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몹시 따뜻하고 착한 분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그랬으리라. 예수님은 분명 그런 분이셨다. 우리 중 누구도 예수님만큼 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우리는 따뜻하고 착한 사람을 죽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를 존경하고 '착한 어린이상'을 주면 줬지, 왜 죽이겠는가. 우리는 물어야 한다. 왜 착한 예수님이 죽임을 당했을까? 여기서 "우리 죄를 위해 죽었다"는 교리적 답변은 무익하다. 예수님께서 "여러분, 제가 여러분의 죄를 위해 죽을 거예요"라고 말하지도 않았고, 말했다고 하더라도 죽임을 당하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정치범들을 사형하는 도구 아니던가. 만약 예수님께서 당국에 찾아가 "내가 인류의 죄를 위해 죽을 것이니 십자가에 처형해 주시오"라고 말했다면, 그저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기부 천사 '션' 정도로 이해하는 것 같다. 가수 션을 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를 돈 많이 벌어서 나누는 삶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많은 부자가 더 많이 나누길 바란다. 더욱이 교회에 다니는 부자라면, 더욱 그렇게 하기를 바란다. 나누는 삶은 분명 성서적이고 복음적인 열매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말이다. 션은 기부로 인해 인기가 올라가면 올라갔지, 살해 위협을 받지는 않는다. 그가 착하고 진실한 기부 행위로 인해 생명이 위태롭다는 이야기를 들을 적이 없다.

도대체 무슨 연유로, 착하디 착하셨을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선고받으신 걸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 당시 정치적·종교적 체제를 마음껏 누리며 잘 먹고 잘살던 기득권이 볼 때, 예수가 하나도 착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들이 빚어 가는 불의한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불화하는 인물 예수는, 그런 의미에서 하나도 안 착하고 참으로 불온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붙인 착하다는 이미지를 끝내 포기하지 않으려면, 이런 부분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분명 착한 사람이었지만, 권세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하나도 착해 보이지 않았다는 이 기막힌 역설을 말이다.

강대한 로마제국, 그리고 그 밑에서 콩고물을 주워 먹던 타락한 유대 종교인들. 그들이 빚어 가는 서글픈 세상에서 많은 사람이 가련한 일생을 살았다. 영혼과 육체의 형편이 남루했고, 목자 없는 양처럼 유리했다. 그런 그들에게 하늘의 빛을 삶으로 비추어 낸 예수님은 분명 착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분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치유와 치병, 축귀를 경험하고 자신의 존엄을 새로이 자각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하늘의 찬란한 빛이 싫은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나쁘고 불편한 존재였을 뿐이다. 언제나 그렇듯, 악마 같은 그들은 예수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불편한 마음을 지우려 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살리심으로, 하나도 안 착한 예수님의 생각과 행동이 옳았고 하나님의 정의는 끝내 승리할 것이라는 선언을 우주 가운데 엄중히 선포하셨다.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예수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나의 꿈과 비전으로 삼는 것이다. 예수님이 착하지 않은 분이었다면, 우리 믿음이란 예수님처럼 별로 안 착하게 살겠다는 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현실은 어떤가. 안타깝게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별로 안 착했던 예수님을 기어이 착해 빠진 순둥이로 만들고 싶은 모양이다. 성전 밖 세상을 활보했던 예수님의 다리를 잘라 교회 건물 안에 모셔 두는 형국인 것이다. 체제에 철저히 순응적인 예수, 추상적인 예수, 감상적인 예수로 그의 가치를 축소·왜곡하고 말았다.

왜일까? 체제의 '단물'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체제 자체를 거부했던 예수를, 체제에서 생존케 하고 체제에서 복을 주는 분으로 왜곡했다. 따라야 할 예수를 경배의 대상으로 둔갑시켰다. 역사 변혁의 주체가 되어야 할 교회가 가장 보수적인 집단이 되고 말았다. 살해 위협을 받았던 예수를 믿으면서도, 아무런 생명의 위협을 못 느끼는 우리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런 식의 신앙 양태는 박해가 아니라 조롱, 순교가 아니라 놀림의 열매를 낳는다. 성서와 예수의 비전을 외면한 당연한 귀결이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받는 지탄이 과연 박해이고 순교인가? 조롱과 놀림 아닌가. 하지만 예수님을 착한 분이라고만 우기려는 이들은 자신들이 받는 조롱과 놀림이 박해와 순교인 줄 알 것이다. 아무리 조롱하고 놀려도, 무엇이 잘못인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것이 우리의 비극이다.

그래서 말이다. 더 이상 착하게 살지 말자. 착하게 살라고 설교하지도 말자. 불온해지자. 불온해지자고 설교하자. 예수님이 안 착했으니까, 불온했으니까. 그래서 십자가에서 처형당했으니까.

그런데 사실은,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야말로 굉장히 착하고, 누구보다 따뜻한 분일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자. 우리도 그런 의미에서 착하게 살자. 따뜻한 삶을 살자. 예수님처럼.

이현우 / 김포 생명나무교회 전도사

평화교회연구소 '주간 평화교회 9호'에 실린 글입니다.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원문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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