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로보암왕

열왕기서에는 북이스라엘 초기 40년에 관한 내용은 거의 없습니다. 대신 여로보암의 종교 활동과 관련해 부정적 이야기가 많습니다.

스레다(Zeredah, 에브라임 실로) 출신, 느밧의 아들인 여로보암은 행정 수완을 비롯한 능력 덕분에 솔로몬에게 주목받았습니다. 솔로몬은 그에게 요셉의 집(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 영토에 있는 강제 노역 집단) 부역 책임을 맡겼으나, 그는 반체제 관리자(왕상 11:26-28)로서 반란을 주도했습니다. 그가 솔로몬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되자, 이집트 파라오 쇼솅크 1세(시삭)에게로 달아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습니다.

이집트 시삭은 리비아 귀족(Lybyan nobleman) 출신으로 여로보암을 환대합니다. 이는 21왕조의 이집트가 남유다 예루살렘과의 화해 정책을 더 이상 고수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의미했습니다. 21왕조인 파라오 시아문(기원전 978~959년)은 이스라엘, 유다와 손잡고 블레셋을 대항하는 공동 전선을 구축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솔로몬이 죽자 여로보암은 이스라엘로 돌아와 세겜 협상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고(왕상 12장), 이스라엘이 두 왕국으로 분열하는 데 결정적 원인이 됩니다.

여로보암의 종교 정책

솔로몬에 이어 왕이 된 르호보암은 북쪽 지역 세겜에서 북부 지파 마음을 얻는 데 실패합니다. 세겜은 북부 지역 주요 장소로 여로보암의 수도가 됐습니다. 여로보암은 세겜에서 브누엘(길르앗의 도시)로(왕상 12:25), 그곳에서 다시 디르사(Tirzah, 세겜 북동부)로 옮깁니다. 역사학자들은 여로보암이 시삭의 침공을 피해 요단 동편으로 도망갔다고 보지만, 성서는 이에 대해 침묵합니다.

열왕기상 14장 17절에 암시돼 있는 것처럼, 여로보암이 왜 나중에 서쪽으로 돌아와 디르사에 수도를 세웠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디르사는 바아사(왕상 15:33), 엘라(왕상 16:8), 시므리(왕상 16:15)를 거쳐 사마리아가 설립된 오므리 6년(왕상 16:23)에 이르기까지 꽤 오랫동안 북이스라엘 수도였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여로보암의 수도에 관한 정보는 그가 단과 벧엘에 세운 종교 중심지들에 관한 자세한 보도와 분명한 대조를 이룹니다(왕상 12:26-33; 왕상 13:1-14:18). 이와 같은 대조는 열왕기서를 기록한 성서 저자의 관심이 신앙적인 부분에 집중돼 있었기에 여로보암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예언자 아히야는 벧엘과 단에 송아지 형상을 만든 여로보암을 비판하는데(왕상 14:6-16), 이는 출애굽기 32장 금송아지 전승을 떠올리게 합니다. 여로보암의 배교는 후대 왕들에 의해 지속돼 북이스라엘 혼란의 원인이 됩니다.

장-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 1732~1806)作,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는 여로보암 Jeroboam Offering Sacrifice for the Idol'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여로보암 시대 고고학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성전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는 모습과 다시 다윗 왕조 통치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두려워합니다(왕상 12:26-27). 그래서 남쪽 베델과 북쪽 단에 산당을 세우고, 두 개의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섬깁니다(왕상 12:28).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왕상 12:28)."

여로보암이 만들었다고 말한 황금 송아지는 아니지만, 단(Dan)에서 10세기 후반 것으로 보이는 유적이 발견됐습니다. 이것은 2m 너비의 돌로 된 커다란 블록들로 만들어졌으며, 성경에는 종종 "높은 곳"(high place)으로 번역됩니다(레 26:30; 왕상 12:31).

7개 심지가 있는 기름등잔, 뱀 모양 장식, 향단, 동물 뼈가 가득 찬 그릇, 진흙과 조약돌의 입상 등을 발굴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뱀은 특히 바알 숭배와 관련 있었습니다. 경사가 있는 현무암 슬래브가 있는 분지도 존재하는데, 아마도 물 정화 의식과 관련됐을 것입니다.

분열의 역사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의 분열은 200년 동안 이어집니다. 두 왕국의 역사 기록은 서로 겹치기도 하고 나뉘기도 하면서 두 왕국이 뗄 수 없는 사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비록 북이스라엘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주를 이루지만, 그들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한 형제임을 성경 기록자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려 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왕들을 향한 평가는 대부분 종교적 신실함에 달려 있었습니다. 경제와 정치적 평가는 이차적 문제였습니다. 성서 저자는 경고의 말과 개혁의 요구를 독자들에게 제시합니다. 성서 저자는 역사적 사실과 사료를 활용해, 여호와 신앙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역설하는 데 근본적으로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여호와 신앙은 분열된 두 왕국이 언젠가 다시 합쳐져 다윗 왕국처럼 강력하고 거룩한 나라를 이루는 데 근간된다는 점을 알려 줍니다. 분열된 역사는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가슴 아픈 현실이었고, 후대 독자들에게는 과거의 교훈을 보여 주는 거울이 됩니다.

*팟빵 '에르고니아 라디오' 채널 바로 가기: http://www.podbbang.com/ch/12827
박태순 / 부천 새들녘교회를 섬기고 있으며, 신학 아카데미 에르고니아에서 신학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