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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이 된 혐오, 사랑이 된 혐오
'한국 개신교의 혐오를 분석하다' 김혜령 교수 발표문
  • 김혜령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9.06.18 15:22

개념 구분
- 증오와 혐오

다음(daum) 국어사전에 따르면, '증오'란 '몹시 미워함'을 뜻하며, '혐오'란 '싫어하고 미워함'을 뜻한다. 여러 학자가 최근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혐오 현상들에 대한 개념을 재정의하고는 있으나, 사전상 의미로만 볼 때 혐오 개념 속에 '싫어함'이라는 감정이 추가된 것을 제외하고는 일상 언어의 쓰임에서 증오나 혐오라는 말에 대한 의미 구별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영어도 두 단어는 공히 hate나 hatred 모두 번역이 가능하다. 다만, 영어를 사용할 때 혐오는 '역겹다'라는 의미의 disgust나 disgusting이라는 말로 추가하여 번역이 가능하다. 우리말에서 혐오라는 단어에 '싫어함'이라는 감정이 추가된 것처럼, disgust나 disgusting로 번역되는 혐오는 주로 hate로 번역되는 증오에 비해 미워함의 감정이 강력한 신체적 거부반응과 더불어 일어나는 경우를 의미한다. 매우 강한 미움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데도 혐오와 증오, disgust와 hate의 완전한 구별은 거의 불가능하며, 언어권마다, 학자들마다, 서로 혼용하거나 임의로 취사선택하여 사용하고 있다. 대표적 예로, 혐오에 관한 매우 중요한 통찰을 펼친 마사 너스바움(Martha C. Nussbaum)이 쓴 <혐오와 수치심>(민음사)의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혐오로 번역된 영어 원제의 원단어는 disgust였던 반면, 한국 상황에서 혐오 표현 문제를 진중하게 제기한 법학자 홍성수의 <말이 칼이 될 때>(어크로스)에서는 주로 일본의 혐한 시위에 등장하는 hate speech를 '증오 표현'이 아니라 '혐오 표현'으로 번역하고 있다. 독일의 카롤린 엠케(Carolin Emche)의 <혐오 사회>(다산지식하우스)에서는 증오와 혐오를 따로 의미를 구분하여 사용하지 않고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개념상 유사성에도, 본 연구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적 미움 현상이 '싫어함'이나 '역겨움'이라는 감정적 반응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증오보다 더 큰 개념으로 사용되는 '혐오'라는 말로 통일하여 사용하였다.

'한국 개신교의 혐오를 분석하다' 연구 발표회가 6월 15일 서울 종로구 청어람홀에서 열렸다. 연구 책임을 맡은 이화여대 김혜령 교수가 발표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혐오 개념 정의

일상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아닌, 혐오 현상에 대한 학문적 연구에서 정의하는 '혐오' 개념은 특정 대상을 향한 개인적인 미움의 감정과는 구별된다. 사회 속에서 특정 집단이나 집단에 속한 개인에 대해 (이미 존재하는) 차별을 고착화하거나 재생산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미움의 감정이다. 즉 한 사회의 역사·문화·정치·종교 등 복합적 요소에 근거하여 '차별받는 대상'이 되었던 '소수자 개인'이나 '소수자 집단'을 향한 미움이 혐오이다.

이러한 정의에서 볼 때, 한 사회의 '기득권층'이나 '다수'를 향한 미움은 그들에 의해 상처받는 취약자들이 품는 '분개'하는 미움이거나(너스바움, 191) 그들이 받는 부당함에 공감하며 함께 분개하는 '정의감'에서 나온 감정이기에 개념상 혐오라고 부를 수 없다. 한국 사회에서 유행하는 '개독교 혐오'나 '남혐'이라는 말은 언론이나 일상적 언어 표현에서 '혐오'라는 말의 큰 범위 안에 속한 '이슬람 혐오'나 '여혐'과 상극을 이루는 혐오의 하나로 흔히 사용되고 있다. 엄격한 의미에서 혐오 개념을 분류할 때 '개독교 혐오'나 '남혐'을 혐오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인을 '개독교인'라고 부르는 일은 기독교인들의 명예나 사회적 신뢰도를 다소 떨어뜨리기는 해도 기독교인들의 존재 자체나 사회적 권리를 부정하거나 차별받게 하지는 않는다. '남자를 혐오한다'는 급진적 페미니스트들 발언 역시 - 2018년 11월 이수역 폭행 사건과 같은 우발적이고 개별적인 폭력 사태의 원인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남성 집단에 대한 존재 부정이나 권리 축소를 사회적 차원에서 실현하지 못하는 미움이기에 '혐오'에 포함하기가 매우 어렵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개독교'나 '남혐'이라는 말은 한국 사회에서 기득권 집단이나 다수 집단이었던 기독교와 남성 집단에 의해 상처받은 약자들의 억울한 마음에서 비롯된 미움이기에 '분개'로 분류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러한 분류의 연장선에서 최근 비주류나 소수자 집단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미러링(mirroring) 활동은 표현 방식의 증오성과 폭력성 강도가 일반인들 정서로 볼 때 때때로 매우 당혹스럽더라도, 이미 존재하여 왔으나 오랫동안 은폐되어 왔던 원본으로서의 '혐오'가 가지는 강력한 차별과 폭력의 수직적 구도를 역전하여 되돌려 주는 방식으로 원본 혐오의 심각성을 해당 사회의 논쟁적 문제로 단번에 부각하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혐오 발언>(알렙)의 저자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한 사회에서 소수자들을 향해 일상적으로 내뱉어지며 상처를 주어 왔던 혐오 발언들(excitable speech, '모욕 발언'이라고도 번역함)의 단어나 형식을 수정·복사하여 원천적 혐오 발언들의 발화자들에게 되돌려 주는 미움 표현을 '저항 발언'(counter-speech)이라고 구분하여 부른다. 이러한 미러링을 통한 저항 발언이 - 형식상은 미움의 표현을 띠고 있다고 해도 - 원천적 혐오 발언들 아래 은폐되어 있던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 구조를 교란하고 해체하여 전복하는 효과가 있는 전략적인 언어 행위로서 정당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미러링에 대한 버틀러의 변호가 특정 종교 상징물을 훼손하거나 주류 집단에 속한 개인들에게 물리적 폭력을 직접 행사하는 예외적 사건들 모두를 원천적 혐오와 차별에 저항하는 전략적 전술로 통칭하여 감싼다고는 할 수 없다. 그가 말한 미러링은 원천적 혐오 발언이 은폐하는 사회의 차별 구조를 언어적 차원에서 드러내는 수준의 '저항 발언'에 한정하지, 저항 발언에 근원 감정이 되는 '분개'를 특정 대상들을 향해 물리적으로 직접 표출하는 폭력을 포함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미러링과 저항 발언에 대한 분석을 통해 버틀러가 적어도 '차별을 생산하고 고착시키는 미움'과 '더 이상 차별받지 않고 싶은 마음에서 발생하는 보복적 미움'의 도덕적 차이를 명백하게 드러내어, 혐오 개념을 정립할 때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도덕이 된 혐오
- 혐오가 아니라 선도善導이고 사랑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을 불편해한다. 미움은 불쾌의 감정이기에 미움을 오랫동안 품고 있으면 오히려 우리 자신의 마음과 삶에 상처가 남는다. 이러한 이유로 무수히 많은 종교와 지혜자들은 미움을 버리고 화해하거나 용서할 것을 권하며, 미움이 없는 마음 상태를 도덕적으로 더 나은 것으로 가르쳐 왔다.

미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도덕적으로 더 나은 상태로 여기는 일상의 도덕률 관점에서 본다면, 소수자나 소수자 집단을 향한 혐오 역시 '미움'의 감정이기에, 이를 해소하기 위해 개인과 사회가 노력해야 하는 것이 당연지사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말했을 때 일상의 도덕률에서는 오히려 혐오가 정당화되고 강화된다. 혐오는 소수자와 소수자 집단에 대한 차별을 고착화하고 재생산하는 미움이기에, 선과 사랑을 지향하는 도덕의 관점에서 볼 때 옳지 못하거나 악하다고 비판하는 것이 마땅함에도, 아이러니하게 혐오로서의 미움은 – 일상의 도덕률에서 흔히 화해와 용서를 촉구받는 여타의 미움들과는 다르게 – 오히려 미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취급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는 그 답을 너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에서 도움을 받아 찾을 수 있다. 서양의 혐오 연구사가 주로 연구 대상으로 삼아 온 유대인이나 여성, 타 대륙 인종에 대한 혐오 범죄를 비판적으로 연구하는 데에 치중하였던 것과 달리, 너스바움은 진화론적 시각에서 '역겨움'이라는 원천적 감정으로서의 혐오감이 위생과 의료, 과학이 전무하였던 시절에 인간 사회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는 데에 어떻게 순기능을 하여 왔는지를 밝히는 데서 이 책을 시작한다. 그 시절 신체의 배설물, 부패한 음식, 인간과 동물의 사체 등은 접촉한 사람들과 집단 전체를 때때로 원인 모를 질병과 죽음의 위기에 몰아넣었을 것이다. 이러한 원초적 경험이 오염 경로와 예방 지식이 전혀 없는 원시사회에 쌓이게 되면 위험 인자로 추정되는 일체의 것들과 접촉 자체를 우선적으로 피하도록 하는 교육을 강력하게 펼치는 관습이 한 사회에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에서 너스바움은 혐오 속에 담긴 핵심적 관점을 '전염'에 대한 공포에서 찾는다(너스바움, 159). 즉, 인간 사회는 개인의 생존과 사회의 안전을 위해 위험 인자들에 대한 '역겨움'의 혐오감을 사전에 강력하게 공유하여 전염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방어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질적인 위험 인자로부터 인간의 유한한 삶을 더 안전하게 지키고자 하는 '복잡한 투쟁의 자연적 결과'라 볼 수 있는 혐오감이(너스바움, 226)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회 구성원 전체가 공유해야할 '도덕 감정'으로 격상되어 교육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위험한 것이 더러운 것으로, 더러운 것이 옳지 못한 것으로 의미가 강화되며 접촉의 통제가 더 강력하게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혐오의 도덕화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겨냥한 예수의 비판을 현대적으로 새롭게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준다. 하나님과 계약 공동체 사이의 약속이자,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별된 거룩한 법으로 출발한 율법은 사실 현실에서 공동체의 위생과 안전, 나아가 가족과 민족, 나아가 국가 질서를 지키는 생존 도덕이자 생활법 기능을 하였다. 문제는 거룩한 구별의 법이라는 율법이 위험 인자를 가진(혹은 가졌다고 추정되는) 집단들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는 유대 정결법으로 축소되어, 실제적으로는 부정한 대상을 향한 '혐오'를 종교적 '선'이라거나 '옳음'이라는 가치로 정당화하는 위험에 빠지게 된 것이다. 대표적 예로, 예수 시대에 이르러 정결법이 피부병, 사람이나 동물의 사체, 제사 음식, 생리하는 여성, 문둥병자(한센병자), 장애인 등을 불가촉 대상으로 취급하며 '더러움'과 '역겨움'에서 더 나아가 하나님과 계약 공동체 앞에 결코 환대받을 수 없는 '부정한 존재'로 인지되었음을 기억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예수 사역의 시작점이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과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개인과 사회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이질적인 위험 인자에 대한 혐오 감정을 사회적으로 교육하는 데에 익숙해진(너스바움, 182) 인류가 위생과 의료, 과학이 발전한 근대 이후에도 여전히 사회의 안전을 유지하는 집단 도덕 감정으로 혐오를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 큰 문제는 안전해야 할 '사회'의 실체가 사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차별 없이 안정이 보장되는 사회가 아니라, 다수나 기득권의 안전이 우선적으로 혹은 독점적으로 지켜지는 사회라는 점이다. 문명이라 스스로 자부하는 서구 근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여성이나 유대인, 흑인, 성소수자 그리고 이슬람교인 등에 대한 다수의 미움 감정이 사회의 '오염'을 방지하고자 하는 비합리적인 저항 감정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전염에 저항하는 혐오의 감정은 원시사회에서 위험 요소로 추정되는 오염물들에 대한 접촉을 금지하고 존재 자체를 제거하는 실천으로 발전하였는데, 그러한 감정과 실천의 관습이 현대 문명사회에서도 다수와 기득권층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소수자의 존재를 지우고 권리를 차별하는 혐오를 '자연적이고' '도덕적인', 그래서 합당한 증오 감정으로 둔갑한 채 지속되고 있다.

본 연구단이 주목한 지점이 바로 이것이다. 소수자의 존재와 권리에 엄청난 위협과 침해를 가하는 차별을 초래하는 혐오감을 품고 또 공공 공간에서 혐오를 표현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이 결국 소수자의 존재성을 뿌리 깊게 상하게 하는 매우 심각한 비도덕적 행위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뒤집어서 말한다. 자신들의 감정과 표현이 그 형식에서 비록 미움으로 나타날지라도, 그 본질은 잘못된 길로 자신과 사회를 망치거나 위협하는 이들에 대한 선도善導이며 사랑이라고 주장한다. 혐오가 그들의 알량한 도덕이 된 것이다. "윤리를 운운하며 비난받는 자에게 폭력을 가하는 행위, 즉 윤리적 폭력인 것이다."(버틀러, <윤리적 폭력 비판>, 84)

왜 기독교 윤리는
혐오와 결코 동행할 수 없는가

정결법 중심의 율법은 위험 인자를 '더러움'과 '역겨움', 나아가 '부정한 것'으로 인지하게 하여 기피하도록 만드는 혐오 감정을 통해 이스라엘 공동체 안전을 지켜 주었던 생존 도덕이 되었다. 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계약의 전통을 독점하는 집단(남성, 사제, 정치권력 집단)에 의해 율법은 소수자 집단(여성, 이방인, 병자, 장애인 등)을 기득권에서 계속적으로 배제하는 데에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혐오감과 혐오 표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종교 도덕으로 변질된다.

그러나 예수에 의해 혐오를 수단화하는 종교 도덕은 이미 철저하게 해체되었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예수 공생애 사역의 핵심은 유대 공동체가 오랫동안 율법을 방패 삼아 역겹거나 부정하다고 취급하며 공동체로부터 축출하거나 차별하였던 이들과의 동행이었다. 그는 유대 사회에서 거룩한 유대인라면 접촉이 금지된 한센병자, 창녀(이하 성매매 여성), 그리고 사마리아인들과 거침없이 함께 먹고 마시며 복음을 전하였다. 유대 공동체는 한센병 원인을 하나님 앞에 그 부모나 자신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한센병자를 향한 혐오를 그들의 죄에 대한 정당한 분노라 확신해 왔다. 한센병자를 고치신 예수의 치유 사역은 무지와 미신에 사로잡혀 죄 아닌 것을 죄로 둔갑해 차별하였던 이들의 혐오의 도덕을 해체했다. 남편이 아닌 자와 살다가 끌려온 여인에게 돌을 던지려던 유대인들 손에서 결국 돌을 놓게 만든 예수의 침묵은 보살펴 주는 이 하나 없는 가난한 여인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저지르게 된 성매매의 죄를 혐오로 대하지 않고 오히려 제자가 되는 새 삶으로 부르시는 것으로 용서와 사랑의 모범을 보여 주셨다. 민족과 나라를 지키는 종교 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이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제국으로 끌려갈 때 이스라엘 땅에 버려진 사람들의 혼종적 후손인 사마리아인에게 예수는 이스라엘 하나님을 잘못 믿고 있다고 꾸짖으며 존재를 부정하기보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새로운 때가 왔다고 선언하며 사마리아인을 있는 그대로 새 시대에 초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렇게 예수는 소수자들을 배척하는 근거로 사용되었던 혐오의 종교 도덕을 완전히 해체하며, 하나님나라의 새 도덕은 차별받는 자들을 향한 열림과 환대의 도덕, 즉 사랑의 도덕에만 기초한다고 선포하였다.

오늘날 한국 극우 개신교는 겉으로는 선도와 사랑을 표방하고 있지만, 그 선도와 사랑의 대상으로 지목된 이들의 존재 방식과 사회적 권리 등을 부분적으로 혹은 원천적으로 거부하고 반대하고 있다는 면에서 그들의 감정과 행위는 결코 혐오가 아닐 수 없다. 2000여 년 전 예수에 의해 혐오의 정결법이 완전히 해체되고 소수자들을 향한 사랑의 법이 참도덕의 자리에 온전히 놓였는데도, 극우 개신교는 오염에 대한 공포에 기생하여 역겨움과 부정함의 감정을 소수자들에게 투영하고, 그들의 존재를 반대하며 권리 투쟁 운동을 방해한다. 개신교, 즉 protestantism이라고 스스로 표방하지만, 혐오를 그리스도의 도라 철저하게 믿고 실천하여 사실은 중세 이전으로, 그리고 예수 이전으로 퇴화한 무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그들의 독단적인 믿음의 성전聖戰에 사람이 차별받고, 사람이 죽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묵살한 채. 그렇게 혐오의 도덕을 작동시키는 방식에 기대어 극우 개신교 지도자들은 급속히 무너져 가는 교세를 지키기 위해, 그래서 자신들의 교권을 지키기 위해 혐오의 정치학으로 맹공을 펼치고 있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많은 평신도 개신교인들이 이제까지 살아온 삶의 질서(가족, 교회, 국가 질서)가 혼란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데에서 품은 미움의 마음 하나와 거기서 내뱉은 미움의 말 한마디가 결과적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나 혐오 대상들의 생명과 삶을 근본적으로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에 무지하거나 관심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이제는 정말, 개신교인들 모두의 적절한, 합리적인 각성이 필요하다. 목회자만이 아니라 평신도 모두의 변화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는 이웃 사랑의 종교, 기독교가 그 존재부터 흔들릴 날이 곧 닥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김혜령 / 이화여대 호크마교양대학 교수(기독교윤리 전공)

이 글은 2019년 6월 15일 열린 '한국 개신교의 혐오를 분석하다' 연구 발표회 자료집에 실렸다. 한국연구재단 지원을 받아 "한국적 혐오 현상의 도덕적 계보학"을 연구하는 연구단이 여성, 난민, 노인,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연구를 진행하며 전제한 '혐오' 개념을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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