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므리가 저지른 죄
(기원전 883~기원전 872)

거듭된 쿠데타가 불러온 혼란 가운데서 왕위를 찬탈한 오므리(Omri)는 3대에 걸쳐 왕위를 보존할 수 있었던 최초의 북왕국 왕가를 만들었습니다. 오므리와 아합은 성경 외 문헌에 언급되는 최초 인물이기도 합니다(열왕기상 16장).

오므리는 디르사에서 6년 동안 다스린 뒤, 세겜 북동부 사마리아에 새로운 수도를 세웠습니다. 통신과 무역을 장려하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높이 90m 산 위에 세워진 사마리아는 방어하기에 좋고, 다른 도시들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에브라임 고지대의 비옥한 지역으로, 서쪽으로 40km 지점에 해안 고속도로와 지중해에서 산지로 들어오는 주요 간선도로 하나를 굽어 보고 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 위치가 페니키아와 광범위하게 접촉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었을 것입니다.

오므리와 페니키아

여러 면에서 오므리 왕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두로와 긴밀한 관계였습니다.

오므리는 두로의 왕 이토바알(Ittobaal), 곧 성서의 엣바알(Ethbaal, '바알의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아들 아합을 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시킵니다. 그들의 결혼은 번영하는 지중해 상업 도시들과 맺는 외교적·상업적 관계를 강화하여 육지로 둘러싸인 이스라엘 도시들에 상당한 부를 안겨 주었습니다.

페니키아는 중부 산간 지방을 통과해 요단 동편으로 가는 통로에 있었습니다. 요단 동편으로 대상隊商들이 남쪽에서 사치품을 싣고 '왕의 대로'를 통해 올라왔습니다. 왕의 대로는 아카바만 북단에서 다메섹까지 요단 동편 고원 변두리를 따라 남북으로 뻗어 있는 도로입니다("왕의 큰 길", 민 20:17, 21:22). 대상들은 부의 원천이었기에 그들이 다메섹에 이르기 전 방향을 바꾸게 하는 것이 두로와 다른 페니키아 항구도시들에 이익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이를 위한 최상의 경로는 이 지역 지형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그 경로는 왕의 대로를 통해 오다가 라못-길르앗 근방에서 방향을 바꾸어, 와디 야비스(Wadi Yabis)를 통해 요단 계곡으로 내려왔다가 건너편으로 가서 벳스안과 이스르엘 계곡을 통과한 다음, 아코 평원으로 나와 두로와 다른 페니키아 항구도시에서 끝났습니다.

아코 평원에 있는 호르밧 로슈 자이트(Horvat Rosh Zayit), 벳스안 바로 서쪽에 있는 텔 아말(Tell 'Amal), 요단 계곡에 있는 텔 엘-함마(Tell el-Hamma) 등의 도시에서 발견된 전형적인 페니키아 도기류를 통해 기원전 10세기와 9세기에 이 경로를 따라 페니키아가 동쪽으로 확장한 것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됩니다. 이런 유적의 존재는 그 지역에 대한 페니키아의 직접적 지배를 보여 준다기보다, 이 경로가 지나가는 영토를 소유한 이스라엘과의 정치적 우호 관계와 상업적 협력을 의미합니다.

같은 시대 이스라엘 도시들도 비슷한 유형을 보여 줍니다. 이 도시들에서도 수입된 페니키아 도기류가 상당수 나왔습니다. 페니키아에서 수입된 건축 자재를 비롯해, 마름돌 석공술(ashlar masonry), 원아이올리우스식 기둥머리(Proto-Aeloic capitals), 그리고 상아 조각술 등의 페니키아 건축 공법을 이용한 흔적을 보여 주는 건물 유적들도 나왔습니다.

10세기부터 8세기 사이의 것으로 추정되는 페니키아 양식 상아 장식들이 이스라엘과 유다의 많은 유적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사마라아 왕국에는 조각된 상아로 만든 상감象嵌 재료가 500점 정도 나왔습니다. 이는 사마리아에 "(아합이) 건축한 상아궁"(왕상 22:39)과 사마리아를 향한 아모스의 예언에 나오는 '상아궁'과 '상아상'을 떠올리게 합니다(암 3:15, 6:4).

사마리아 언덕.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오므리 시대 고고학

- 사마리아성

이곳에서 행정 관련 히브리어 오스트라카와 페니키아 상아 조각품뿐 아니라, 기념비적 건축물들이 발굴되었습니다. 오므리가 세운 사마리아성에서 발견된 사마리아 오스트라카는 사마리아 산지 북부의 고대 정착지들에 대한 많은 정보를 줍니다.

오스트라카에는 므낫세 지파 자손들 이름과 성읍 이름이 나타납니다. 이 가운데에 슬로브핫의 딸 이름 중 노아와 호글라가 있습니다. 디르사는 이 다섯 명의 딸 중 하나로 오스트라카에는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라카에 언급된 호글라의 성읍들이 세겜의 북서에, 노아의 성읍들은 사마리아의 북서쪽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 디르사는 세겜의 동북쪽에 있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디르사라는 성읍 이름도 므낫세 지파 정착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디르사는 기원전 8세기까지는 번영을 누린 도시로 이곳에서 발굴된 부자들의 집들과 가난한 이들의 움막집들의 대조는 아모스 선지자의 비판을 연상시켜줍니다(암 5:10-13).

- 메사 비문 또는 모압 석비(Mesha Inscription, Moabite Stone)

1868년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던 독일 선교사 클라인(F. A. Klein)이 요르단 디반(Dhiban, 고대의 Dibon)에서 발견한 것으로, 이 비문은 성서의 히브리어와 매우 가까운 모압어로 기록되어 있으며, 열왕기하 3장 4-27에 등장하는 모압 왕 메사의 공적을 열거한 것입니다.

"모압 왕 메사는 양을 치는 자라 새끼 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치더니(왕하 3:4)."

여기에서 오므리 왕조에 관한 최초의 성서 외적 기록이 발견되었습니다. 모압 석비 연대는 대략 830년입니다.

"나는 메사, 그모스의 아들, 모압 왕, 디본 사람이다. 이스라엘 왕 오므리에 관해서 말하면, 그는 여러 해 동안 모압을 억압하였다. 이는 그모스가 자신의 땅에 진노했기 때문이다. 그를 계승한 아들도 '나는 모압을 억압하리라'고 말했다. 내 시대에 그가 (그렇게) 말했으나, 나는 그와 그의 가문을 무찔렀고, 반면에 이스라엘은 영원히 멸망당했다! 오므리가 메드바(Medeba) 땅을 점령했고,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이스라엘)이 그곳에 거주했다. 그의 아들 통치 기간의 절반 동안도 (이스라엘이 그곳에 거주했음을 고려하면 모두) 40년 동안 (메드바가 이스라엘에 의해 지배당했다). 그러나 내 시대에는 그모스가 그곳에 (돌아와) 살게 되었다. 갓 사람들이 아다롯 땅에 항상 살았고, 이스라엘의 왕도 그들을 위해 아다롯을 건설했지만, 나는 그 마을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하략)"

비문은 메사가 이스라엘 왕국에 반기를 들고 영토를 단계적으로 넓혔으며, 오므리와 그의 아들 아합을 이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비문을 통해 얻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1) 오므리는 오랫동안 모압을 지배했다.
2) 오므리는 메드바(Medeba)를 점령했다. 오므리는 메드바에 거주하였는데, 오므리 아들까지 모두 40년 동안 지배했다. 오므리는 북부 모압 중앙 고원지대 서쪽 산마루에 있는 특정 지역 거주민들, 곧 옛 갓 지파 사람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였다.
3) 메드바의 주요 성읍은 아다롯이었다. 이 이름을 가진 성읍은 아다롯과 아다롯-소반(민수기 32장 34-35, 갓 자손은 디본, 아다롯, 아로엘, 아다롯소반, 야셀, 욕브하와) 두 곳이다. 이 둘의 이름을 가진 옛 유적지도 2개인데 키르벳 아타루즈(아다롯)와 루즘 아타루즈(아다롯-소반)로 불리는 이 두 유적지이다. 갓 지파 사람들을 위한 아다롯 건축은 모압이 이스라엘에 예속되어 있던 40년 동안 이루어졌다.

이렇게 오므리는 요단 동편의 남부 지역을 장악했습니다. 아랍 대상들을 다메섹으로부터 주로 벧-스안을 경유하여 이스라엘과 페니키아로 방향을 돌이키게끔 했으며, 양털·염소털을 풍부한 섬유산업에 필요한 채색 염료들을 대량으로 생산하던 페니키아에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오므리에 대한 평가

오므리가 많은 정치적 성과를 이루었는데도, 성서는 오므리를 신실한 왕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서가 얼마나 토라(율법)에 순종하는가를 기준으로 왕을 평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죄를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여 그들의 헛된 것들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왕상 16:25-26)."

오므리의 사마리아 건설은 짧지만 강력한 암시를 합니다.

"그가 은 두 달란트로 세멜에게서 사마리아 산을 사고 그 산 위에 성읍을 건축하고 그 건축한 성읍 이름을 그 산 주인이었던 세멜의 이름을 따라 사마리아라 일컬었더라(왕상 16:23-24)."

오므리가 사마리아를 자신의 수도로 삼기 전에 이미 이곳에는 기름 생산을 위한 마을이 있었고, 성벽으로 둘러싸인 지역과 중요한 공공건물도 있었습니다. 겨우 은 두 달란트로 사마리아를 구입했다는 말은 아마도 그 지역을 무력으로 강탈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의 아들 아합이 시돈 왕 엣바알(Ethbaal, '바알의 사람') 딸 이세벨과 결혼한 것으로 보아(왕상 16:30-31) 오므리는 자녀들에게 여호와 신앙의 신실함을 교육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 경우처럼 정략결혼은 정략 면에서는 유리했지만, 이스라엘의 신앙 근간을 흔들었으며 결과적으로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과 왕권의 부패를 불러오게 됩니다.

*팟빵 '에르고니아 라디오' 채널 바로 가기: http://www.podbbang.com/ch/12827
*관련 영상 바로 가기: https://youtu.be/HeDi0KbczPo
박태순 / 부천 새들녘교회를 섬기고 있으며, 신학 아카데미 에르고니아(http://ergonia.org)에서 신학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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