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을 기다리며 - 하나님나라 공공신학의 재형성> / 제임스 K.A. 스미스 지음 / 박세혁 옮김 / IVP 펴냄 / 386쪽 / 1만 8000원. 사진 출처 IVP

솔직하게 고백하자. 나는 이런 류의 글 – 소위 공공신학 또는 정치신학 - 에 약하다. 다방면의 책을 잘 읽지도 않으면서 무조건 사들여 모아 놓는('소장파'라 자위해 보자) 내 서재에도 이런 종류의 책들 가짓수는 보잘것없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일단 내 주요 관심사가 성경 주해와 교의신학이기 때문이다. 내가 저술한 네 권 중 세 권의 글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더 큰 관심사는 주해와 교의신학을 사용해서 교회를 섬기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목회자다. 신학을 사용해서 현실 세계에 발 딛고 살아가는 교회의 구성원들을 주로 설교나 상담으로 섬기는 사람이다. 그러한 내 역할이 나를 '정치'라는 단어에서 거리를 두도록 어느 정도 종용한다.

나는 정치와 거리를 둔
목사이고 싶었다

그렇다고 내가 현실 한국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지금도 내가 재미있게 듣고 있는 정치 관련 팟캐스트가 몇 개 있고, 중앙 일간지 몇 개의 사설은 꼭 챙겨서 보는 편이다. 사회적으로 커다란 관심을 사는 정치 이슈에는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고, 사회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동에 나선 일들 – 예컨대 많은 국민이 광장에 나간 일들 – 에서 빠져 본 적도 별로 없는 것 같다. 철이 든(대체 언제 들었는지, 들긴 들었는지 헷갈리지만) 이후로는 투표해야 하는 날에 투표장에 가지 않은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사회운동가인지 목회자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사람이 되고 싶지 않고, 사회 특정 구성원들과 현직 대통령에 대해 저주에 가까운 말들을 쏟아부으며 어그로(?)를 끌고 있는 목사(한*총의 그분이 떠올랐다면 틀리지 않았다)는 더더욱 되고 싶지 않다. 나는 그냥 목사이고 싶다. 여기서 조금 더 바란다면 목사 앞에 "마음이 따뜻한"이라든가 "성경과 신학에 익숙한" 정도가 붙었으면 한다. 그것이 나에게 '정치'라는 단어를 드러내지 않도록 조심하게 만드는 이유를 제공한다. 소위 '정치적인'이라는 수식어는 절대 붙이고 싶지 않다. 이는 우리 교회에 정착한 많은 청년이 "제가 떠나왔던 전 교회 목사님은 설교 시간에 정치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어요!"라는 불평을 늘어놓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전 교회 목사님들은 대체로 (극)보수적 언사를 하시는 분들이었지만, 개중에는 드물게 진보적 언사를 늘어놓는 분들도 계셨다. 어쨌든 우리 교회로 이민 온 청년들은 둘 다 싫어했다. 이유는? "교회를 온 것이 아니고 정치 집단에 온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나는 신학적으로 개혁주의 전통에 속한 사람이지만, 우리 전통이 앞에 붙고, 뒤에 '공공신학'이라든지 '정치신학'이라는 말이 붙은 동네로는 잘 가고 싶지 않았다. 워낙 이쪽에 관심이 많았던 분이 망가지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작년 내내 교계 신문에 오르내렸던, 지금은 실형을 살고 나오신 모 기독교 대학교 총장님(이 정도면 대체로 누군지 알겠지)께서도 아브라함 카이퍼와 개혁주의 정치신학에 상당히 조예가 있다고 하지 않던가. 해서 다짐했다. "조예도 없고 관심도 두지 않겠다. 나는 그냥 목사가 되겠다!"

하지만 교회는 '그냥 교회일 때'
이미 강력한 정치 세력이다

무슨 넋두리가 저리 긴가 싶을 것이다. 이렇게 나에 대한 배경을 염두에 두면, 내가 제임스 스미스의 <왕을 기다리며 - 하나님나라 공공신학의 재형성>(IVP)에 적힌 이 문장을 읽고 얼마나 탄복했을는지(또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을는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정치적 실천과 개입은 기독교 예배라는 '실천에 내재되어 있다.' 기독교 예배는 이미, 본질적으로 정치적 행동이다. 말씀 선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을 위한 해방 서사의 예행연습, 카이사르의 복음에 맞서는 복음 선언이다. 주의 만찬은 '없는 것들'(고전 1:28)조차도 왕의 식탁에 앉도록 초대받는 혁명적 식사다. 매주 열리는 성도의 모임은 그들이 지닌 천상의 시민권을 시연하는 의례다."

무슨 소리인가? 제임스 스미스는 초반에 상당히 공을 들여서, 정치가 종교적이라는 것을 입증한다(사실 스미스는 이미 이전 작품들에서 세상만사가 종교적이며 예전적(liturgical)이라는 점을 여러 차례 강변했다. 심지어 쇼핑몰마저도!). 민주주의는 공론의 장이며, 여기에는 함께 모여 세운 법이 있다(헌법과 법률). 국가를 나타내는 여러 상징과 의례가 있고, 공교육은 그 국가에서 살아가는 시민이 추구해야 하는 삶의 방식을 지속적으로 가르친다. 헌법은 자유, 인권, 행복 추구와 같은 교리들을 선포한다. 정치인들은 서로 자기들이 그 교리를 더 정확하고 완전하게 구현해 내고 있다고 사람들을 선전하며, 사람들은 정치인들을 대할 때 (누구나 인정하듯) 일종의 메시아로 대하든지, 아니면 사탄으로 대한다. 즉, 정치는 종교적이다.

교회는 어떠한가? 일단 교회는 추구하는 정치 시스템 자체가 다르다! 교회는 왕정을 추구한다. 사람들은 교회에서 그 왕정이 가지고 있는 헌법과 법률(성경에 기록되어 있는)이 지닌 의미에 대해 자세한 해설을 듣고, 그 왕이 한 일과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들으며, 따라서 왕국의 시민으로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듣는다. 그런데 이 일을 매주 한다. 아니, 매주도 모자라서 '주일'에만 교회에 출석하는 삶을 '선데이 크리스천'이라고 부르며 좋지 않은 삶의 형태라고 교육받는다. 이보다도 더 강력한 정치 집단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내가 알기로, 현재 대한민국의 공당 중에 당원들에게 이 정도로 헌신과 참여를 요구하는 정치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교회는 '그냥 교회일 때' 이미 가장 강력한 정치 세력이다. 목사 역시 '그냥 목사일 때', 다시 말하자면 성경을 자세히 강해하고, 성경에 따른 기독교적 삶을 요구하며, 매주 예배를 인도하고 상담하며 교회 내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그냥 목사일 때 이미 정치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으로서, 누구보다 더 강력한 추종자들을 전 세계에 거느린 정치 지도자이다. 이러한 통찰이야말로 제임스 스미스가 내게 준 소중한 가르침이다.

'예수'라는 정치 지도자는
복음의 옷을 입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교회라는 정치 집단이 섬기는 이 '왕'은(기본적으로 교회는 왕정을 추구하니 말이다), 복음의 옷을 입고 있는(이는 칼뱅이 쓴 표현이다) 왕이라는 것이다. 무슨 소리인가? 그 왕은 다른 도성의 왕들과는 달리, 찍어 누르고 압제하며 통치하는 왕이 아니다. 자신을 낮추고 서민들과 함께 먹기를 즐기고 포도주를 탐하며 함께 다니고 행하며 보이고 가르치는, '섬기는 왕'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압제적/탄압적인 사악한 정치 세력을 전복하고 무너뜨리기 위해 가장 약한 모습으로 나아가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음으로, 혁명을 성공시킨 왕이다! 왕이 죽었다가 부활할 때, 일상적으로 통용되던 세상의 법칙 – 즉 약육강식과 지배/피지배의 법칙 – 은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교회라는 정치 집단은, 이 왕이 행한 일과 하고 있는 일을 계속 기리며 높이고 가르치며 적용한다. 예컨대 우리 교회는 매주 성찬을 하는데, 성찬상을 차려 놓고 나는 항상 '그 왕'이 자격 없는 죄인들에게 아무런 차별 없이, 조건 없이 사랑을 베푼다고 선포한다. 그때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속 문화를 향해 선전포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을 한다. 세상은 조건과 자격, 신분에 맞추어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가. 교회는 그 왕 – 그리스도 – 이 행한 모든 일을 가리켜 '복음'이라고 부르는데, 그 왕은 다름 아닌 복음을 입고 있는 왕이다. 따라서 신민들은 (놀랍게도) 왕정 아래 살면서도 민주정에 있는 시민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리며, 왕정 아래 살고 있는데도 온갖 차별이 철폐된 모습을 보고, 왕정 아래 살고 있는데도 더 많은 인권을 보장받는다. 아이러니하지 않는가.

이것이 스미스가 내게 준 통찰이다. 그는 복음이 선포되고, 복음적 삶을 형성하는 예전이 강력한 정치적 행동이라고 내게 말해 주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복음을 중심에 둘 수 있다. 여기서 (묘하게) 복음의 언어를 부끄럽게 여기며 현실 참여를 강조했던 (왜곡된) 개혁주의 공공신학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실마리가 있다. 또한 현실 참여를 배제하고 세상과의 단절을 추구하는 근본주의적 기독교의 한계 역시 넘어설 수 있다. 왕국의 신민들이 발 딛고 사는 어디서나 왕국의 원칙(복음)대로 살아간다면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정치 영역에서 해야 할 말과 행동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정치인(목사)이 정치 지도자의 훈시를 제대로 받들지 않고 있다면? 이는 공당이 자기 당의 이념을 무시하고 사익을 추구할 때(왠지 한국의 공당에서는 흔한 일처럼 보이겠지만) 벌어지는 일과 똑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정치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고도로 정치적이기

어떤 정치인(목사를 가리킨다)은 자신이 왕인 것처럼 행동한다. 어떤 정치인은 자기가 속해 있는 정당의 이념과 원칙(복음을 가리킨다)을 잘 모른다. 그래서 이념과 반대로 행동하고 말하기 시작한다. 더 나아가 자신이 속한 정당의 이념이 아닌, 다른 정당의 이념을 가지고 와서 당원들(성도들을 가리킨다)에게 가르치기 시작한다. 예를 들면 이런 말들이다.

"기독교는 공산주의와 반대예요. 현직 대통령은 공산주의자고 빨갱이이고 적그리스도예요."

사실과 다르기 때문에도 문제가 있는 말이지만, 이러한 문장에서 당원들은 묘하게 우리 정당과 다른 이념을 정치인이 설파하고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챈다. 하지만 말은 이렇게 하게 된다.

"우리 목사님은 설교 시간에 정치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해. 난 그냥 교회에서 하는 성경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또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난민들 다 이슬람이야. 추방해 버려야지."

이슬람이 당의 당헌·당규(성경을 가리킨다)에 비추어 진리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마저도, 이러한 발언은 우리 당의 이념과는 다른 이념을 설파한다고 느끼게 된다. 우리 왕은 모든 자들을 구원해 주시진 않지만, 모든 사람을 잔치에 초대하라고 하신 분 아니었나.

재미있게도, 사람들이 목사를 향해 "그는 너무 정치적이야!"라고 불만을 표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오히려 "그는 우리 정당의 가치와 이념을 따르지 않아!"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했기 때문이다. 오래된 철학자들이 말했듯 모든 인간은 정치적이고, 예수라는 왕을 섬기는 교회는 어느 집단보다도 강력하게 정치적이다. 문제는 정치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오히려 '어떻게' 정치적이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왕을 기다리며>라는 책 도처에서 주장하는 사상이며, 나와 같은 목사들이 새겨들어야 하는 조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의 제목을 다시 물어보자. 목사는 정치인인가? 그렇다. 그렇다면 정치적 발언을 해야 하는가? 이미 하고 있다! 그것이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 정치적으로 보이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복음에 맞게 말하면 된다. 그렇다면 복음에 익숙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목사의 설교가 별로 정치적이지 않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왕을 섬기고 있고, 섬기려 하며, 완성될 혁명을 기다리고 있다. 즉, 이미 공공 영역에 나와서 정치적 행동과 말을 하고 있다. 그것도 우리 당의 이념. 즉 '복음'에 맞게 말이다. 이것이 제임스 스미스가 우리에게 던지는 소망이다.

이정규 / 시광교회 담임목사, <야근하는 당신에게>(좋은씨앗), <새가족반>(복있는사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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