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이었던 2017년에는 명성교회 불법 세습 사건이 교회를 흔들더니, 올해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대표회장 전광훈 목사가 현장에서 분투하는 목회자들을 참담하게 하고 있습니다. 한기총의 태생 연유를 보면 이상할 일도 아닙니다.

한기총은 안기부가 1989년 민주화 운동에 나서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막기 위해 기독 실업인들에게서 15억 원을 모금해 몇몇 목회자를 앞세워 조직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평소 종교와 영성의 가치를 깊이 성찰하고 나누는 <한겨레> 조현 기자는 6월 19일 ''막언막행' 전광훈 목사의 '살신의 희생'에 감사한다'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이렇게 일갈했습니다.

"전 목사는 히틀러에게 맞서다 사형을 당한 독일의 천재 신학자 본회퍼까지 언급하며 청와대 앞에서 단식을 공언했으나 단 한 끼를 끝으로 단식을 끝내 언행 불일치의 완결판을 보여 주었다.

전 목사가 도산 안창호의 말대로 '사람은 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언행에 의해 흥하고 망한다'는 가르침만을 준 것이 아니다. 배타와 혐오를 선동만 하면 먹혀들 수 있다고 자신하던 한국교회의 수준을 다시 돌아보게 해, 한국교회를 한걸음 더 성숙하게 해 준 공까지 있다. 한국 사회와 한국교회를 위해 스스로 한기총과 자신을 패퇴시킨 그 '살신'의 희생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범사에 감사한다."

교계 원로 31명은 6월 18일 '크게 염려하고, 크게 통회합니다'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유경재 목사님, 신경하 목사님, 박종화 목사님, 김명혁 목사님, 손봉호 장로님 등은 최근 전광훈 목사가 보여 준 행태는 기독교계 대표성을 상실한 한기총 내부에서도 비판을 받는 개인 일탈이며, 정치적 욕망과 신념을 위해 교회를 욕되게 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복음은 오직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바 '타인을 위한 희생과 사랑'입니다"라며 기독교의 본질을 밝혔습니다. 가톨릭 평신도 해방신학자 김근수 소장(해방신학연구소)의 <슬픈 예수>(21세기북스)에 비추어 보면, 타인은 가난한 이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을 세상의 중심으로 제시하셨다. 하느님나라의 중심은 가난한 사람이 차지한다는 말씀이다. 예수는 복음을 먼저 가난한 사람에게 전하라고 하셨다. (중략) 이제 가난한 사람들이 성서의 주인공으로서 교회의 중심으로 당당히 복귀해야 한다." (8쪽)

가난한 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세운 이들이 있으니 스크랜턴 선교사 가족입니다. 며칠 전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 이름을 딴 '카페마리'에 갔습니다. 가구 거리에 있는 아현교회 사회봉사관 1층 카페에는 대부인으로 불린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 사진들이 있었습니다. 사진 글 중 대부인 장례 행렬을 본 힐만 선교사의 보고서가 압권이었습니다.

"한국인들은 그가 만약 자기 나라에 있었더라면 왕비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연령과 성결과 신분을 초월하여 수천 명이 마지막 안식처인 한강변까지 운구하는 5마일을 뒤따랐다."

한국인들이 별세를 아쉬워하며 이십 리를 걸으며 추모한 것을 생각하며 스크랜턴 대부인이 안장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교통과 국방의 요충지였던 양화진에 프랑스군이 들어오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이곳에서 천주교인들을 처형했기에 '절두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1890년 미국 의료 선교사 헤론이 사망했을 때, 묘지를 요구한 미 공사관에게 조선 조정은 양화진 인근 땅을 제공했습니다. 그렇게 외국인 묘지가 조성된 것입니다.

1985년 소유권을 증여받은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재단은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선교관을 건립했으며, 2005년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를 설립해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둘러보니 첫 선교사 아펜젤러, 언더우드 등 선교사와 가족 145명이 안장돼 있었습니다. 메리 스크랜턴 대부인 묘지에는 이런 안내문이 적혔습니다.

"스크랜턴 대부인은 우리나라 근대 여성 교육의 선구자이다. (중략) 그녀는 자신의 집에서 성벽 주위에 버려진 아이들과 같이 가난하고 소외된 여성들을 대상으로 학당을 시작했다. 한 명으로 시작한 학당은 점차 학생들의 숫자가 늘어나 1986년에는 50명이 되었다. (중략) 스크랜턴 대부인은 교육을 통해 학생들이 한국인임을 더욱 자랑스러워하도록 이끌었다. (중략) 당시는 여성 선교사가 아주 적었고, 온갖 관습의 벽에 둘러싸인 여성들에게 접근하는 일은 조선의 여성들만 할 수 있었다. 이에 스크랜턴은 이들과 동역하였다. (중략) 조선 여성들을 향한 사랑으로 24년 동안 일한 스크랜턴 대부인은 76세 때 소천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초여름 햇살이 부챗살처럼 퍼져 있는 묘원을 걸으니, 멀리 낯선 나라에 와서 복음 전도는 물론 개화·교육·의료 및 한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선교사들에게서 숭고한 신앙심이 느껴졌습니다. 다만 높다란 두 개의 시멘트 건물은 묘원과 어울리지 않아서 아쉬웠습니다.

아현교회 예배당. 이근복 그림

의사 윌리엄 벤턴 스크랜턴 선교사는 1885년 5월 2일 아내 룰리 스크랜턴,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과 함께 인천항으로 입국했습니다. 서울 정동에 시병원을 세우고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며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아펜젤러가 정동에 배재학당을 세우고 엘리트 대상으로 선교와 교육에 힘쓴 반면, 그는 가난한 민중 가운데 의료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양반들이 살던 정동은 신분이 낮은 환자들이 접근을 꺼려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던 스크랜턴은 성문 밖으로 그들을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당시 애오개는 죽은 아이들을 버리던 '애고개'에서 비롯된 땅으로, 서대문 밖 서울에서 가장 비참하고 후진 곳이었습니다. 스크랜턴 선교사는 1888년 12월 애오개 언덕에 선한사마리아병원(Good Samaritan’s Hospital)을 세웠고, 이것이 아현교회의 시작이 됩니다. 아현교회는 복음의 정신에 걸맞게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고아와 여성들을 교육하고 하나님 말씀을 나누는 일을 사명으로 여겼고, 사마리아인처럼 이웃과 나누고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로 자리 잡았습니다. 기독교대한감리회의 걸출한 교역자들과 훌륭한 평신도 지도자들을 배출했습니다.

한국전쟁 때 조성문 목사는 교인들을 돌보기 위해 남았다가 납북되었고, 김지길 목사와 신경하 목사는 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조경열 목사님은 제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을 맡아 목회자 인문학 모임과 신학생 연합 교육 훈련 등을 통해 건강한 새 지도력을 세우는 사역을 시작할 때 운영위원장으로 수고하셨습니다. 우리 동네의 문석진 장로(서대문구청장)는 지역사회를 모범적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아현교회는 2008년 창립 120주년을 맞아 스크랜턴 선교사의 신앙 정신을 계승하자는 취지로 스크랜턴기념예배당을 건축했습니다. '언덕 위의 모범 교회'라는 돌비를 세우고, 교회가 사회적 신뢰를 잃어 가는 시대에 희망이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몇몇 교회와 목회자들이 보이는 몰상식한 행태로 그리스도인의 자긍심이 끝없이 추락하는 시대, 2018년 부임한 김형래 담임목사께서 아현교회를 한국교회 모범으로 굳건히 세워 가길 바랍니다.

*'그림으로 만나는 한국교회'는 매월 2차례 업데이트됩니다.

이근복 /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을 거쳐 현재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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