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이전 미국 대통령은 북한 핵무장에 적극 반대하면서도 실제 정책은 '전략적 인내'로 귀결됐다. 물론 1994년 미국 클린턴이 북한 영변을 공격하기 위해 구체적 전략까지 수립했다가 포기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크게 보면 그것까지도 전략적 인내의 범주에 들어간다. 결국 군사적 공격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한반도 문제, 북한 핵 보유 문제는 다양한 심각성을 지니고 있다. '북한은 핵을 보유해서는 안 된다'는 명제는 기존 핵보유국과의 형평성 문제를 뛰어넘어 이미 국제사회 공동선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도 북한의 핵 보유는 현실이 돼 버렸다. 국제 냉전 질서가 1991년 붕괴한 이후, 북한은 핵무기 개발을 유일한 생존 방식으로 인식했다. 그때부터 핵무기 개발에 전념한 결과, 2016년 말 북한은 핵과 핵을 운반하는 미사일(ICBM 포함) 개발에 성공했다. 북한은 핵·발사체를 동시 보유한 6개 국가 중 하나가 됐다.

미국 트럼프 정권이 들어서면서 북한에 대해 '최대 압박'과 '유화'라는 전혀 새로운 정책을 시행한 근본 원인도 같은 맥락에서 살필 수 있다. 트럼프라는 독특한 정치인이 출현했다는 정치 변수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북한이 '핵 보유 잠재국'이 아니라 핵과 발사체 미사일을 실제적으로 보유했다는 데 원인이 있다.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정책 변화라는 점이 훨씬 타당한 의견일 것이다.

현재 핵보유국 이상으로 핵이 확산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 국제적 약속이다. 북한을 향해 미국이 취하는 최대 압박은 트럼프의 정치적 선택이 아닌 세계적 합의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다만 트럼프가 전면에 서 있을 따름이다.

북한은 핵을 보유하고도 당면한 경제적 빈곤을 탈출할 수만 있다면 당연히 비핵화를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세계적 합의에 근거한 최대 압박을 뚫고 경제적 강국으로 변신하는 일은 꿈이지 현실이 아니다. 따라서 김정은은 핵과 경제 부흥을 맞바꿔야 한다. 그런데 핵을 포기하는 일은 경제 부흥과 안보가 함께 보장되지 않으면 안 되는 복잡한 변수를 안고 있다.

북한 입장에서는 핵을 '안보가 보장된 경제 부흥'과 맞바꿔야 한다. 결코 헐값에 팔 수 없는 것이 운명이다. 할 수 있는 대로 고가로 핵을 팔면서 안보가 보장되는 거래를 원하는 북한과, 가능한 한 핵 문제를 신속·명료하게 해결하려는 미국 입장이 첨예하게 부딪치는 것이 오늘날 북미 협상이 난항을 겪는 근본 원인이다.

안보와 경제 부흥을 보장받은 후 핵을 포기하겠다는 북한 입장은 비핵화 과정을 '행동 대 행동', 곧 단계적으로 핵을 없애겠다는 논리다. 합리성·숙명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주장이다.

내가 말하는 합리성과 숙명성은,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는 운명적 전략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북미 협상 과정에서 북한이 양보할 수 있는 요소는 별로 없다. 미국 입장은 북한이 완전하고 돌이킬 수 없는 핵 포기를 약속하고 실천하되, 단번에, 한 방에 가능성을 보이라는 것이다.

북한이 미국 요구를 궁극적으로는 수용하되 단계적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해도, 미국이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다. 북한에 대한 끝없는 불신의 절반은 북미 과거사에서 오지만, 절반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교만이라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미국의 '전략적 인내'도 약소국을 향한 배려하고는 관계가 없다.

미국이 말하는 전략적 인내는 '북한 정권은 곧 붕괴할 것'이라는 서구적 가치에 근거한 오판이다. 그뿐 아니라 외교적 방식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마지막에는 압도적 군사력으로 북한을 붕괴하겠다는 반역사적·반인륜적 교만이 전제돼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북한을 향한 군사적 공격은 곧 남북한 사이에 벌어질 전쟁을 의미한다는 점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남한과 북한 간 전쟁이 발발하면, 순식간에 1000만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그런데 어찌 감히 군사력 사용을 운운할 수 있단 말인가.

지나친 상상일 수 있겠지만, 미국은 여차하면 남북한에서 1000만 명의 희생자를 낼지라도 북한 핵 괴멸이 세계 안보를 위해 희생을 더 줄이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국주의적 오만이다. 

그런데 미국이 왜 그 길을 선택하지 못할까. 남북한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 북한이 보유한 핵무기 공격 대상에는 일본이 포함된다. 이것이 미국 매파들이 감히 군사력을 사용하지 못한 원인일 것이다. 너무나 명백하지만 쉽게 말할 수 없는 진실이다. 이 현상이 오히려 한반도에서 전쟁 억제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역사적 신비이다.

그러니 미국도 북한과의 협상을 쉽게 포기할 수 없다는 점은 명약관화다. 더더욱 북한이 핵을 미국 본토까지 날려 보낼 수 있는 ICBM 개발을 가속화한다면 미국의 선택은 더 좁아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북미의 입장이 김정은과 트럼프를 싱가포르로, 하노이로 이끌어 낸 것이다.

전쟁 당사자인 두 정상 간 만남은 종전 65년 만에 2번 이뤄졌으나, 비핵화에 대한 실제적 합의는 진전하지 못했다. 북한의 단계적 비핵화 원칙과 미국의 단번 비핵화 원칙이 첨예하게 부딪힌 것이다.

싱가포르에서 만난 1차 북미 정상회담은 앞으로 서로 잘해 보자는 원칙에 대한 합의였다. 그래서 비교적 쉬웠고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은 비핵화를 위한 구체적인 합의를 이끌어 내야 하는 자리였다. 1차 회담보다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회담을 전망하면서 얼마나 설왕설래가 많았는가. 결국 회담은 실패하고 말았다.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성공을 간절히 기대했던 북한의 실망은 더 컸을 것이다. 그러나 장사꾼 정신으로 평생 살아온 트럼프는 좀 더 느긋했다. 얄밉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랜 기간 후 성사된 북미 회담의 판이 깨지지 않았다는 사실도 보편적 역사가 경험하지 못했던 신비이다.

그렇다. 60년을 훨씬 넘긴 반목이 있었고 8000만 겨레의 운명이 달렸다. 세계인의 평화와 생존도 관련해 있기 때문에 북한 핵 문제가 단번에 해결되리라는 기대 자체가 무리였음을 하노이 회담이 틀어진 후 알아차렸다. 그만큼 우리 기대가 절박했던 것이다.

하노이 회담 실패를 탄식한 사람이나, 하노이 회담 실패를 즐거워한 사람이나 세상 물정을 몰랐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노이 회담은 북한·미국이 서로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수식어 없이 알게 된 매우 중요한 만남이었다. 어떻게 하면 북미 회담이 성공할 수 있는지 서로가 깨닫게 된 중요한 회담이었다.

하노이 회담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 회담에서 성공을 위한 견고한 다리가 하나가 건설됐다. 장삿속으로 이골 난 트럼프가 그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았다. 처음에 조금 황당했던 김정은도 뒤늦게 알아차렸고, 누구보다 회담 성공과 민족 회복을 갈망하는 문재인 대통령에게는 새 판을 짜야 한다는 각성을 줬다.

이 생각들이 절묘하게 통합돼 6·30 판문점 남·북·미 정상회담이 성사됐다. 6·30 3자 정상회담은 인간의 갈망과 상상력 위에 하나님 은혜가 함께한 절묘한 작품이었다.

문재인의 신실성, 트럼프의 상상력, 김정은의 결단력이 결합한 역사적 작품이었다. 하지만 세 사람 중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초역사적 현실이었다. 문제는 6·30의 역사적 만남 역시, 평화를 위한 구체적 열매, 비핵화를 위한 구체적 진전이 보이지 않아 세계가 모두 불안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연한 일이다. 북한 비핵화는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지는 단회적 기적이 아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앞을 향해 나아가는 긴 과정이다. '북한이 과연 비핵화할 것인가.' 내로라하는 전문가를 포함해 이렇게 묻는 사람이 많다. 이 의문이 이해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우문이다.

북한이 과연 핵을 포기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궁극적 해답은 사실 김정은도, 트럼프도, 문재인도 모른다는 것이 정답이다. 다만 북한 안보와 경제 부흥이 보장되면 반드시 핵을 포기하겠다는 것이 김정은의 진실이라는 사실을 믿고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믿지 못하면 비핵화를 위한 진전은 없다.

실상 한반도 평화에 전혀 관심이 없는 인간이 많다. 미국에도 많고, 한국에도 많다. 일본과 중국은 더 말해 무엇하랴. 이런 역사의 격랑을 헤치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6·30 남북미 정상회담이 성취돼 가는 모든 순간에 중재자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자임하고 모든 공을 트럼프에게 돌리는 문재인 대통령 모습이 애처로웠다. 대한민국이 애처로워 슬픔이 와락 밀려오기도 했다. 우리 땅에서 왜 우리가 손님 노릇해야 하는가.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다. 엄중한 현실을 지혜롭게 극복하고 새 역사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우리 운명이다.

트럼프 방한 이틀 전 외신 기자들과 인터뷰하면서, 그뿐 아니라 트럼프가 동석한 기자회견장에서도 문 대통령은 단호했다. 북한 비핵화로 가려면 '대화' 외에 길이 없다고 단언했다. 여차하면 군사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미국 매파들을 향해 단호하게 'NO!'라고 말한 것이다. 무력을 동원해도 협력할 수 없으니 할 테면 해 보라고 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패싱'당하지 않았다. 새 역사를 위해 판을 깔아 준 것이다. 물론 1·2차 회담처럼 또 맹물이면 어쩌나 불안해할 것이다.

불안해할 것 없다. 평화 아니면 전쟁이지 않은가. 북한이 전쟁을 원하겠나. 미국, 한국, 중국이 전쟁을 원하겠나.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면 이익을 볼 사람들은 전쟁을 원하기도 하겠지만, 그런 사람이 없지 않지만, 최소한 지금 그렇게 소리치는 사람은 없지 않는가. 이것이 역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자 기회다. 이 땅에 사는 우리는 정파적 계산이나 이념적 입장을 떠나, 모두 남·북·미 혹은 남·북·미·중 정상이 모여 합의하고 선언하도록 지원하고 기도해야 한다.

1) 7월 27일 휴전 66년을 맞아 관계국 정상은 판문점에 모여 한반도 정전을 선언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 이 모임을 위해 북미는 속히 실무 회담을 열어야 한다. 실무 회담을 통해 △북한은 영변 핵시설을 검증 가능하게 완전 폐기한다 △미국은 금강산 관광 및 개성공단 재가동을 완전히 남북에 맡긴다 △북미는 상호 협의해 속히 2단계 비핵화로 나아갈 것을 세계에 약속한다. 여기까지 가는 것이 스몰딜(Small Deal)이다. 며칠 남지 않았지만 7월 27일까지 완성될 수 있다고 본다. 아마 하노이 회담 때 여기까지는 합의를 했을 것이다.

여기까지만 가도 문재인·김정은·트럼프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수 있다. 세 사람의 노벨평화상 공동 수상은 남북 평화 여정에 획기적인 선을 그을 수 있다.

2) 북미는 미국 대통령 선거 이전까지 2단계 협상을 완성한다. △북한은 북한이 건설한 모든 핵시설을 검증 가능하게 파기한다 △미국은 모든 대북 제재를 해제하고, 양국은 평양과 뉴욕에 상호 연락사무소를 개설한다 △미국은 북한 경제 개발에 일정하게 투자하고, 조일 국교 정상화를 전제로 대일 청구권 문제 해결을 돕는다. 여기까지가 미들딜(Middle Deal)이 된다.

3) 북미는 앞으로 2~3년 안에 3단계 협상을 완성해야 한다. △북한은 현재 보유한 핵을 검증 가능하게 신고하며, 기한을 정해 북한 밖으로 반출할 것을 약속한다 △양국은 평양과 뉴욕에 대사관을 개설하고, 미국 기업들이 북한에 투자할 길을 활짝 열도록 주선한다 △미국은 북한의 IMF 가입 등 국제화를 위한 신실한 조치를 즉각 실시하고, 북한 경제 부흥을 위한 국제협약을 주도한다. 여기까지 가면 빅딜(Big Deal)이 될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꿈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꿈을 꾸어야 한다. 꿈을 꾸는 자만이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다. 상호 신뢰 틀이 잡혀가면, 빅딜이 이루어지기까지 시간은 많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실천에는 많은 시간이 들 수 있다. 이 일들이 문 대통령 임기 내에 이루어지면 대한민국으로는 최고의 행운이겠다. 이렇게 되도록 기도하는 것은, 이 땅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절체절명의 사명이다.

그동안 대부분 한국교회 교인은 북한이 흡수통일될 것을 당연시했다. 한국이 북한 국력보다 40~50배였고, 북한은 아사자로 들끓을 때가 있었으니, 어쩌면 자연스러운 생각이다.

그런 단견短見을 갖게 된 것은 대부분 지도자들 책임이다. 북한이 핵을 보유했다는 사실은, 북한이 어느 날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릴 것이라는 환상을 거두게 했다. 그뿐 아니라, 북한 정권을 공산주의라는 악마의 손발이라고 단죄했던 단견도 반성하게 했다.

아직 그날의 악몽을 잊지 못한 분들이 계셔서 쉽지 않은 과제다. 하지만 감정의 벽을 넘어서야 한다. 북한이 속히 무너져서 북한을 자유롭게 해 달라는 기도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 대한민국 국민 90%는 물질의 노예가 돼 있고, 온갖 쾌락의 노예가 돼 있다. 이런 현실을 무어라고 해야 하는가. '통일이여, 어서 오라' 하고 눈물 흘리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 전쟁 없는 평화통일. 당연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요즘 와서는 통일 없는 '현상 유지론'이 고개를 쳐들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천민자본주의가 가져다준 탐욕이다. 반만년 역사 동안 하나의 언어를 사용해 온 민족 공동체가 바랄 수 있는 소망은 결코 아니다. 현상 유지론은 불가능한 일이다. 남북은 반드시 통일된 민족으로 살아야 한다. 문제는 통일 한국이 어떤 나라여야 하는가. 이것이 문제다.

'통일 한국'이 민족 혹은 국가를 최고 이념으로 내세우는 민족지상주의나 국가지상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하지 않는가. 

기독교인들은 타는 목마름으로 예수 한국, 성서 한국, 선교 한국을 노래해 왔다. 무엇 때문인가. 한국이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 뜻이 이뤄지는 '공동체 한국'을 노래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정의와 인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입을 맞추는 나라가 이 땅에도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한국'이라는 공동체 없이 그 나라를 생각하는 것은 공허한 관념이다. 그렇기에 간절하게 예수 한국, 선교 한국, 성서 한국, 통일 한국을 사모하는 것이다. 통일은 평화롭게 성취돼 가는 과정이자 긴 여정이다. 통일 한국에서는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해야 한다(암 5:24).

그 나라의 주체는 지금의 북한 인민, 남한 국민이다. 이 땅이 하나님나라 영광으로 가득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통일 한국을 꿈꾼다. 아, 그날이 가까워지고 있다.

강경민 / 일산은혜교회 담임목사, 평화와통일을위한연대 상임운영위원, 남북나눔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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