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철 목사와 부인 최미희 씨. 농사일 돕느라 얼굴이 까맣게 탔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뉴스앤조이-박요셉 기자] 조 아무개 씨는 마을에서 굿을 잘 보기로 유명했다. 그가 살았던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대동굿'이 열렸다. 사람들은 마을이 평안하고 번창하게 해 달라고 빌었다. 조 씨는 용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다른 마을에서 굿을 요청해 오기도 했다. 마을 주민들은 농담 삼아 이야기했다. 조 씨가 예수를 믿으면, 온 동네 사람이 교회를 다닐 거라고.

같은 마을에 사는 김광철 목사(원당교회)는 주민들이 하는 말을 놓치지 않았다. 매일 조 씨를 찾아갔다. 농사일을 도우며 친하게 지냈다. 김 목사의 질긴 노력 끝에, 조 씨는 예수를 영접했다. 그는 원당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권사가 됐다. 마을에는 굿이 사라졌다. 대신 같은 기간 마을 축제가 열린다.

"목사님, 5년만 버텨 주세요"
1~2년 만에 떠난 목사들
김 목사 부부 30년간 자리 지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예장통합·림형석 총회장) 원당교회는 장남면 원당1·2·3리와 자작리에 있는 유일한 교회다. 1963년 창립했다. 1987년 김광철 목사가 부임할 때까지 1~2년 주기로 담임목사가 바뀌었다. 대다수 목사는 시골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났다. 불과 한두 달 만에 떠난 목회자도 있었다. 교인들은 김 목사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손가락 5개를 펴 보이며 말했다. "목사님, 제발 5년만 버텨 주세요."

원당리는 2001년까지 민통선 구역이었다. 통행증을 소지해야 출입이 가능했다. 김 목사는 부임 첫날 제대로 신고식을 치렀다. 이삿짐을 실은 차량이 임진강을 건너기 전 검문소에서 막힌 것이다. 오전 11시 도착한 트럭은 오후 5시가 돼서야 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 6월 18일 원당교회에서 만난 김 목사는 "그때는 지금보다 분위기가 살벌했어요. 아무리 사정을 얘기해도 들어 주지 않았죠. 검문소에 있는 보안대 입김이 아주 셌어요"라고 말했다.

김 목사는 원당교회에 부임한 지 올해로 33년이 됐다. 이렇게 오랫동안 사역할 줄 몰랐다. 교인들 부탁이 있긴 했지만, 머무르게 된 주된 계기는 한 주민이 던진 질문과 관련 있다. "목사님, 언제 가실 건가요?" 교회 앞마당에서 이삿짐을 풀고 있는 김 목사에게 처음 본 주민이 한 말이다.

"처음 만나자마자 그렇게 물으니까 당황스러웠어요. 그때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요. 교인들뿐 아니라 주민들도 목사들이 잠깐만 왔다 가는 것을 알았던 거죠. 목소리에 실망과 아쉬움이 배어 있었어요. 그런 일을 겪고 나서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장기 목회를 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아침마다 마을 돌며 농사일 자처
결혼식·장례식 등 애경사 빠지지 않아

교회 주변이 전부 논밭이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남는 시간이 많았다. 김광철 목사는 새벽 예배를 마치고 나면 아내 최미희 씨와 함께 마을을 돌아다녔다. 원당리와 자작리 380여 가구 중 95%가 농가다. 마을에는 모내기를 막 끝낸 논과 차광막을 친 인삼밭이 가득했다. 지금은 기계가 모도 심고 탈곡을 하지만, 20~30년 전만 해도 모두 수작업으로 했다. 그렇다 보니 일손이 많이 필요했다.

목사 부부는 아침부터 주민들 논밭을 다니며 일을 거들었다. 서울 출신인 두 사람은 농사의 '농'자도 몰랐지만 어깨너머로 배워 가며 일을 도왔다. 지금은 깨와 마늘, 벼로 농사를 짓는 전문가가 되었다. 김 목사가 말했다.

"해가 뜨면 무조건 마을로 나갔어요. 마을 사람들을 만나는 게 목적이었죠. 일도 같이하고 대화도 나누다 보면 전도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원당리에서 80년 가까이 살아온 김 씨 할머니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다. 하지만 누구보다 김 목사 부부를 잘 알았다. 김 씨는 마을 사람 중 목사 부부 손을 빌리지 않은 곳이 없다고 했다.

"(김 목사 부부가) 농사를 아주 잘했어. 목사님이 지금은 나이가 많이 들긴 했지만 젊을 때는 손도 빠르고 솜씨가 좋았어. 옛날에는 집집마다 길에다 추수한 벼를 가득 쌓았는데, 두 분이 돌아다니며 그걸 손으로 직접 떨어냈어. 마을에서 농사짓는 집 중 그분 손 안 빌린 집이 없을 걸. 다 봉사로 했어."

마을 주민 애경사도 꼬박꼬박 챙겼다. 장례식은 무슨 일이 있어도 참석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데도, 김 목사에게 염과 장례를 부탁하는 주민도 있었다.

"처음에 기독교 방식으로 장례를 하려고 하니 주민들이 잘 협조해 주지 않았어요. 지관들과 다투기도 했어요. 근데 시간이 지나자 이게 더 간편하고 깔끔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주민들 인식이 달라졌어요."

초기 5년간 새 신자 0명
약속 기간 끝나자 사임 고민
원당교회 연례행사, 새벽송

교회 내부. 교인 60여 명이 예배할 수 있도록 아담하게 지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버린 돌을 모아 야외에 예배 공간을 마련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5년간 마을 주민들을 열심히 쫓아다니고 일손을 도왔지만, 교회에 등록한 주민은 없었다. 김 목사는 교인이 10여 명에서 한 명도 늘지 않는 걸 보고 크게 낙심했다. 교인들과 약속한 기간이 됐고,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일산에 신도시가 들어선다는 데 교회를 개척해 볼까', '몇몇 선배 목사가 소개해 준다는 곳으로 가 볼까' 고민했다.

부임 6년 차 새해 첫날 새벽 예배를 인도할 때 못 보던 교인이 예배당에 앉아 있었다. 그토록 갈망하던 새 신자였다.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이 그제서야 실감할 수 있었어요."

알고 보니 그는 2~3년 전부터 교회에 출석하고 싶었는데, 남편 반대로 오지 못했다고 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원당교회에 출석하는 주민들이 하나둘 늘기 시작했다.

김 목사는 교인들과 함께 지역사회 살림도 챙겼다. 원당리와 자작리 경로당 4곳에 정기적으로 식재료와 물품을 보내고, 일산에 있는 병원과 연계해 매년 무료 진료를 해 왔다. 명절이 되면 떡과 음식을 돌리고, 부활절·성탄절에는 소소한 선물을 나눠 줬다.

특히 30년간 진행해 온 '성탄절 새벽송'은 원당교회의 자랑거리 중 하나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주민들과 공동 식사를 마치고 난 뒤, 김 목사는 교인들과 새벽송을 진행했다. 집집마다 선물을 돌리고 찬송을 불렀다. 주민들은 초코파이, 사탕, 귤, 라면, 쌀 등으로 보답했다. 성금 봉투를 주는 주민들도 있다. 밤 10시에 시작한 새벽송은 다음 날 새벽 4시가 돼야 끝이 났다. 김광철 목사가 말했다.

"종교와 상관없이 주민들이 모두 좋아해요. 매년 약 150~180만 원이 성금으로 들어오는데, 인근 장애인 시설과 경로당, 군인 교회에 후원하고 있어요. 교인들 평균연령이 70에 가까워지면서 몇 분은 이제 그만하자고 하시는데, 은퇴할 때까지 계속할 생각이에요.(웃음)"

경로당에서 만난 최 씨 할머니는 원당교회가 마을을 살뜰히 챙긴다고 말했다. 자신은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김 목사 부부와 교인들 봉사에 늘 고맙다고 했다.

"거기는 목사가 맨날 바뀌더니 김 목사가 와서는 착실하게 잘해. 옛날에 먹을 것 부족할 때, 경로당에 쌀을 보내 줬어. 성탄절에는 주민들이 새벽송 오는 교인들에게 고마우니까 문틈에 성금 봉투도 껴 놓고. 목사님 부부가 시골에 와서 고생을 많이 했어요. 교인들과 함께 주민들도 열심히 돕고."

전덕천 장남면장도 한마디 보탰다.

"원당교회가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주민들을 돕거나 마을 행사를 지원하는 일에 열심이에요. 목사님은 지역사회보장협의체에서 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어요. 기금을 조성해 지역에서 어렵게 사는 분들을 지원하거나 노후 주택을 개선하는 일 등을 하고 있어요."

연말마다 단체 사진을 촬영한다. 평균연령이 68세. 만 64세 김광철 목사는 젊은 편이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작은 시골 교회지만 사역은 '글로벌'하다. 해외 선교사와 국내 미자립 교회를 돕고 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교회가 어려운 일을 겪을 때는 마을 주민들이 도왔다. 원당교회는 2010년 113평짜리 예배당을 신축했다. 기존 예배당은 방한이 안 되고, 비가 오면 천장에 물이 그대로 샐 정도로 노후했다. 교단 동료 목사들과 교인들 헌금으로 공사를 어느 정도 끝낼 수 있었지만, 예배당을 채울 강대상이나 장의자, 음향 장비 등을 마련할 재원이 부족했다. 이 사실을 안 원당리·자작리 주민들은 장의자, 마이크, 피아노, 에어컨 등 물품을 마련할 비용을 지원했다.

"입당 예배를 일주일 앞두고 아무 계획도 없었어요. 기존 예배당에서 사용하던 강대상을 갖다 놓고 바닥에서 예배할 계획이었어요. 그런데 주민들이 사정을 듣고 나서기 시작했어요. 예배당 집기 2/3가 주민들 지원으로 마련했어요. 주민들 덕분에 입당 예배를 잘 치를 수 있었어요. 지금도 은혜를 잊지 못해요."

시골 목회에서 깨달은 전도의 의미
"삶이 말을 뒷받침해야"
은퇴할 때 모두 놓고 갈 것

3개월 전, 사택에 큰 불이 났다. 세간살이를 모두 버렸다. 김 목사는 30년치 교회 자료를 잃어 아깝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이곳에서 30여 년간 목회한 김광철 목사는 전도 개념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말과 논리로 교리를 전하는 게 전도의 전부가 아니에요. 삶이 말을 뒷받침하지 못하면 어느 누가 교회에 나가려고 할까요.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기본적으로 교회와 목회자에게 기대하는 모습이 있는 것 같아요.

시골은 좁은 사회에요. 비기독교 주민들이 목사보다 교회 사정을 더 자세히 알 때가 많아요. 그래서 늘 조심해요. 목사라고 해서 대접받을 생각하지 않고, 사례비 책정할 때도 더 조심해요. 성경 말씀처럼 다 내려놓으면 편해요.

목회를 교회 성장에 초점을 맞추면 쉽게 지치는 거 같아요. 교회가 속한 마을 주민 전체를 교인이라고 생각하고 이들을 섬기는 게 교회의 사명으로 여기면 좋겠어요. 그래야 주민들도 마음의 문을 열더라고요. 저는 이게 마을 목회라고 생각해요. 30년 동안 교인 수가 크게 늘지 않았지만, 이렇게 주민들과 동고동락할 수 있어서 감사해요."

몇몇 주민은 목사 부부에게 "젊어서 고생도 많이 했으니 예배당 정리하고, 그 돈으로 도시에서 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목사 부부는 손사래를 친다. 올해 만으로 64세인 김 목사가 담담하게 말했다

"가끔 언론에서 목사들이 전별금으로 몇 억씩 받는다는 기사가 나오잖아요. 잘 모르는 분들은 교회가 마치 목사 개인의 소유물처럼 생각해요. 어림없는 소리죠. 다 놓고 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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