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에 이르러서야 이스라엘은 국가의 면모를 갖추게 됩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400년 역사의 왕조를 창건합니다.

시편 132편은 다윗 왕권이 지닌 성격을 잘 드러내 줍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성실히 맹세하셨으니 변하지 아니하실지라. 이르시기를 네 몸의 소생을 네 왕위에 둘지라. 네 자손이 내 언약과 그들에게 교훈하는 내 증거를 지킬진대 그들의 후손도 영원히 네 왕위에 앉으리라 하셨도다(시 132:11-12)."

성서 전승을 보존했던 공동체가 다윗의 인간적인 면도 함께 보존했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습니다.

사울에게서 도망치면서 이스라엘 주적 블레셋에 의지하는 장면, 밧세바 사건, 압살롬 사건 등을 삭제하지 않았습니다. 후대 사람들은 이를 거북하게 여기고, 포로 생활 끝나고 돌아와 역대기서를 기록할 때 다윗 행적을 미화하기도 했습니다. 열왕기서도 다윗이 죽고 난 다음에 기록했다는 점에서, 다윗의 죄를 삭제해 그를 완벽한 왕으로 추켜세우지 않았다는 사실은 성서의 역사성을 확증해 줍니다.

다윗과 골리앗

골리앗을 이긴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당연히 '다윗'이라고 답하겠지만,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조금 애매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의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의 키는 여섯 규빗 한 뼘이요"(삼상 17:4),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 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삼상 17:50)."

"또다시 블레셋 사람과 곱에서 전쟁할 때에 베들레헴 사람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은 가드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는데 그 자의 창 자루는 베틀 채 같았더라(삼하 21:19)."

"다시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할 때에 야일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사람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는데 이 사람의 창 자루는 베틀 채 같았더라(대상 20:5)."

사무엘상 17장에서는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으며, 사무엘하 21장 19절과 역대상 20장 5절은 엘하난이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하 21장 19절에서 "~의 아우 라흐미"는 원래 히브리어 본문에는 없습니다. 한글 성경(개역개정)에만 있는 첨가한 글입니다.

- 사무엘하 21장 19절 비교

(개역개정) "또다시 블레셋 사람과 곱에서 전쟁할 때에 베들레헴 사람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은 가드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는데 그 자의 창 자루는 베틀 채 같았더라."

(새번역) "또 곱에서 블레셋 사람과 전쟁이 일어났다. 그때에는 베들레헴 사람인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사람 골리앗을 죽였는데, 골리앗의 창 자루는 베틀 앞다리같이 굵었다."

(공동번역) "곱에서 불레셋 군과 또 한 차례 싸움이 붙었을 때 베들레헴 사람 야이르의 아들 엘하난이 갓 사람 골리앗을 죽였는데 골리앗의 창대는 베틀 용두머리만큼 굵었다."

(NIV) "In another battle with the Philistines at Gob, Elhanan son of Jaare-Oregim the Bethlehemite killed Goliath the Gittite, who had a spear with a shaft like a weaver's rod."

사무엘상 17장에서는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다고, 사무엘하 21장 19절에서는 엘하난이 골리앗을 죽였다고, 역대상에서는 엘하난이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17장과 역대상 20장 5절 사이 모순을 피하기 위해, 한글 성경(개역개정) 사무엘하 21장 19절은 원래 히브리어 본문에는 없는 "~의 아우 라흐미"라는 표현을 첨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원문대로 번역한 새번역에는 첨가문이 없으며, 영어 성경도 첨가문이 없습니다. 따라서 골리앗을 죽인 사람이 다윗인지 엘하난인지 정확히 알 수 없게 됩니다.

다윗 시대 고고학

- 텔 단 비문

어떤 학자들은 다윗과 솔로몬, 통일 왕국 등의 역사는 포로 생활 이후나 예루살렘 제사장 집단이 그리스 시대에 만들어 낸 교묘한 창작품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1993년 여름, 이스라엘 북부 지방에 자리한 성경 유적지 텔 단에서 '텔 단 비문' 파편이 발견돼 다윗 왕국이 실존 여부에 대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후대 사람들이 깨뜨려 건물 받침돌로 사용한 이 유물은 검은색 현무암 기념비입니다. "다윗의 집"이라는 문구가 담겨 있습니다. 시리아 아람 왕국 언어였던 아람어로 쓰인 이 비문은,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침공했다는 사실을 자세하게 적고 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들 (여호)람을 (죽였고, 나는) 다윗의 집의 (왕인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를 죽였다. 또 나는 (그들의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고 그들의 땅에서 (사람의 자취를 쓸어) 버렸다."

아람 왕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지만, 다메섹 하사엘이 기원전 835년 무렵 북왕국 이스라엘을 침공한 이야기를 비문이 전해 주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에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가 요람을 배반하였으니 곧 요람이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아람의 왕 하사엘과 맞서서 길르앗 라못을 지키다가(왕하 9:14)."

이 기록은 다윗 아들 솔로몬의 통치 시대에서 100년도 안 된 시점에 다윗 왕조가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 다윗성

2006년 에일라트 마자르(Eilat Mazar)는 예루살렘에 있는 오벨 남쪽에서 발견한 돌로 된 대규모 성벽을 다윗왕의 궁궐로 봅니다.

"두로 왕 히람이 다윗에게 사절들과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매 그들이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으니(삼하 5:11)."

시대를 조금 늦추면 솔로몬 궁궐의 파편일 수도 있습니다.

다윗성 동쪽 경사면에 건설한 돌계단 구조물(Stepped-Stone Structure) '여부스인의 경사로' 연대 문제는 논쟁 대상이지만, 마찬가지로 다윗의 건축물로 볼 수도 있습니다.

- 예루살렘 규모

다윗 시대 예루살렘 규모가 크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나안 군주가 이집트 왕궁에 쓴 '아마르나 편지'를 보면, 이미 왕국의 '수도'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로 추정해 보면, 상당한 규모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미하이 마자르(Amihai Mazar)는 2008년 논문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기원전 10~9세기에 대한 정확한 연대는 이스라엘과 주변 지역에서의 국가 형성을 이해하는 데 직접적인 연관을 가진다. (중략) 그러나 1990년 이후 몇 학자들(Jamieson-Drake 1991, Finkelstein 1996, 1999, 2003, Finkelstein and Silberman 2001)은 그러한 왕국의 존재를 부인하였다. (중략) 예루살렘이 기원전 10세기 동안 정착하지 않았다거나, 조그마한 산지 마을이었다는 우시쉬킨과 핑컬스타인의 주장은, 내가 보기에 증거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 기초한다. 특별히 케년과 에일랏 마자르에 의하여 발견된 건물과 함께 조합하여 계단 돌 구조물이 유용한 증거에 기초하여 기원전 11~10세기로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이것은 이 시기 레반트에서 발견된 가장 기념비적인 구조물이다. 다윗의 예루살렘은 그 시기 예외적인 크기의 망대를 지닌 약 4㏊(4만㎡)의 도시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러한 도시와 망대는 강력한 통치자의 세력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팟빵 '에르고니아 라디오' 채널 바로 가기: http://www.podbbang.com/ch/12827
*관련 영상 바로 가기: https://youtu.be/UKGs6gmktck
박태순 / 부천 새들녘교회를 섬기고 있으며, 신학 아카데미 에르고니아에서 신학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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