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에서 명령하고 여호수아서에서 실행하는 '진멸'(히브리어 '헤렘')은 기독교의 오랜 고민이었습니다. 헤렘이 야훼의 명령이라는 근거는 기독교가 벌인 전쟁을 '거룩한 전쟁'이라고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 대대적인 살육은 나중에 유대인과 기독교 역사에서도 하나의 실례로 사용해 왔습니다.

'헤렘'은 구약성서에서 모두 80회 언급되는데, 신명기 역사서에 49회 등장합니다(신명기: 9회, 여호수아서: 27회, 사사기: 2회, 사무엘상: 8회, 열왕기상: 2회, 열왕기하: 1회). 이것은 하나님께 바치는 '선물', 재판의 '판결', '진멸'과 같은 뜻입니다. '진멸'이 가장 중요한 뜻으로 쓰였습니다.

실제로 여호수아서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 교회 때문에, '헤렘'은 기독교 역사에서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불러왔습니다. 스위스 종교개혁자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는 모세와 미디안의 전쟁과 여호수아서 아말렉 전투를 우상숭배자들에 대한 전멸 전쟁으로 해석했으며, 윌리엄 구지(William Gouge, 1575~1653)는 교황 절대주의를 아말렉으로, 개신교를 여호수아로 이해했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미국이 아메리칸인디언을 처참하게 학살하는 시기에도 회중교회 목사 코튼 매더(Cotton Mather, 1663~1728)에 의해 적용되었습니다. 여러 면에서 탁월한 신앙인이었는데도 이방인을 적대하는 면에서는 헤렘을 적용하여 행위를 정당화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에 앞서서 주어진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라"(신 20:16)는 명령과 실행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여호수아서의 헤렘

헤렘은 본래 가나안 정복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명령으로, 맨 처음 모세에게 주어집니다(신 7: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신 7:1-2)."

이러한 명령에 따라 여호수아는 가나안의 시민들(남자, 여자, 그리고 아이들)을 상대로 조직적 학살을 감행하는데,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가축들까지도 진멸합니다(수 8:24-25).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수 6:21)."

그리고 산지 위에 있는 아이(Ai)를 취하려는 첫 번째 시도가 실패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야훼에게 모든 도시를 '헤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래서 탈취물을 빼돌린 아간은 그의 자녀, 그리고 심지어는 짐승들도 함께 돌에 맞아 죽게 됩니다. 그런 다음에 두 번째 공격이 성공하고, 전체 인구 1만 2000명이 학살되는데, 도망가는 생존자들도 학살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수 8:24-25).

"이스라엘이 자기들을 광야로 추격하던 모든 아이 주민을 들에서 죽이되 그들을 다 칼날에 엎드러지게 하여 진멸하기를 마치고 온 이스라엘이 아이로 돌아와서 칼날로 죽이매 그날에 엎드러진 아이 사람들은 남녀가 모두 만 이천 명이라(수 8:24-25)."

여호수아의 정복 전쟁은 모든 땅에 걸쳐서 진행됩니다.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이 전멸(헤렘)당했습니다. 오로지 세겜 사람만이 살아남았는데, 이것은 아마도 족장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부족 간의 동맹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창 12:4-9). 기브온 사람들은 어찌된 영문이든지 간에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종이 되었습니다. 헤렘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습니다(수 10:40; cf. 11:10-11, 11:23).

"여호수아가 온 땅, 곧 산지와 남방과 평지와 경사지와 그 모든 왕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무릇 호흡이 있는 자는 진멸(헤렘)하였으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의 명하신 것과 같았더라(수 10:40)."

나중에 다시 이 법은 이스라엘의 왕조 초기에 사울과 다윗에 의해 각각 부정적으로 또는 긍정적으로 실행되었습니다(삼상 15; 27; 30장).

가나안 족속들은 진멸당했는가

진멸(헤렘) 이야기는 문학적인 과장일까요? 아니면 실제로 일어난 끔찍한 사건들이었을까요? 과연 기독교 윤리에 민감한 현대 독자들이 엄청난 규모의 인종 학살(인종 청소)을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요. 윌리엄 F. 올브라이트는 헤렘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정복자인 이스라엘 민족이 원시적인 에너지와 생존을 위한 무자비한 욕망을 타고난 거친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유일신 신앙의 미래를 위해서는 다행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결과적으로 가나안 족속들에 대한 학살로 인해서, 야휘스트의 기준들을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주저앉히고 말았을 것이 거의 확실한, 두 유사한 백성의 완전한 융합이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나안 족속들은, 그들의 술 마시고 법석을 떠는 자연-숭배, 뱀 상징물과 호색적인 나체로 진행하는 풍요제의, 그리고 조잡한 신화가 목축적인 단순성과 정결한 삶, 숭고한 유일신 신앙, 그리고 엄격한 윤리적인 법률을 갖춘 이스라엘로 대체되었다."

성서를 '글자 그대로' 믿고 해석하는 이들은 여호수아서의 진멸 전쟁을 역사적으로 실행된 행위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여호수아가 진멸했다는 족속들이 사사기에 보면 건재합니다(삿 3:5).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그들의 딸들을 맞아 아내로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고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삿 3:5-6)."

또한 단순히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군사 임무를 맡기도 했으며(삼하 11:3), 이들은 솔로몬의 역군이 되기도 합니다(역대하 8:7-8).

"이스라엘이 아닌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남아 있는 모든 자 곧 이스라엘 자손이 다 멸하지 않았으므로 그 땅에 남아 있는 그들의 자손들을 솔로몬이 역꾼으로 삼아 오늘에 이르렀으되(역대하 8:7-8)."

이렇게 성서 자체도 진멸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가 존재합니다. 그뿐 아니라, 고고학 발굴 결과는 이스라엘이 대규모로 이집트를 탈출하지도, 단기간에 가나안 땅을 전체적으로 정복하지도 않았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물론 일부 사람들이 분명히 이집트를 탈출했으며, 일부가 정복 전쟁을 벌인 것이 역사적으로 분명합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서가 묘사하는 것과 같은 대규모 정복 전쟁은 없었다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그렇기에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가나안 족속에게 행해진 진멸 명령과 실행에 대한 이야기는 새로운 해석이 필요합니다.

신명기 역사서

흔히 '오경'五經(Pentateuch)이라는 용어는 창세기부터 신명기를 공통된 주제(땅과 자손의 약속)로 묶을 수 있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명기가 오경(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에서 조금 불분명한 위치에 있다는 의견이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독일 학자 마르틴 노트(Martin Noth)는 1948년, <오경 전승사>에서 신명기를 오경에서 떼어 내고 신명기를 '신명기 역사서'(Deuteronomistic History, 여호수아·사사기·사무엘서·열왕기서를 포함)와 연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일찍이 1806년 드 베테(W. M. L. de Wette)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그는 열왕기하 22~23장(대하 34~35장)에 기록된 요시야왕의 개혁(기원전 621년)을 신명기와 비교해서 분석했습니다. 그는 요시야왕의 개혁이 신명기 법에 기초하고 있으며, 대제사장 힐기야가 발견한 '율법책'(왕하 22:8)이 신명기 12~26장과 동일한 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이 '율법책' 내용은 모세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그 기록 시기는 비교적 후대라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이러한 학설은 오경 연구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으며, 대부분의 학자들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 율법책의 초기 기록이 언제인지에 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보수적인 관점에서는 당연히 모세 시대에 기원한 것으로 봅니다. 사무엘 시대에 북이스라엘 지역에서 기원했다거나, 요시야 할아버지인 히스기야왕 시대에 기록됐다는 관점 등이 있습니다. 신명기 역사서는 최소한 두 단계를 거쳐서 편집되었습니다. 첫 주요한 구성은 포로기 이전인 요시야왕 시대(기원전 640~609년)에 있었으며, 두 번째 구성은 포로기 이후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신명기와 여호수아서를 요시야왕 시대 상황에서 해석할 때 이해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요시야

여호수아서를 신명기 역사서의 일부분으로 형성되게 한 것을 요시야 시대의 정치 역학들로 본다면, 요시야적 역사(Josianic History)의 근간들이 여호수아서를 이해하는 데 무엇보다도 중요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서와 요시야왕의 관계를 보여 주는 가장 설득력 있는 단서는, 수 15:21-62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유다 지파의 영토 안에 있는 도시와 마을의 명단일 것입니다. 요시야왕 재위 유다 왕국 국경선 안의 지리 상황과 이 도시 명단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그뿐 아니라 이 명단에 언급된 지명들은 동일한 지역 내의 기원전 7세기 인구 거주 형태와 상당히 부합합니다.

많은 신학자가 여호수아서 전체를 통해 숨어 있는 요시야왕과 여호수아를 비교 분석했습니다. 여호수아라는 전설적인 인물을 통해 요시야왕은 7세기 남유다 왕국의 국내외적인 어려움을 타개하려고 했습니다. 여호수아의 '외투'를 입은 요시야왕이 북이스라엘의 영토와 친아시리아 지방 세력의 영토 등을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이 얼마나 강했고, 또 그것들을 치밀하게 준비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헤렘은 가나안 족속들과 이방 신(상)을 향해서 명령되었는데, 가나안 민족들을 향한 헤렘은 여호수아서에서 실행되지만, 신 7:5, 16, 25-6; 13:6-18의 이방 신(상)에 관한 헤렘은 여호수아서에서는 실행되지 않습니다. 아세라상을 비롯한 이방 신상 파괴 명령은 열왕기하 23장에서 묘사하는 요시야의 이방 신상 파괴 기사와 거의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헤렘을 요시야 개혁과의 정치·경제 역학에서 살펴보아야 그 뜻을 더 분명히 알 수 있게 됩니다.

헤렘의 새로운 해석들

여호수아는 땅의 정복과 소유 과정에서 지도력의 전형을 보여 줍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다양한 집단에 지배력을 행사하고, 군대와 족장뿐만 아니라 언약궤를 운반하는 제사장에게도 방향을 지시합니다(수 3:6; 6:8; 8:3-4). 신명기 사가가 묘사한 여호수아의 역할에는 다윗 왕정을 회복하려는 요시야의 통치를 암묵적으로 지지하게 하고, 영토 회복이 하나님 명령이라는 점을 각인하는 데 많은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영토 확장

신명기에서 가나안의 정복과 점유는 단순한 제국의 확대가 아닌, 야훼가 우주의 최고신이라는 인식의 기초가 됩니다(신 4:39). 헤렘은 약속한 '땅의 정복'이라는 큰 틀에서 주어진 명령입니다(신 20장).

요시야 시대보다 3세기 이전인 솔로몬이 죽던 때에, '북쪽 열 지파들'이 별도의 이스라엘 왕조 국가를 세우기 위해 다윗 왕가의 통치에서 떨어져 나가 북이스라엘이 되었고(왕상 11~13장), 두 세기 이후인 기원전 721년에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게 멸망당합니다. 그래서 요시야의 '개혁'이 절정에 달하기 이전인 100년 동안, 이전에 북왕국에 속해 있던 영토와 백성들은 아시리아 제국의 여러 지방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아시리아 제국이 붕괴되어 서쪽 지역에 대한 통제가 무너진 상황에서, 요시야는 북쪽에 대한 다윗 왕조의 지배권을 재천명합니다.

처음 두 차례 전투인 여리고와 아이(벧엘 지역) 전투는, 아시리아가 사마리아주에서 철수한 뒤 요시야 팽창주의의 첫 번째 목표였던 지역에서 치러집니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르단강 지류 건너편에 위치하는 여리고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최남단 전략 요충지였습니다. 북왕국의 종교 중심지로서, 성경 집필자들의 심한 증오 대상이 되었던 벧엘은 아시리아인들이 이방 민족을 데려다 정착하게 한 중심지였고, 이 두 도시는 후대에 요시야의 군사 활동 목표가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전략적으로 대단히 중요하고 토지가 비옥한 지역인 쉐펠라 정복에 관한 성경 이야기는 실제로 유다가 이 지역을 합병하여 영토를 확장한 사실과 비슷합니다. 유다의 전통적인 곡창지대였던 이 지역은 그보다 수십 년 전 아시리아에 정복되어 블레셋 여러 도시에 지배권이 넘겨졌었고, 그다음에 북쪽 지역인 하솔과 도르(수 11장)는 기원전 7세기 관점에서 장차 차지해야 할 영토의 정복 계획을 나타낸 것입니다.

하솔은 아득한 고대에 이 도시가 가나안 도시국가들 가운데에서 가장 유력한 도시로 명성을 날린 사실뿐만 아니라, 여호수아서가 집필되기 불과 1세기 전의 여러 현실도 상기합니다. 곧, 하솔은 북쪽 이스라엘 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고, 얼마 뒤 아시리아 제국의 중요한 지방 통치 거점이 되어 웅장한 궁전과 요새가 건설된 도시로서, 결론적으로 여호수아서에 묘사된 북부 여러 지역은 멸망당한 이스라엘 왕국 영토와 후대 아시리아의 여러 속주와 일치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요시야가 여호수아의 목소리를 통해 영토 회복에 동참해 달라고 이끌어 내기 위한 또 하나의 정치적 메시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외세 척결

신명기 20장에 보면 헤렘의 대상은 가나안 땅 7족속 주민인데, 가나안 원주민들이 시대를 반영하는 본문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5족속은 출 13:5, 왕상 9:20, 대하 8:7, 6족속은 출 23:23, 33:2, 34:11, 신 20:17-18, 수 9:1, 11:3, 삿 3:5, 느 9:8, 7족속은 신 7:1, 수 3:10, 24:11에 언급됩니다. 이렇게 진멸해야 할 가나안 족속의 범위가 명확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가나안 족속을 향한 헤렘 법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요시야와 개혁 지지자들은 개혁의 성공을 위해 반대파들을 가나안 족속으로 상정했습니다. 아시리아 세력을 지지하던 지방 지주들과 왕권에 도전하는 도시 엘리트들을 가나안 족속들로 묘사했습니다. 이들은 학살당할 만하며 그들의 모든 재산은 군주에 의해 파괴될 만하다는 생각에 근거를 둔 인종 정화 정책을 폈습니다. '가나안인'은 '이스라엘이 아닌(not Israel)' 것을 의미했고, 동시대의 정치적인 허구적 표현으로, '다윗가의 주권에 복종하지 않는' 것을 뜻했습니다.

히스기야 아들 므낫세가 세상을 떠나고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몬(기원전 642~640년)이 스물두 살 나이로 왕이 되는데, 아몬왕은 심복들에게 암살당하고 그 심복들은 다시 '그 국민'(히브리어 '암 하아레츠')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왕하 21:23). 그리고 요시야왕이 겨우 여덟 살에 왕위에 오를 정도로 혼란했습니다(왕하 22:1).

아시리아 60년 지배 체제에서 얻은 결론, 곧 야훼 종교에 대한 위협이 무엇보다도 외부의 이교적인 영향에서 비롯되었다는 결론이 일반화하면서, 이제는 그것이 종교적인 원수 개념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신명기 역사서 배후에 있는 개혁가들은 야훼 종교 안에서 잘못 발전된 것으로 여긴 모든 것을 폭넓게 '가나안의 유산'으로 이해했습니다. 유일한 야훼 숭배를 위한 정치적인 해결책은 모든 '가나안 사람들', 곧 개혁가 자신들의 영토 안에 살고 있는 집단이든 그 근방에서 사는 이교 집단이든 개혁을 거부하는 모든 사람과의 정치적인 동맹 관계를 금지하면서 동시에(신 7:1), 전쟁 시에는 자신의 영토 안에 있는 모든 이방 성읍을 가차 없이 파괴할 것을 명하는 데 있었습니다(신 20:15-18).

따라서 가나안 족속을 향한 헤렘은 실제로는 여호수아 시대의 '객관적인 역사'가 아니라, 요시야계 편집자가 당시에 열렬하게 믿었던 목적을 정당화해 주는 수많은 '역사 속의 교훈' 중 하나일 뿐입니다. 인종 학살을 명하는 것처럼 보이는 수사학적인 공격은, 사실 자신들의 정체성과 고결함이 수십 년에 걸쳐 침해당하며 느꼈던 억압된 민족적 분노의 표현으로, 이는 친아시리아 세력들과 다윗 왕정을 반대했던 지방 세력들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반대자일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정치·경제·신앙적으로 파탄에 몰아넣은 세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야훼에 대한 순종

헤렘 법은 이방 민족과의 혼인을 금하고(신 7:3-4), '다른 신'을 섬기자고 유혹하는 이들을 진멸할 것을 명령합니다(13:6-18). 이것은 '온 이스라엘'(신 13:11)의 순수한 혈통 보존과 유일신 숭배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 기록을 보면, 이스라엘은 단일 형통이 아니었습니다(출 12:38; 민 11:4; 수 14:13; 15:16-19; 삿 1:10-20; 삼상 15:6).

헤렘 법이 순수한 이스라엘을 강조하는 것은, 야훼 하나님의 도덕적 순결과 의로움을 위해 이스라엘이 전적으로 투신하는 것과 아시리아 종교를 비롯한 이방 종교와 명백히 단절하는 것이 강하게 필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이 가진 장점 때문에 택함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기에 택함 받았습니다(신 7:7). 그 사랑이 헤렘에 대한 순종으로 돌아올 때, 야훼 하나님은 '인애'(7:9)를 베푸실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국제 정황 가운데서 곤경에 처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신앙의 근원인 야훼께로 돌이키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온전히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것(헤렘)을 의미했습니다.

거룩한 공동체

헤렘 법은 또한 공동체의 순수성과 회복에 기여합니다. 이교적인 것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진멸 없이는 야훼의 신앙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전리품은 신의 저주를 받은 것이기에 전적으로 성별하여 모두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완전한 헤렘은 숨 쉬는 모든 것의 살해(신 20:6)와 모든 파괴할 만한 것의 파괴를 요구합니다. 태울 것은 모두 태우지만(신 7:25-26), 태울 수 없는 귀금속들은 성전 곳간으로 옮겨지며(수 6:24), 바쳐진 것들은 어느 하나도 개인이 소유할 수 없었습니다(신 13:17). 다시 한번 이토록 강력한 명령은 어디까지나 가나안의 바알주의와 타협하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신명기적 이념 상황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원수의 것은 그 무엇이든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가증한 것'입니다(신 7:25-26). '가증히 여기는 것'이라는 낱말은 이집트어에서 빌려 온 것입니다. 또한 시돈으로부터 나온 이집트 스타일의 석관에 새겨진 페니키아 비문에서 같은 어원을 가진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온 가족과 소유물들과 함께 멸망당한 여리고의 파괴와 아간 이야기 가운데서 예증된 바와 같이 '철저히 멸하여 바쳐야' 했습니다.

신명기 7:25-26에서 볼 수 있듯이 이스라엘은 악의 모양 자체까지도 버려야 합니다. '그들의 신들의 새긴 형상들'을 만들기 위하여 사용된 값비싼 금속까지도 그것이 얼마나 값이 나가든 중요치 않고 진멸할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가나안의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철저히 파괴해야 했습니다. 야훼를 대신하는 조각한 신상(신 7:5), 신상에 입힌 금과 은(신 7:25), '말과 마차'(수 11:6)로 표상되는 비신앙적 힘의 논리 등은 모양까지도 파괴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것은, 신명기의 신학적 반성이 부여한 하나의 종교 개념입니다.

이렇게 야훼 하나님께 속할 수 없는 가증한 것의 진멸은 공동체성으로 이어집니다. 이스라엘 사회 조직 속에서는 개인보다 집단이 더 중요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한 남자의 확대가족은 때로 그의 재산의 일부분으로 간주되었고, 헤렘은 그것의 금기 상태(taboo status)를 다른 물건으로 전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요소는 아간의 가족과 그의 소유물 파괴 기사와 아이성 전투에서 일어난 36명의 죽음을 잘 설명합니다. 헤렘은 하나의 파괴 개념이 아니고 광대한 거룩 개념과 연관됩니다. 이러한 관계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좋은 환경을 지속하기 위한 공동체의 책임감에 기초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은 '공동체적 개인'입니다.

이스라엘은 물질의 번영보다 하나님 함께하심의 가치가 더 우월하다는 것을 배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행위가 일시적이었던 반면, 그 파장은 공동체 전체 책임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헤렘 법이 잘 알려 주었을 것입니다. 가증한 것이 무엇이든 이스라엘에서 헤렘되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공동체를 위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진멸' 명령은 하나의 시적 언어로 읽혀야 합니다. 야훼의 백성들에게 '거룩' 관념을 확고하게 알려 주는 이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의 거룩성과 구별성에 관한 메시지일 뿐, 이방 민족에 대한 '학살'의 실행 명령이 아닙니다.

야훼 공동체를 위하여

호흡이 있는 모든 것을 진멸하라는 명령은 여호수아 시대의 '사실적 역사'가 아니라 정치·경제적 의도가 담긴 신명기 역사가의 편찬된 역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이념이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하게 요시야의 개혁에 힘을 실어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입니다.

헤렘은 요시야왕의 권위를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해서 이방 민족에 대한 개혁을 뒷받침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아시리아를 비롯한 외세에 저항하고, 중앙집권화에 공헌하였습니다.

아울러 헤렘은 야훼 하나님 신앙을 파괴하는 여러 이방 요소들을 제거해, 이스라엘이 이방 신앙으로부터 부정적인 영향을 받지 않게 하고, 이스라엘의 공동체성을 굳건히 다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신명기 역사서 재편집 시기인 포로기 이후에, 야훼 신앙을 지키기 위해 다시 한번 헤렘 개념이 등장합니다. 이는 느헤미야와 에스라서에 녹아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에서 헤렘이 집행되었던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친히 아시리아 제국을 통하여 사마리아를 심판하였으며(기원전 722/721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기원전 587/586년)을 통해서 예루살렘을 파괴하였고 포로 생활을 하게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읍은 회복되는 데 70년이 걸렸습니다. 따라서 이 헤렘은 다른 민족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1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적용되었던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헤렘은 타민족에 대한 진멸이 아닌 이스라엘 스스로의 거룩함과 야훼이즘을 위한 자기 선포이기도 합니다. 거룩한 야훼 공동체로 거듭나기 위해 이스라엘은 야훼에게 헤렘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 내용은 팟빵에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

*팟빵 '에르고니아 라디오' 채널 바로 가기: http://www.podbbang.com/ch/12827
박태순 / 부천 새들녘교회를 섬기고 있으며, 신학 아카데미 에르고니아에서 신학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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