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인가

기독교는 율법과 혈연 중심의 민족종교를 넘어섰기에 세계 보편 종교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한국에 전해진 기독교, 한국 기독교인의 대다수는 기독교인이라기보다는 고대 유대교인에 가깝다. 이슬람 국가를 제외하면 거의 세계 최고 수준인 남성 '할례'(포경수술) 비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2500여 년 전 확립된 유대인들의 각종 율법 규정이 확연히 다른 시간과 장소, 문화권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에게까지 상당 부분 문자 그대로 남아 금과옥조처럼 여겨지는 현실이 그렇다.

율법의 '문자'가 아닌 '정신'을 실현하고자 한 예수는 율법을 거스른다는 이유로 율법가들에 의해 희생되었는데, 예수를 따른다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다시 예수를 죽인 율법가 편에 선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막 2:27)이라는 예수의 정신을 반대로 알아듣고는, '주일성수主日聖守'라는 표어를 내세워 사람을 안식일에 종속하게 한다. 사람보다 조직과 의례를 더 중시하는 분위기가 강력하다.

오늘 한국 기독교인들은 우상숭배 개념도 신약성경보다는 다분히 고대 유대인들의 문자주의적 시각 안에 머문다. 사실 고대에는 자연현상을 신처럼 숭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세계 어디서든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유대교 본연의 사상 중 독특한 점이 있다면, 신이 그 자연을 초월하는 분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교 엘리트 지도자들은 자연이나 자연의 형상을 신과 동일시하지 말라며 경계했다. 십계명의 일부인 우상숭배 금지 조항도 그 일환이다.

다시 말해, 우상을 섬기지 말고 절하지 말라는 조항(출 20:4; 신 5:8)은 본래 동물이나 새 등의 구체적인 형상 안에서 신을 보면서, 자존자·초월자로서의 신(야훼)을 다신교적 최고신 또는 부족 신(엘) 수준으로 격하해 버리는 고대 이스라엘 대중의 종교적 몰이해를 향한 엘리트 사제 계급들의 신학적 경고이다. 신은 특정 형상 안에 갇히지 않는 초월자이시니 구체적인 형상을 신인 양 경배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을 강조하다 보니, 어떤 형상이든 만들지도 말고 절하지도 말라는 규정도 생겨났다. 요점은 자연의 구체적인 형상 자체를 신처럼 섬기지 말라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풀어 보자면, 어떤 것이든 하나님보다 더 높여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보다 높인다는 것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서는 이러한 물음을 중시하면서, 숭배의 문자적 의미보다는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우상숭배,
하나님을 인간의 욕심 안에 가두는 행위

신약성경에는 구체적인 형상을 숭배하지 말라거나 절하지 말라는 차원의 우상숭배 금지 규정은 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 '음행'·'탐욕' 등 '세상적인 일에 마음을 쓰는 행동'을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으로 우상숭배偶像崇拜(에이돌로라트리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엡 5:5; 빌 3:19 참조).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우상숭배는 단순히 어떤 형상에 몸을 굽히는 행위가 아니다. 우상 앞에 놓인 제물을 그리스도인이 먹으면 우상숭배의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설교했다. 요지인즉,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세상에 우상이랄 것이 뭐 있겠는가, 우상 앞에 놓인 제물은 그저 음식일 뿐, 구원을 얻고 못 얻고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고전 8:4-8).

다른 신 앞에 바쳐진 제물을 먹는다고 해서 영혼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에 다른 어떤 것을 신으로 간주할 이유도 없다는 뜻이다. 절하는 행위도 같은 맥락이다.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우상숭배란, 어떤 형상 앞에 절을 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을 인간적 욕심 안에 가두는 행위를 의미한다. 자신의 이익을 구하는 행위의 수단 내지 근거로 하나님을 들먹이는 행태가 하나님을 우상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행위, 즉 우상숭배인 것이다.

보통 때는 하늘에 모셔 두고 무관심해하다가 아쉬울 때 '하나님', '예수님' 하며 욕구 충족을 위해 찾는 그런 수준이라면, 하나님을 욕심 안에 가두는 행위이니, 그것이야말로 우상숭배라는 말이다. 당연히 그런 우상숭배는 멀리 해야 한다. "자신의 이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이익을 도모"하는 행위를 해야 하는 것이다(고전 10:24).

'상'에 대한 집착을 넘어라

그럼에도 한국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문자주의(literalism)에 사로잡혀 있다. 대체로 우상의 속뜻보다는 고대 유대교 율법의 문자적 정의에만 얽매어 어떤 형상에 절하기만 하면 무조건 단죄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불상이 그저 '상'과 연결된다는 이유로 '우상'시하고, 개신교인은 천주교인이 성모상에 절하는 행위조차 비난한다.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님을 낳은 분에 대한 공경의 표시인데 — 물론 천주교인 가운데도 마리아를 신과 동급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 교회사적 의미나 그 속뜻을 알려 하지 않는다. 물론 알려 주는 이도 없다. 무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저 문자적 의미만 알아들으니, 허리를 굽히고 합장한다는 행위만으로 단죄한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다반사로 하는, 욕망에 마음을 굽히고 돈에 허리를 굽히는 행위가 사실상 우상숭배라는 사실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별 반성이 없다.

절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은 앞서 말한 대로, 자연현상을 신처럼 간주하던 시절에 생긴 금지 규정이다. 하지만 오늘은 자연이 탈성화해서, 자연은 그저 자연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복 대상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무가치해졌다. 그로 인한 자연 파괴를 염려하고 반성하면서 자연주의 내지 생태학이 주요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요즘처럼 세속화한 세상에서 흙이나 청동으로 만든 형상 자체를 신이라 생각하고 복을 구하는 이가 어디 있는가.

가령 불자들이 불상에 절을 하는 것은, 본래 그 너머의 진리에 존경을 표시하는 행위이다. 창을 통해 밖의 경치를 보듯이, 형상 너머의 진리를 형상을 '통해' 보고자 하는 행위인 것이다. 물론 성모(마리아)를 신과 동일시하는 가톨릭 신자가 있듯이, 불상을 불교적 진리 이상으로 생각하는 불자들도 있지만, 그것이 기독교의 전부가 아니고, 그것이 불교의 전부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부처님오신날이었던 5월 12일, 경북 영천 은해사 봉축 법요식에 참석한 황교안 대표. 합장이나 반배 등 불교 예법에 따르지 않아 논란이 일었다. JTBC 뉴스룸 갈무리

황교안 대표는 기독교인인가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부처님오신날'(5월 12일)에 경북 영천 은해사 '봉축 법요식'에 참석했다. 그런데 당시 주요 의례인 '관불 의식'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에 손사래를 치며 응하지 않았고, 법회 중 수도 없이 했어야 자연스러울 합장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러려면 차라리 가질 말지, 갔으면 최소한의 예의 한 번 지키지 않느냐'며 세간의 비판이 쏟아졌다.

물론 그의 자기중심적(배타적) 종교 행위에 대해 '역시 황교안!' 하며 내심 편을 드는 보수 기독교인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3월 15일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과 만날 때도 황 대표는 합장이 아니라 악수로 대신했을 뿐더러 대웅전에도 참배하지 않은 데 대해 불교계 언론이 비판을 제기하자, 한국교회언론회는 황 대표 편을 들며 불교계를 재비판하는 논평을 내보냈다.

황 대표도 그런 득실 차이를 염두에 두었는지 모를 일이지만, 어떻든 그가 불교계 최대 행사 부처님오신날 봉축 법요식 때 합장 한 번 하지 않은 이유는 누구든 추측할 수 있는 일이다. 합장 행위만으로도 우상숭배 운운하며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보수 주류 개신교의 배타주의 신앙 탓이다. 그리고 황 대표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까지 예수를 죽일 것인가

종교적 형상물에 존경을 표하는 행위를 우상숭배로 몰아가는 일종의 '형상 알레르기'는 종교적 의미, 신학적 내용을 파악하거나 구분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일이다. 성경 내용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무지의 반영이기도 하다. '우상'을 문자 그대로만 받아들이고 문자에 맞지 않으면 쉽게 단죄하는 태도는, 바로 그런 이유로 단죄되어 죽은 예수를 다시 죽이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그 예수가 옳은 분이라고 믿는다면서도 상당수 기독교인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실상 예수를 단죄하는 자리에 다시 선다. 종교의 이름으로, 율법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는' 사례가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횡행하고 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이 어디 있으랴. 그래서 무소부재하다고 하지 않는가. 세상천지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곳이다. 어디서든 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신앙의 모범을 보일 수 있을 때, 정치인 자격도 획득된다. 신앙의 이름으로 해야 할 것은 포용·용서·사랑이며, 해서는 안 될 것은 정죄이다. 언제쯤 한국교회가 우상숭배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황 대표의 태도는 하나님께서 이미 깨끗하다고 하신 것을 저 혼자서 속되다며 금기시한 베드로의 잘못(행 10장)을 오늘날 반복하는 일과 다름없다. 그는 앞으로 우상의 신학적 의미와 역사적 사실을 다시 파악하고 제대로 된 기독교인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쉽지 않아 보인다. 만일 그렇지 못한 채 앞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더 넓혀 가게 된다면, 그것은 한국 사회 전체는 물론 기독교계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그가 정말로 지금 이상의 정치적 위치에 오르고 싶다면,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종교적 실천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부터 차근차근 다시 공부해야 할 것이다. 진심 어린 조언이다. 아울러 유력 정치인을 초청해 은근히 권력과 밀착하면서 내심 세를 과시하려는 종교계의 관행적 행위도 이 기회에 근절되었으면 좋겠다. 기독교계는 물론 불교계도, 또는 그 어디도 종교적 순수성부터 회복할 일이다.

*이 글은 <유일신론의 종말, 이제는 범재신론이다>(동연) 101~106쪽에 기반해서 썼다.

이찬수 /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종교평화학자. 서강대학교 종교학과에서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는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문화신학회 회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인간은 신의 암호>(분도출판사), <종교로 세계 읽기>(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평화와 평화들>(모시는사람들) 외 다수 책과 논문 여러 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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