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두 신학도는 전남도청을 사수하다 계엄군의 총탄에 숨을 거뒀다. 문용동(사진 왼쪽)은 '전도사'로, 류동운은 '열사'로 불린다.

[뉴스앤조이-이용필 기자] 전두환과 신군부는 39년 전 총부리를 광주시민에게 돌렸다. 비상계엄에 반대하며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과 그들을 돕는 시민을 폭행하고 살해했다. 5·18기념재단에 따르면, 광주 항쟁으로 168명이 죽고 4782명이 부상을 입었다. 행방불명자, 암매장, 소각된 사람까지 더하면 5·18 희생자는 더 많다.

피바람이 몰아쳤던 역사의 한복판에는 목회자를 꿈꾸는 신학도들도 있었다. 5·18 민주화 운동 당시 호남신학대학교(최흥진 총장)에 재학 중이던 문용동은 계엄군의 만행을 두 눈으로 지켜봤다. 계엄군에 폭행 당한 시민을 돕다 시위에 참여했다.

"군의 투입, 공수부대 개입 드디어 터질 것이 터져 버렸다. 안 터져야 하는 것을, 안 벌어져야 하는 것을 무자비한 공수부대 곤봉과 군화 발질로 학생들을 피투성이가 되도록 두들기고 군화로 짓이겨 군용 트럭에 싣는다. 학생이나 시민이나 달려들어 개 패듯이 끌고 간다. 목사님(항의하는)도 군화 발질. 반기절한 시민을 업어다 병원에 치료했다. 맞은 상처도 치료했다." (문용동의 5월 18일 자 일기 중에서)

"도청 앞 분수대 위의 시체 관 32구, 남녀노소 불문 무차별 사격을 한 그네들 아니 그들에게 무자비하고 잔악한 명령을 내린 장본인. 역사의 심판을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리라" (문용동의 5월 21일 자 일기 중에서)

광주시민은 총칼을 든 계엄군에 대항하기 위해 무장을 갖췄다. 시민군은 도청에 무기고를 만들었다. 무기고에는 총기류, 수류탄, 다이너마이트 등이 있었다. 문용동은 군 경력을 살려 탄약 관리반에 지원해 폭발물을 관리했다. 끝까지 남아 도청을 사수하던 문용동은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총탄에 숨을 거뒀다.

문용동은 목숨을 부지할 기회가 있었다. 숨지기 하루 전 가족과 친구가 찾아와 도청을 나가자고 권면했다. 그러나 문용동은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할 경우 도청을 중심으로 반경 5km 정도 파괴될 수 있다. 나는 신학도로서 주님의 종 양심으로 이 위험한 폭발물을 방치해 둔 채 도저히 떠날 수 없다"고 거부했다.

한신대학교(연규홍 총장)에 재학 중이던 류동운은 비상계엄으로 휴교되자 집이 있는 광주에 내려왔다. 류동운은 5월 18일부터 시위에 동참했다. 연행되는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지만, 또다시 금남로에 나갔다. 목숨을 잃기 전까지 시신을 수습하고 도청을 사수했다. 류동운은 5월 26일 저녁, 계엄군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도 도청으로 향했다. 말리는 목사 아버지에게 류동운은 말했다.

"아버지, 붙잡지 마세요. 다른 집 자녀들이 다 이 나라를 위해 희생을 하는데 왜 자기 아들만 보호하려 합니까. 아버지의 평소 소신이 이럴 때 흔들리면 안 됩니다. 그리고 아버지 설교 말씀에 역사가 병들었을 때 누군가가 역사를 위해 십자가를 져야만 이 역사가 큰 생명으로 부활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런 때 아버지 신념이 흔들리지 마시고, 붙잡지 말아 주세요." (<류동운 추모집> 중에서)

류동운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쏜 총탄에 숨을 거뒀다. 류동운은 죽기 직전 "한 줌의 재가 된다면 어느 이름 모를 강가에 조용히 뿌려 다오"라는 유서를 남겼다.

끝까지 남아 도청 사수 
"두 신학생의 순교자적 죽음
보편적 휴머니즘보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소명 때문"

광주 항쟁서 산화한 문용동과 류동운을 동시에 다룬 포럼은 이번이 처음이다. 예장통합 사회봉사부 사회문제위원회는 5·18 민주화 운동을 재조명하기 위해 포럼을 개최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목숨을 내던진 문용동은 '전도사'로, 류동운은 '열사'로 불리고 있다. 두 신학도를 조명하는 포럼 '5·18과 한국교회 그리고 신학도들(문용동과 류동운)'이 5월 16일 서울 종로 한국기독교회관에서 열렸다. 문용동과 류동운을 동시에 조명하는 포럼은 이번이 처음이다.

포럼을 주최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사회봉사부 사회문제위원회(임한섭 위원장)는, 한국 사회가 이념으로 갈라지면서 5·18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봤다. 임한섭 위원장은 "5·18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을 통렬히 반성하고, 두 신학도의 행적을 통해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모색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목회자·신학생 100여 명이 참석한 포럼은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행동에 미치는 기독교의 '종교적 동기'의 가치"를 주제로 발표한 도주명 목사(문용동전도사기념사업회 총무)는 "문용동과 류동운은 기독교의 '종교적 동기'에 따라 광주 항쟁에 참여했고,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도 목사는 "문용동과 류동운 두 신학생은 그리스도인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 죽음으로 가르쳐 주었다. 문용동은 '사랑'과 '정의'에 가치를 두고, 폭발물을 지키기 위해 죽음까지 각오했다. 류동운은 '자유', '정의'에 가치를 두고 스스로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두 신학생의 고귀하고도 순교자적인 죽음은 그리스도인에게 인간의 인간 됨을 선포하고, 자기희생이 신앙인의 자세라는 걸 가르쳐 주고 있다"고 말했다.

예장통합이 주최·주관한 만큼 문용동에 대한 평가가 주를 이뤘다. '5·18 정신과 타자를 위한 인간'을 주제로 발제한 고재길 교수(장신대)는, 문용동의 결단은 보편적 휴머니즘이 아니라 소명 의식 신앙고백과 관련 있다고 말했다.

고 교수는 "문용동은 시민군의 한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주신 소명의 터 위에서 행동했던 그리스도인이었다. 광주시민의 목숨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의지는 단호했다. 위기에 처한 민족의 미래를 구하고자 '죽으면 죽으리라'고 했던 에스더의 결단이 문용동의 신앙적 고백을 통해 동일한 방식으로 일어났다"고 했다.

히틀러에 저항하다 순교한 독일 신학자 본회퍼에 비교하기도 했다. 고 교수는 "문용동과 본회퍼는 믿음과 행함을 분리시키지 않았고, 행함 있는 믿음의 정수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 주고 있다. 이들의 모습은 삶과 신앙의 불일치로 비판받는 한국교회 그리스도인에게 경종을 울린다"고 했다.

문용동과 류동운의 희생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참여를 장려하지 않는 한국교회에 많은 점을 시사한다. '5·18과 한국교회'를 주제로 발제한 이치만 교수(장신대)는 "한국교회는 신앙과 사회적 실천은 다르다고 선을 그어 왔다. 심각한 문제다. 기독교는 영적 구원에만 매몰된 종교로, 자신의 구원만 좇는 종교로 비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문용동과 류동운의 행동은 기독교 신앙과 무관한 채 사회 분위기에 휩쓸린 게 아니다. 당대 사회의 궁극적 가치문제에 그리스도인으로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사회운동가가 될 필요는 없지만, 사회의 궁극적 가치가 위협받을 때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 사회에 표출하는 건 마땅하다"고 말했다.

문용동전도사기념사업회는 내년 5·18 민주화 운동 40주년을 맞아, 광주 항쟁 당시 한국교회의 역할을 조명하겠다고 밝혔다. 김광훈 목사(광주NCC 회장)는 "5·18 당시 한국교회는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다, 역할이 없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우리는 동의할 수 없다. 40주년을 맞아 문용동전도사기념사업회와 함께 한국교회가 한 역할을 발굴하고, 신학적으로 조명하겠다"고 말했다.

광주시민은 국가 폭력에 굴복하지 않고 목숨을 다해 계엄군에 맞섰다. 문용동, 류동운뿐만 아니라 광주 지역 목회자, 교회들도 함께했다. 사진 출처 5·18기념재단
문용동과 류동운은 도청을 사수하다 같은 날 숨을 거뒀다. 5·18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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