했고, 만민공동회 최고 지도자로서 민권 계몽 활동을 했고 독립협회를 이끌었습니다. 독립협회 실패 이후 실력양성론을 주장하더니 관직에 투신해 외무부협판, 한성부판윤 등을 지냈습니다. 한영서원과 대성학교 교장으로 일하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투옥됩니다.

YMCA와 조선체육회 회장, 연희전문학교 교장으로 활동했는데,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친일 행각을 본격화해 시국 강연회에 연사로 자주 나가고 황군 위문금과 국방헌금을 냈습니다. '애국경기호' 비행기 구입비도 헌납했고, '내선인은 동일 운명-거선巨船의 항해에 임하라'(<매일신보> 1937.8.15.)라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친일 협력 조직 조선기독교연합회에서 회장이 됐으며, 1942년 조선인 징병제가 결정되자 여러 신문에 환영하는 글을 싣고 징병제 실시 기념 강연회에서 연사로 참여했습니다.

창씨개명하고 1944년 국민총력조선연맹과 국민동원총진회 고문으로 위촉됐습니다. 1945년 2월 대화동맹大和同盟 위원장을 맡았고,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에 임명됐습니다. 1945년 12월 6일 76세로 사망했습니다.

'신앙과지성사'에서 2017년 출간한 <좌옹 윤치호 평전>은 1000쪽에 달합니다. 일기에 관심을 두고 유심히 읽었지만, 아쉽게도 신앙과 친일에 대한 고뇌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1919년 1월, 최남선이 3·1 만세 운동 참여를 권유했으나 침묵으로 거부했다고 합니다. 실력이 모자라니 반일은 철없는 짓이라고 생각한 것일까요? 아니면 당대 최고 엘리트로서 독립 가능성을 머리로만 계산한 것일까요.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비전을 품고 헌신했을 텐데, 일기에는 종교인다운 면모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요즘 자발적 반일 운동이 한창입니다. 우리 사회와 국민의식 깊숙이 자리 잡은 친일 잔재를 척결하고, 정치·경제적으로 자립하며, 산업구조를 바르게 세울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를 앞장서서 옹호하는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를 중심으로 집필한 <반일 종족주의>(미래사)에 "일제는 조선을 수탈하지 않았고 삶의 질이 향상되었다", "정신대는 성노예가 아니었다" 등 극단적 주장이 있다고 합니다. 어느 단체 카톡방에서 읽은 박노영 교수(충남대 사화학과 명예) 글은 명쾌했습니다.

"공장들은 조선인들의 복리를 위해 생긴 것이 아니고, 철도와 도로는 조선인들 여행이나 다니라고 생긴 게 아니다. (중략) 더욱이 조선을 강점한 일본은 제국주의 전쟁 국가가 되어 조선을 자신들의 전쟁 수행을 위한 자원과 인력의 공급지로 최대한 쥐어짰다. 식민지의 젊은이들은 강제징용공, 성노예로 끌려갔다. (중략)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일제가 남겨 놓은 문서 자료들에 주로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자료들 가운데는 식민 종주국의 정치적 목적 때문에 사실을 은폐, 왜곡, 미화하고 있는 것들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크다. (중략)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일제 강점은 분단의 원인이 되었다. 분단이 없었더라면 전쟁도 없었다. 일제가 남겨 놓은 근대화의 물적 자산들은 전쟁 기간에 대거 파괴됐고, 한국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일본은 군수기지 역할을 하면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중략) 지금의 처지가 과거에 비해 나아졌다고 해서 그게 일제강점기 덕분, 한일 협정 덕분이라고 하는 것은 납득되지 않는 비약이다. 소설 <뿌리>를 써서 미국에서 돈과 명성을 얻은 알렉스 헤일리는 아프리카에서 납치되어 노예로 끌려온 쿤타 킨테의 6대손이다. 알렉스 헤일리가 성공한 것을 그 자신의 노력 덕분이라고 해석해야지, 쿤타 킨테가 납치되어 왔기 때문이라고 해석해서야 되겠는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8월 11일, 서울복음교회에서 한일 공동 시국 기도회와 한반도 평화통일 공동 기도 주일예배를 열었습니다. 시국 기도회에서 일본기독교단 세키타 히로오 목사님은 "우리 일본 그리스도인들은 비인도적 침략, 부당한 지배에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제2차 세계대전 아래에서 전쟁 수행이라는 국책에 협력해 스스로를 보존하려 한 것을 진심으로 사죄합니다"라고 사과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남북 자주 통일을 위해 일하는 한국인들에게 소망이 되며, 우리 일본인들도 함께하고 싶습니다"라고 의지를 밝혔습니다. 연로한 목사님이 사과문을 읽고 부축을 받으며 나가는 모습에서 진정성이 느껴졌습니다.

종교교회는 한국인에 의해 세워지고 자립한 교회였습니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오화영 담임목사가 투옥되자 교인들은 기도하며 기다렸고, 3년 2개월 만에 출소했을 때 환영하며 받아들였습니다. 한마디로 대표적 민족 교회였습니다. 찬송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을 지은 남궁억 선생은 여기서 세례받고 전도사로 일하다가 낙향했습니다. 덕성여대 전신인 근화여학교 설립자 차미리사는 교회에 여자야학강습소를 설치해 교육에 힘썼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양주삼 목사와 김희운 담임목사가 납북됐습니다. 이후 이호빈 목사, 나원용 목사 등이 시무하면서 감리회의 중심이 되었고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산실이라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현 최이우 담임목사님은 조용하지만 열정이 넘치는 분으로, 교회당 곳곳에 걸려 있는 목사님의 성경 붓글씨는 큰 영감을 줍니다. 서울 한복판 광화문의 빌딩 숲에서도 종교교회가 두드러지는 이유는 영성의 힘일 것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 우연히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Bridge Over Troubled Water'라는 노래를 들었습니다. "당신이 다소 초라하게 느껴질 때, 눈에 눈물이 고일 때, 제가 모두 닦아 드릴께요. 저는 당신의 편이거든요. 삶이 힘들 때, 친구를 찾을 수 없을 때, 마치 풍랑 속에서 견뎌 내는 다리처럼, 나는 내 몸을 눕히겠습니다. 마치 풍랑 속애서 견뎌 내는 다리처럼 나는 내 몸을 눕힐게요." 종교교회가 다리가 되려 하듯, 척박한 시대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위로와 희망의 다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림으로 만나는 한국교회'는 매월 2차례 업데이트됩니다.

이근복 / 전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한국교회활력화지원네트워크 사무총장.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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