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아고니즘을
'(성공)보다 나은 실패의 신학'으로
전환하는 문제

이 시대에 자행되는 혐오와 차별의 극우 정치에 맞설 대안은 혐오를 향한 증오와 분노가 아니다. 이런 갈등과 투쟁을 긍정적으로 희망차게 바꾸어 나가는 노력이다. 이를 샹탈 무페(Chantal Mouffe)는 "민주적 갈등 투쟁"(democratic agonism)1)이라 불렀다. 본래 '아고니즘'(agonism)은 상대방에 대한 합리적 분석이 아닌 반사적 공격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고대 그리스어에서 '아곤'(agon)은 '투쟁'을 의미하며, '아고니즘'이란 (정치적) 갈등의 긍정적 측면을 잠재적으로 강조하는 정치 이론에서 유래한다.

아고니즘은 갈등과 투쟁의 항상성을 수용하면서, 이 갈등과 투쟁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유통해 나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중요하게 본다. 이를 받아서, 정치철학자 윌리엄 코널리(Willaim Connolly)는 민주주의를 "갈등 투쟁적 존중심의 실천"(practice of agonistic respect)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갈등 투쟁은 '갈등'과 '투쟁'을 인정하나, 그것이 분노가 적개심에 기반한 적대주의(antagonism)와 보복 정치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투쟁은 고통과 번뇌의 시간, 탄식과 절망의 시간만을 부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투쟁의 시간에 우리가 탄식하는 것은 무너지고 깨어진 삶의 폐허에서 희망을 일으켜 세우는 길일 수 있다. 상처와 트라우마에서 살아남는 투쟁은 "정치적 변혁을 위한 투쟁"을 가르쳐 줄 수 있다.2) 지난한 과정에 지쳐 우리 사이에 발생하는 노선 차이에 대해 "함께 투쟁하고 때로 번뇌하기를 거부"3)하는 것은 곧 정치적 갈등의 억압이 되기 십상이다. 진보는 통상 "자신들의 차이와 더불어 신실하게, 정중하게 투쟁하는 데 실패해 왔다"4)는 역사를 철저히 성찰해야 한다.

이번에 정권이 바뀌면 정의가 실현되리라는 달콤한 환상과 구호가 늘 투쟁의 본질을 망각하게 한다. 정권이 바뀌고 선거를 이겨도 부정의한 현실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이 투쟁에 결집하느라 소홀히 하고 망각했던 다른 부정의와 차별이 여전히 남아 있다. 오히려 진정한 투쟁은 혁명이 이루어진 다음 날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진정한 투쟁이란 '혁명'이 아니라, 혁명의 성공 이후 도래할 수많은 갈등과 고뇌를 비판과 대화를 통해 소통하고 존중해 나가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상대방을 적으로 간주하고 자신만의 논리에 갇혀 정의와 의를 주장하기보다는, 상대방 논리를 되새겨 보고 자신의 관점으로 비판할 것은 철저히 비판하고 수용할 것은 적극 수용하는 태도가 민주주의에서 중요하다고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우리는 선거 때마다 '네거티브 캠페인'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다. 성찰의 힘은 약하다. 무기력해 보인다. 그렇기에 당장 눈에 효과가 두드러지는 '네거티브 캠페인'은 우리를 강하게 유혹한다.

단기적으로 효과가 높아도, 적과 아군의 이분법에 철저히 근거한 정치적 마니교는, 문제를 왜곡하고 본질을 가리는 효과만 거둘 뿐이다. 단기적 효과 뒤에 이어지는 긴 상처의 트라우마는 결코 쉽사리 치유되지 않는다. '아고니즘'이란 바로 성찰을 내면의 반성적 활동으로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성찰이 담지한 치열한 갈등과 번뇌와 고민을 회피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는 실패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아프게 받아들이고 진지하게 성찰하려는 태도를 포함한다.

사실 신학의 역사는 실패의 역사다. 신학의 실패란 곧 신앙하는 우리가 '하나님을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5) 이 실패를 돌아보는 것은 곧 '신학적 아고니즘'의 실천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을 실패했다'는 것과 하나님의 실패는 구별되어야 한다. 교회와 신학의 역사는 언제나 교회와 신학이 어느 순간 하나님의 뜻과 의지에 따라 살고 행동하는 데 실패했다는 말이다. 따라서 신학의 실패는 '하나님의 실패'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 사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삶과 생명의 한복판에서 절망적으로 하나님의 실패를 경험하기도 한다. 욥기서의 탄식과 불평이 바로 그것을 표현한다. 때로 우리는 '신의 죽음'이라는 절망적 사태를 겪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켈러는 우리가 결정적 물음을 던질 필요가 있음을 주지하게 한다. "누구의 하나님, 어떤 하나님"의 죽음을 묻는 것인가?6) 생태세(the Ecocene)7)를 포용하기를 실패한 우리의 무능 한복판에서, 우리가 '전능'하다고 믿는 하나님의 실패를 우리는 목격하며, 이러한 하나님의 실패를 더 이상 교리적으로 신학적으로 변명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실패하시는 하나님은 실패하는 세계를 어둡게 가리는데, 바로 이 실패하는 세계의 도식 속으로 하나님은 세속화되었다"8)는 점을 유념하는 것이 중요하다. 백인 남성 이미지의 전지전능하고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로고스 하나님 이미지와 개념은 우리 인간이 그분을 우리 이미지와 개념으로 세속화한 것이라는 말이다. 생태계와 지구 시스템의 실패와 붕괴는 다름 아닌 "인간의 실패"9)를 조명하고 있으며, 따라서 인간 문명의 찬란한 측면을 정당화해 왔던 신학의 붕괴와 실패를 가리킨다.

인간 문명이 실패하고 붕괴해도, 이 지구 생태계에 사는 생명의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며, 성서는 전체 세계의 종말을 가리키지도 않는다. 인간이 만들어 낸 제국주의적 문명의 붕괴와 종말을 예고할 뿐이다. 문명의 바로 지금 여기의 자리에서 우리는 이 신학의 실패를 부둥켜안아야 한다. 우리(신학과 교회)의 실패를 또다시 그럴듯한 변명(justification)으로 포장하기보다는 말이다. 기독교의 종말론은 바로 우리의 실패를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학은 "그 자신의 실패들을 품은 채 신앙을 지켜 나갈" 수 있을 것인가?10) 실패는 종말이나 패배가 아니다. 오히려 켈러는 사무엘 베케트를 인용하며,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보다 낫게 실패하느냐"(how to fail better)11)라고 역설한다. 곧 실패들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꿈꾸어 나갈 수 있는 희망의 힘을 의미할 것이다. 이 "(성공)보다 나은 실패가 전체 세계를 그 어깨 위에 짊어지고 나간다."12)

우리가 '하나님의 실패' 혹은 '하나님의 죽음'을 말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의지와 생각이 우리 세계 속으로 "물질화하는 데"(materialize) 혹은 성육신하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만일 하나님이 도래하는 데 실패했다면, 그것은 우리가 언제나 이미 하나님을 실패해 왔다"13)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곧 하나님 형상인 우리의 실패를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육화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실패는 종말이나 패배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실패하느냐는 문제이다. 실패를 통해 더 나은 신학이 도래할 동기가 부여된다면, 그 실패는 결코 신학의 패배가 아니다. 역설적으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신학이 중요하다. 신학이 하나님을 성공적으로 설명하고 해명해 왔기 때문이 아니라, 실패해 왔기 때문에 그 실패들을 통해 시대에 맞는 더 나은 설명들을 추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기에 그 실패들은 성공보다 나은 실패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카푸토는 "하나님은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장하신다", 즉 "하나님은 존재하기를 (고집스럽게) 주장하신다"고 표현한다.14)

곧 수없이 거듭되는 실패 속에서도 우리가 하나님나라를 믿고 그의 실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장하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과나 업적은 우리 편이 아니다. 하지만 왜 내가 아직도 사람을 사랑하는지, 아직도 왜 이 세계를 사랑하는지는 '하나님의 신비'에 속하는 듯하다. 아직도 사랑이 살아 있으니 말이다.

기후변화 시대에
지구와 정치와 신학을 연결하며
투쟁하는 신학, 꼽추15) 신학

실패를 패배와 좌절이 아니라 '(성공)보다 나은 실패'(failing better)로 만들어 나갈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긴급하고 적절한 사례는 바로 기후변화와 지구온난화일 것이다. 최근 지구온난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시스템이 되어 가고 있어서, 팀 모턴(Tim Morton)은 이를 "초객체"(hyperobject)16)라 부르기도 한다. 지구온난화는 시스템적 현상이어서, 우리가 전통적으로 인식하고 알아 왔던 '대상'(object)이 아니지만 주체와 구별된 대상적 행위를 보여 주며, 수동적 관찰 대상을 넘어 스스로 자기 행위성을 갖는 것처럼 행위하기에 '대상'對象이 아니라 '객체'客體라 번역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 초객체로서 지구온난화는 스스로 하나의 대상이나 객체가 아니라 수많은 하위 행위 작인들이 모여 이루어 내는 '효과'이지만, 그렇다고 하위 요소들로 환원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데카르트의 정신과 몸의 이분법적 모델에 기반하여 구성한 주체/대상의 도식이 이제 더 이상 현상을 분석하고 그려 보는 데 적절하지 않음을 매우 잘 예시해 주고 있다. 주체든 객체든 어떤 현상들은 행위 주체성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으며, 이는 지구온난화, 태풍, 오염, 방사능 누출 등의 현상에 해당한다.

그래서 팀 모턴은 그런 것들이 그 자체로 "우리의 사물들에 대한 개념 바로 그것을 물리치는 하나의 사물(a thing)이 되었다"17)고 표현한다. 칸트가 그 자체로는 우리가 도달할 수 없다고 말했던 그 사물(Ding an sich)이 이제 인간이라는 도시 문명에 굴복하기를 거절하고, 자신만의 '언어'로 신호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혹은 이제야 우리는 그 사물의 신호를 알아차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이러한 사물들과 더불어 함께하는 "새로운 정치적 행동주의"가 필요하다고 윌리엄 코널리는 주장하면서, 이를 "선거 정치를 훨씬 능가할 (중략) 민주적 투쟁(democratic militancy)"이라고 표현한다.18) 이 사물 정치는 정녕 상호 연관된 수많은 소수자의 음성과 몸짓들을 염두에 두는 정치적 민감성이 필요하다. 그동안 우리 선거 정치는 선거권을 갖고 있는 시민권자들 권리만을 대변하면서, 그러한 권리를 갖지 못한 인간 소수자들과 비인간 소수자들을 외면해 왔다. 지구나 생태계와 같은 '초객체들'은 말할 것도 없다.

사물 정치 시대에 소수자들을 위한 새로운 정치적 행동주의는 이제 인간중심주의와 유기체 중심주의를 넘어선 '존재들을 위한 신학 담론'을 필요로 한다. 고린도전서 1장 27-28절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신다. 신학은 바로 '약한 것들'과 '없는 것들', '미련한 것들'을 위한 정치적 행동이다. 있는 자들과 강한 자들과 머리 좋은 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주류(mainstream)에 포함되지 못한 소수자들(minorities)을 위해 말씀을 대변하는 정치적 행동주의이다. 이를 켈러는 "꼽추 신학"(hunchback theology)19)이라고 재치 있게 표현한다. 빅토로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디즈니 애니메이션 '노틀담의 꼽추'가 전복하는 아름다움과 추함의 위계질서를 떠올리게 하는 '명칭'이다.

신학은 그렇게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지 않는 실패·좌절과 더불어 머물면서("staying with trouble" - 도나 해러웨이의 문구다), 우리의 똑바른 신학(orthodoxy)의 위선을 폭로한다. 또한 발터 베냐민이 신학에 부여한 "난쟁이 꼽추"의 역할을 신학이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이 땅에서 장애 때문에 소위 '정상인'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존재들 삶에 함께할 수 있다면, 신학의 실패는 신학의 패배가 아니라 오히려 '(성공)보다 나은 실패'("better failure")일 것이다. 이제 '존재'는 인간 혹은 생물 혹은 유기체에 한정되지 않는다. 오염된 땅, 오염된 바다, 오염된 대기가 포함되어야 한다. 다윈의 지렁이 이야기는 그래서 이 시대를 위한 중요한 증언이 된다. '지렁이가 인간 역사를 발족시켰다.'

다윈이 관찰한 지렁이는 토양을 정화했고, 그 정화된 토양에서 식물들이 자라날 수 있었고, 작물을 풍성히 길러 낸 밭의 수확물로 인간의 도시 문명은 성장할 수 있었으며, 그를 통해 문화와 문명을 창출해 낼 수 있었다. 그래서 다윈은 지렁이가 "인간 역사를 발족시켰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우리는 인간이 전체 우주 과정의 주인이 되는 근대적 관점, 혹은 데카르트적 관점을 유지한 채로 더 이상 기후변화 시대를 위한 신학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찰스 다윈의 지렁이 이야기로부터 배우게 된다.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것,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지렁이가 오히려 우리 의식, 우리 문명을 발족하는 행위 주체로 바라볼 수 있는 신학, 그것을 지렁이 신학이라고 해야 할까?

1) 샹탈 무페(Chantal Mouffe)의 용어들을 번역하면서 'agonism'을 '경합주의'로 번역하는 용례가 있기는 하나, '경합'이라는 번역은 이해관계들이 담지한 갈등과 투쟁을 약화하는 어감이 있어 '갈등 투쟁'으로 번역한다.
2) Catherine Keller, Political Theology of Earth: Our Planetary Emergence and the Struggle for a New Public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8), 29.
3) Catherine Keller, Political Theology of Earth, 29.
4) Catherine Keller, Political Theology of Earth, 29.
5) Catherine Keller, Political Theology of Earth, 107.
6) Catherine Keller, Political Theology of Earth, 107.
7) 우리가 살아가는 현 시대를 지질학적으로 홍적세(the Pleistocene)의 마지막 시대로 표현하는데, 이 표현을 본떠 최근 "인류세"(the Anthropocene)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며, 켈러는 생태 위기의 시대를 표현하기 위해 "생태세"(the Ecocene)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것이 켈러의 신조어인지 혹은 다른 누군가의 표현을 빌린 것인지는 켈러의 책에 인용표기가 없어 확인할 수 없으며, 그래서 켈러의 표현으로 간주한다.
8) Catherine Keller, Political Theology of Earth, 108.
9) Catherine Keller, Political Theology of Earth, 108.
10) Catherine Keller, Political Theology of Earth, 119.
11) Catherine Keller, Political Theology of Earth, 122.
12) Catherine Keller, Political Theology of Earth, 123.
13) Catherine Keller, Political Theology of Earth, 125.
14) John D. Caputo, The Insistence of God: A Theology of Perhaps (Blooming: Indiana University Press, 2013), 27.
15) '꼽추'(hunchback)라는 말이 혐오의 어감을 담지한 말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이 혐오스러운 표현을 오히려 추구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추하고 혐오스럽고 기괴하다고 생각하는 존재와 사물들을 위해 생각하는 신학 말이다.
16) Catherine Keller, Political Theology of Earth, 37.
17) 참조 – Timothy Morton, Hyperobjects: Philosophy and Ecology After the End of the World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3).
18) Willam E. Connolly, The Fragility of Things: Self-Organizing Process, Neoliberal Fantasies, and Democratic Activism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13), 19.
19) Catherine Keller, Political Theology of Earth,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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