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생활이라는 것이 녹녹한 것은 아닙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신앙 생활을 '경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경주는 원어로 보면 '전쟁' 혹은 '투쟁'이라는 격렬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경주한다'는 동사도 '무언가를 얻기 위하여 온 힘을 쏟는다'는 뜻입니다. 신앙 생활은 영적 전쟁터에서 진정한 승리를 얻어내기 위해 온 힘을 쏟는 치열한 삶인 것입니다. 교회는 이 점을 잘 가르쳐주지 않으면 신앙은 형식주의적인 율법 준수만을 강조하는 외식적인 종교로 변질됩니다.

히브리서를 쓰게 된 동기도 이러한 위험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서 수신자들의 문제점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여전히 젖을 먹어야 하는 어린아이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는 점입니다. 정의(dikaiosune:righteousness 혹은 justice)의 말씀을 경험한 성숙한 사람들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치열한 훈련을 통해 선과 악을 예리하게 분별해내는 지각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히 5:12∼14). 그 결과 형식적 율법주의 신앙으로 돌아가라는 압박과 유혹에 힘없이 노출되고 있었습니다(히 6:4∼6).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끊임없이 그림자인 율법을 넘어 참된 본체이신 예수님을 붙들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히 10:1 / 12:2). 그리고 참된 신앙의 경주를 경주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의 경주를 버리고 상대적으로 더 쉬운 율법주의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위험성에 항상 노출되어 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 분위기를 보면 대체적으로 십일조를 비롯한 각종 헌금, 주일성수, 금주 금연 그리고 교회 직분을 성실하게 감당하기만 하면 그밖에 다른 것은 적당히 해도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는 신앙의 경주란 그런 형식적인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헌신을 요구한다는 점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그 경주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밀을 친절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현실에서 신앙의 경주자는 외롭다

신앙의 경주를 달린다는 것은 외롭습니다. 지지자와 응원자가 별로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형식적이고 율법주의적 신앙 생활은 대중적 지지를 받기 마련입니다. 상대적으로 더 쉽기 때문입니다. 물론 십일조를 비롯해서 헌금 잘 내고, 교회 주일예배 꼬박 꼬박 참석하고, 교회에서 맡은 직분들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것만도 엄청나게 힘든 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잘하면 집사, 권사 그리고 장로가 되어서 권위도 생기고 교회 질서가 잡혀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정의의 말씀을 진정으로 깨닫고 우리 삶의 전반에 걸쳐 악을 물리치고 선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그보다 훨씬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런 삶을 일컬어 경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조차 진정한 신앙의 경주를 달려가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현실 세계에서 경주자는 늘 혹독한 외로움에 시달리기 마련입니다. 이 외로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경주자는 너무 지치고 힘들어 결국 쓰러지고 맙니다. 히브리서 수신자들도 그런 위험에 봉착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경주자들에게 놀라운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경주자 여러분! 여러분은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눈을 크게 떠 한번 관람석을 둘러보십시오. 아벨의 얼굴이 보이죠? 아! 아브라함도 저기 있네요. 모세, 기드온 그리고 다윗도 보이지 않습니까? 너무 많아서 도저히 셀 수가 없습니다. 구름 떼처럼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네요. 그들은 신앙의 경주에서 이미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들이 여러분을 열광적으로 응원하는 우렁찬 함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그 함성은 시청 앞 광장과 광화문 네거리에 울려 퍼진 월드컵 응원 소리보다 더 크지 않습니까? 할∼렐루야! 짝짝∼짝 짝짝!"

이것이 바로 홈그라운드의 이점이라는 것입니다. 유럽 국가들의 프로축구 리그에서도 홈 경기에서 이길 확률이 원정 경기에서보다 50%가 높다고 합니다. 한국팀은 이번 월드컵 경기에서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톡톡히 맛보았습니다. 의학 전문가 견해에 의하면, 열렬한 응원을 받는 경우 선수들의 몸에서 남성 호르몬이 평상시보다 50∼70%가 더 분비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순발력과 체력이 순간적으로 상승한다고 합니다. <뉴스위크>는 월드컵 평가 기사를 실으면서 한국팀을 '지칠 줄 모르는(indefatigable) 팀'이라고 묘사했습니다. 물론 그동안 해온 체력 훈련의 효과가 나타난 것이죠.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700만 명까지 길거리로 뛰쳐나온 국민들의 열광적인 응원이었습니다.

홈그라운드에서 뛰고 있음을 보아라(1상)

그러므로 신앙의 경주자들은 자신이 홈그라운드에서 뛰고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홈 팬들을 육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세상 한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이다 보면 어느새 현실에서 낙오자가 되어 초라해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외골수, 지혜가 없는 사람, 혼자 잘난 척하는 사람, 부정적인 사람, 비판적인 사람' 등의 딱지가 붙어 다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난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때 김근태 후보가 과거의 선거자금과 관련해 양심 선언했다가 오히려 부메랑을 맞고 중도 하차할 수밖에 없었던 냉혹한 현실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해프닝은 빙상의 일각일 뿐입니다. 지난 3월 어느 조사에 의하면, '법대로 사는 사람은 손해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1992년에는 73.8%였는데, 2001년에는 82.5%로 늘었다고 합니다. '능력보다는 편법으로 성공한 사람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70% 대에서 85.7%로 증가했다고 합니다. 이런 현실 가운데 교회마저 신앙의 경주를 힘들다고 포기해 버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신앙의 경주자들은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도 신앙의 경주자는 홈그라운드에서 뛰고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가 아람군대의 포위망에 둘러싸인 때가 있었습니다. 아침 일찍이 그 사실을 발견한 그의 종은 엘리사에게 달려와 깊게 탄식하며 보고했습니다.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그러나 엘리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엘리사는 그의 종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신들과 함께 한 자가 아람군대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입니다. 엘리사는 기도를 통해 종의 눈을 뜨게 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종도 불(火)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해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엘리사의 종처럼 기도의 능력을 통해 영적 눈이 열려야 합니다. 우리가 경주하고 있는 운동장의 관람석에 앉아서 우리를 구름 떼처럼 둘러싸고 응원을 보내주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에 앞서 힘든 믿음의 경주를 마치고 승리한 믿음의 선배들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축복을 받은 사람도 있고(히 11:33∼34), 결국 고생하다가 생을 비참하게 마감한 분들도 있습니다(히 11:35∼40). 그럼에도 그들도 승리자인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고 최후의 영광에 동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허황한 꿈이 아닌 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처절하게 실패했지만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행 17:31). 우리를 둘러싼 응원단들을 믿음의 눈으로 봅시다. 우리는 홈그라운드에서 뛰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잊지 맙시다. 우레 같은 함성소리를 들으며 지칠 줄 모르는 경주자가 되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죄의 짐을 벗고 몸을 가볍게 하라(1하)

이것은 경주하는 사람의 기본입니다. 최근에는 과학이 발전해 공기 저항을 최소화하는 옷을 만들어 입기도 합니다. 신앙의 경주자들이 자신의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무거운 짐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본문에서 '모든 무거운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의 문맥이나 성경 전체의 흐름을 볼 때 경주자들의 발걸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염려와 근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이 경기를 완주해낼 수 있을까? 적들과 싸워 이길 수 있을까?" 이런 염려들이 엄습해오면 우리는 자신감을 잃고 머뭇거리다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주저앉아 버리게 됩니다.

이번 월드컵 경기 중 8강 전에서 만난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좋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날 스페인의 호아킨은 무서운 스피드와 힘으로 한국을 위협하면서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승부차기 네 번째 선수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공을 차기 전 화면에 비친 그의 얼굴에는 한국 선수들의 기세와 이운재 골키퍼의 침착함에 눌린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힐끗 힐끗 초점 없이 다른 데를 쳐다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염려와 근심의 빛이 완연했습니다. 자신감을 가지고 꿈쩍도 하지 않는 한국 골키퍼 앞에서 어느 방향으로 찰까 머뭇거리며 발을 끌다가 그만 힘없이 공을 툭 차는 바람에 골키퍼 손에 걸리고 만 것입니다. 신앙의 경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염려와 근심의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고 자신감을 회복해야 합니다. 구름 떼 같은 응원단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데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믿음에 기초한 지성의 힘으로 사탄이 주는 부정적 감정들을 과감히 떨쳐 버려야 합니다. 그럴 때 적의 기세를 꺾어 버릴 수 있습니다.

둘째, 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죄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고 의지하는 마음과 행동 모든 것을 말합니다. 이런 죄는 우리를 얽어맵니다. 경주자의 발을 꽁꽁 묶어 한 걸음도 떼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의 에너지를 다 앗아가서 신앙의 경주를 할 힘을 남겨 놓지 않습니다. 죄는 달콤한 몸짓으로 우리를 유혹해 경주를 포기하고 절제되지 못한 즐거움에 빠지게 한 다음에(마 4:1∼11), 우리가 정신을 차릴 만하면 안색을 확 바꾸어 공격의 화살을 쏩니다(계 12:10). '너는 절망적인 죄인이야! 무슨 낯짝을 들고 십자가 앞에 다시 나가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빌겠느냐? 너는 그냥 그렇게 괴롭게 살다가 죽는 것이 싸다 싸!' 이러한 죄의 함정에 빠지면 우리는 영락없이 패자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죄를 벗어 버리는 것은 승리의 필수 조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죄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은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만을 바라보라고 권면합니다.

예수님만을 바라보아라(2∼3)

여기서 바라본다는 것은 초점을 잃은 듯이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바라보고 있었던 것에서 확실히 눈을 떼서 예수님께 초점을 최대한 선명하게 맞춘 다음 눈을 부동으로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다시는 한 눈을 팔지 않는 것입니다. 즉 "주님, 당신만이 저의 도움입니다. 당신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저는 한 발자국도 전진할 수 없습니다. 꼭 도와주셔야 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승리를 위해 이렇게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분일 뿐 아니라 믿음을 완전하게 만들어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경주에서 실패하는 이유는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거나 다른 사람들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불완전함을 깨달을 때 우리는 곧장 예수님께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가 만 번 똑같은 죄를 짓고 주님께 나아가 용서를 빌면 주님은 만 번 용서해주시고 만 한번 째의 새로운 기회를 주시는 은혜로운 분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은 없습니다(롬 8:1∼4). 그리고 이미 우리 안에 계신 주님 자신이신 성령의 능력에 의존해 말씀을 사모하고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더욱 성령 충만을 덧입어 힘을 다해 죄와 싸워 이기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롬 8:4∼14 / 골 1:29).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성령이 자동으로 죄를 격퇴해주는 것도 아니고, 우리 노력만으로 죄를 이겨내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믿게 되는 과정이 신비하게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자유로운 의지적 결단을 동반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신비로운 특권이고, 이 특권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기까지 실패와 극복을 거듭하는 훈련의 과정을 인내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고난과 승리의 삶을 바라보며 큰 격려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추종자들이 배반하고 도망친 가운데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힘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이야말로 최대의 실패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끄러운 실패 뒤에 따라올 승리의 기쁨을 내다보시고 모든 것을 참아내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의 승리를 차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을 바라볼 때 죄와 싸우다 지친 우리들은 다시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경주를 하다가 당하는 어려움과 외로움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희망이 솟구쳐 오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혹 보다 쉬운 형식적 율법주의 신앙에 매몰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진정한 신앙의 경주에 뛰어드시기 바랍니다. 혹은 신앙의 경주를 하다가 너무 외롭고 힘들어 주저앉아 있지는 않습니까? 응원단들과 예수님을 바라보고 다시 힘을 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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