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식민주의 지식인 트린 T. 민하(Trinh T. Minh-ha)는 그녀의 저서 <Woman, Native, Other>에서 지식 자본에 도움을 받는 사람들, 특히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신이 자본에 기생하는 사회적 기생충(Social parasite)임을 잊지 말라고 경고한다. 민하가 강조하는 작가들은 바로 제3세계를 중심으로 한, 글로 투쟁하는 작가들이나 흑인 지식인들을 뜻한다. 끊임없이 엄습하는 죄책감(다른 이들에 비해 높은 교육과 혜택을 누림으로)을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약점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데 사용하라고 충고한다. 프란츠 파농(Franz Fanon)은 말했다.

"흑인을 숭배하는 사람은 흑인을 혐오하는 사람만큼이나 병든 자이다."

근대를 넘어서면서 교육기관은 정부에 종속되어 공교육 기관으로 바뀌었다. 대학은 직업 양성 훈련소거나 막대한 학비를 내고 학위를 받는 지식과 기술의 쇼핑센터와 같이 변했다. 현실에서 대학 강의나 교수직을 맡는 사람들은 더 이상 돈과 명예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끊임없이 강자와 권력에 빌붙어서 스스로 연명하고자 하는 유혹에 시달리게 된다. 몇몇 양심을 팔고 돈에 굴복하는 지식인들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모든 교육 종사자들은 교육 자본에 기생하는 기생충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생충에게도 양심은 있다. 그 양심은 오직 자신이 기생하는 것을 비판하고 그 약점을 지적하는 것으로만 발현된다는 게 민하의 주장일 것이다.

영국 옥스포드대학 교수인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가 사랑의교회 봉헌식에 설교자로 참석했다. 충격이다. 사랑의교회 헌당 감사 예배 브로슈어를 살펴보았다. 놀랍게도 순수 신학자로서 이름을 올리고 설교까지 한 사람은 알리스터 맥그래스가 유일하다. 다른 곳을 보니 맥켄지대학 총장의 이름이 보인다. 영미권에서 총장은 신학자라기보다 신학교의 관리자이자 얼굴마담이다. 여기저기서 지원을 받아 자신의 학교를 돕는 직업이 총장이다. 최근 몇몇 유명 신학자들이 한국의 대형 교회에서 열린 학회나 강연회에 온 적이 있다.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이나 몇몇 신학자도 대형 교회에 설교자로 초대되곤 했다. 그러나 위법과 학력 위조 등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문제를 지적받는 대형 교회의 행사에 참석해 그들의 이익에 복무하는 맥그래스는 쓴소리를 들어 마땅하다. 자신이 볼 때에 요렇다 할 신학적 전통도 없는 100년 남짓의 초라한 역사를 가진 한국의 개신교가 큰 건물 하나 지어 봉헌한다니 와서 설교 정도는 해 주는 아량을 베풀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큰 오점을 남긴 것이다.

사랑의교회 헌당식에서 참석해 설교한 알리스터 맥그래스. "이렇게 아름다운 성전을 헌당한 여러분 모두를 축하한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장명성

영미에서 신학자는 전혀 각광받는 직업이 아니다. 통계에 따르면, 2012년을 기준으로 평균 1년에 7만 불(대략 8400만 원)정도를 벌고 있으며, 점점 하락하는 추세다. 언뜻 보면 꽤나 안정된 직업처럼 보이지만,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6만 불(대략 7200만 원) 이상인 것에 비교하면 전혀 고소득이라 할 수 없다. 게다가 대학원 졸업에 박사 학위까지 취득하고 그토록 힘들다는 교수직에 지원하기 위해 3~4년간 꾸준히 논문과 저서를 발표하여 임용이 되면 연봉이 평균 5만 불(대략 6000만 원)인 것을 확인하면 미국 상황에서는 박봉의 직업임을 알 수 있다. 이 수치는 평균이며, 미국의 유명 대학 신학부 초임 교수는 7만 불 정도이며 시골 신학교의 초임은 3만 불(3600만 원)이다. 한국의 평균 소득이 3만 불임을 감안하여 단순하게 비교하면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5~10년 박사 학위를 마치고 3~5년간의 연구와 경쟁을 거쳐서 정교수로 임용되면 받는 월급이 300만 원 정도란 이야기다. 이 정도 수준의 연봉은 미국에서 목회를 하는 경우 70명 남짓한 교회의 담임목사 연봉과 비슷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영미권에서 신학 교수는 전혀 안정된 직업이 아니다(물론 몇몇 스타 학자들은 예외다). 오죽하면 인문학 계열 학생이 하는 최악의 선택은 신학 박사과정에 들어가는 것이고, 더 최악은 그마저도 못 마치는 것이란 말이 있겠는가. 그래서 영미에서 신학 교수는 좀 더 기름진 밥이나 안정된 삶을 쟁취하기 위해 꿈꾸는 선망의 직업이 아니다. 그야말로 미래의 목회자와 신학자를 길러 내고자 하는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이 가는 길이다.

실제로 필자는 신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중도에 포기하고 미국 대기업에 취직하는 친구들을 본 적이 있었다. 그야말로 소명으로 똘똘 뭉쳐서 자녀의 바이올린 레슨비 걱정을 하며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기도 하는 직업이 미국의 신학교 교수이다. 물론 영미 유학을 꿈꾸는 한국의 신학도들에게는 그들이 선망의 대상으로 보이겠지만 말이다. 오히려 영미권에서 이들은 돈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더욱 존경을 받고, 많은 이가 그들의 한마디에 귀를 기울인다. 그래서 신학교 교수들이 대중잡지에 정치와 사회에 대한 비평을 기고하고 <시카고트리뷴>이나 <워싱턴포스트>에 사설을 쓰고 텔레비전 토론에 나와 정치·사회 이슈를 이야기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장면이 아니다. 재물과 학문적 명예를 함께 섬기지 않는 자들이 신학교의 교수들이며 그들이야말로 마지막까지 썩지 않는 기독교의 양심인 것이다.

만약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그들과 경쟁하여 미국에서 교수가 되려는 꿈이 있다면 제일 먼저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안정된 생활이다. 기다리는 것은 연구실 앞에 줄을 선 학생들이며 매년 새롭게 꾸며야 하는 강의 요목이며 방학 때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받아야 하는 교육 프로그램들이다. 많은 영미의 신학교에서 같은 꿈을 꾸며 신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은 교수들의 권위주의 따위에 굴복하지 않는다. 교수에게 줄을 서서 뭔가를 얻을 생각을 했다면 차라리 돈이라도 많이 주는 곳에 간다. 그래서 그들은 교수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만족한 대답을 얻지 못하면 인상을 찡그린다. 그 박봉을 주면서도 끊임없이 연구하지 않는다고 손가락질하는 곳이 미국의 신학교이다. 그래서 또한 가장 존경받는 직업이 신학교의 교수직이다.

미국 흑인신학의 선구자라 일컬어지는 제임스 H. 콘(James H. Cone)은 필자가 석사를 한 이 시카고의 게렛신학교를 졸업했다. 다음은 게렛신학교 학생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제임스 콘이 자신의 모교인 게렛신학교에 와서 강연할 일이 있었는데, 콘은 "아무도 내가 게렛을 졸업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게렛 같은 곳에서 어떻게 선한 것이 나올수 있겠냐고들 했다"고 말했다. 당시 게렛은 미국의 백인들이 중심이 된 신학교였기에 일견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콘은 "그런데 지금도 현실은 별로 변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하며, 그의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비판받아 마땅한 모교의 신학 교육에 대해 말했다. 그것을 들으면서도 게렛의 교수들은 고개를 끄떡였고 학생들은 웃으며 손뼉 쳤다고 한다. 신학자가 누구인지를 알기 때문에, 적어도 그런 상식이 통하는 사회이기에 가능한 사건일 것이다.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원래 무신론자였다고 한다. 맥그래스는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신학교 교수가 된 이후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기독교 비판서인 <만들어진 신 The God Delusion>을 비판하는 책, <The Dawkins Delusion?>과 <Dawkins' God>를 출판하면서 대중에 이름을 알렸다. 이후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도킨스와 함께 등장하며 비상한 관심을 받는 인물이 되었고, 이는 맥그래스를 폭넓은 세계 대중을 상대로 활동하는 지식인의 반열에 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에 대한 외부의 비판을 방어하는 만큼 교회 내의 문제에는 민감하지 못한 듯하다. 그래서 나는 알리스터 맥그래스와 같은 신학자는 비판받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교회를 무비판적으로 찬양하는 신학자는 교회를 무조건 혐오하는 사람만큼이나 병들었다. 맥그래스는 기독교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기독교를 비판한다고 자신이 비판한 도킨스와 하나 다를 것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신학자에게 비판 의식을 빼 버리면 남는 것은 없다. 필자는 시카고신학교의 이전 총장이었던 앨리스 헌트(Alice Hunt)에게 신학교와 신학자의 책임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신학교와 신학자는 교회와 팽팽한 긴장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신학교가 교회를 후원하거나 지지하는 세력이 아니라 교회의 미래를 제시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든 기구는 언제나 설립되고 나면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 스스로 타협하기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가장 타락하기 쉬운 기독교 기관 중 하나이다. 신학교는 끊임없이 교회를 감시하며 부단한 신학적 연구를 통해 교회의 미래를 제시해야 할 책임이 있다. 신학자는 그런 신학교와 신학을 지키는 파수꾼이다. 잠든 파수꾼에게 맡길 과업은 없다.

한수현 / Chicago Theological Seminary 신약학 박사, 감신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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