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설교를 위한 요한복음> / 조석민 지음 / 이레서원 펴냄 / 520쪽 / 3만 3000원

신약성경에서 단 한 권만 고르라면 로마서를 고를 것이다. 로마서 외 다른 한 권을 더 고르라면 마태복음을 고를 것이다. 마태복음이 선사하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매력은 중독성이 강하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은 무엇일까. 지나온 시간 동안 나 자신이 요한복음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회상해 보았다.

두 단계로 극명하게 나뉜다. 첫 단계는 신학을 전공하기 전이다. 감동적인 예수님의 설교로 적지 않은 은혜를 받았던 기억이다. 그런데 신학을 시작하면서 요한복음은 왠지 모를 거리낌의 대상이 되었다. 요한복음으로 설교한 적도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고, 심혈을 기울여 공부하려고 작정한 적도 없는 것 같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최근에야 발견했다. 너무나 사랑하는 요한복음이지만, 알 수 없는 두려움 때문에 멀리했다.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이들이라면 "요한복음이 두렵다"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공부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첫 장부터 숨이 턱턱 막힌다. 너무나 헬라적인 특징을 비롯해 공관복음서와 도무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기묘한 표현과 성만찬 문제가 더해지면, 요한복음은 감히 넘지 못하는 만년설의 에베레스트다.

레온 모리스, 안드레아스 쾨스텐베르거, 스티븐 스몰리 등 요한신학을 다룬 주요 저자들 책을 번갈아 읽어 가면서 이전에 두려웠던 마음이 약간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요한복음과 요한신학 자체는 쉽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게 됐다. 요한복음은 사건 전개가 공관복음서와 확연히 다르다.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인 성전 청결 사건이 공생애 서두에 자리 잡고 있다. 공관복음서는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 예루살렘 입성한 때로 사건을 미룬다.

그뿐 아니라 공관복음에 등장하지 않는 특이한 표현이나 사건이 등장하기도 한다. 저자 조석민 교수는 확실히 가르침이 탁월하다. 저자 자신이 '요한복음의 선지자 기독론'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요한복음 전공자이지만, 가르침을 놓지 않은 덕에 깊지만 쉽게 가르칠 줄 안다. 나는 책을 받고 가장 먼저 요한복음 서론부터 치밀하게 읽어 나갔다. 예상 외로 22쪽 분량이라 짧았지만 요한복음 전문가다운 서론이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저기독론'이 강하게 드러난다. 표적으로 표현된 6가지 사건을 통해 요한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묘사한다. 모세와 엘리야, 엘리사 등 구약의 대표 선지자들과 비교하는가 하면, 오병이어 기적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 선지자"(요 6:14)라고 말한다. 맹인이 눈을 뜬 다음 예수님을 향해 "선지자"(요 9:17)라 부른다. 1장에 나타난 고기독론과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저기독론에 해당하는 선지자 기독론을 제시한 것"(23쪽)이라고 조언한다. 요한은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하고 제시했던 바로 그 선지자임을 강조하고 있다.

구약에서 선지자에 대한 예언은 희미하다. 그러나 제2성전기 문헌을 보면, 메시아에 대한 유대인의 기대가 간절하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억압과 착취에서 자신들을 구원하고 이스라엘을 회복할 메시아를 고대했다. 1세기 말 기록된 요한복음에서는 바벨론 포로기보다 더한 디아스포라 상황이 연출된다. 티투스 장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 예루살렘과 성전은 유대인들의 정체성 자체를 뿌리부터 흔들어 놓았다.

요한복음에는 구약 절기가 아닌 수전절이 등장한다. 기원전 167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제우스신상을 세우고 돼지의 피를 제단에 바르며 성전을 모독한다. 이때 유다 마카베오와 그 형제가 봉기해 그들을 격파한다. 이것이 중간기에 일어난 그 유명한 마카비 혁명이다. 그 후로 이를 기념하여 매월 12월 중순경 8일 동안 수전절을 지킨다.

수전절의 뜻은 '새롭게 한 날' 또는 '깨끗하게 한 날'이다. 이것은 제2성전기 문헌인 마카베오 상·하에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요한은 왜 수전절을 기록했을까. 수전절이 '빛의 제사'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상징과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저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 보자.

"수전절이 '빛의 제사'라고 불렸듯이 예수는 빛 되신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 위에서 구속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유대인들이 메시아로 세상에 오신 예수를 의심하고 있을 때 참 성전이시고 빛이신 예수의 정체성을 암시하고자 수전절을 언급한 것이다." (30쪽)

이뿐 아니라 '믿음'이라는 명사가 단 한 번도 요한복음에 사용되지 않았으며, 이것이 오직 동사 형태인 '피스튜에인'으로만 사용된 것에 주목한다. 이것은 "믿음이 한 번의 경험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는 지속적으로 발전해 나가야 하는 역동적인 특성이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함"(33쪽)이라고 소개한다. 비록 믿음이 부족하더라도 멈추지 말고 계속해서 예수님께 나아오라고 초청하고 있는 것이다.

약간 놀랐던 부분은 요한복음이 유대식이 아닌 로마의 시간을 따른다고 주장한 점이다. 저자는 몇 가지 근거로 이렇게 주장한다. 특히 갈릴리 바다를 황제인 티베리우스 이름을 따서 '디베랴 호수'로 부르고 있다는 점을 든다(요 21:1).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유대 관습과 문화 등을 반복적으로 설명하고 있기에 독자들이 유대 문화를 잘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이라고 본다. 이러한 주장들은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이해해 왔던 관점을 벗어났기 때문에 '요한복음의 새 관점'이라 할 만하다. 전통 신학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보수적이다.

아마 요한복음을 파고들기 위해 안드레아스 쾨스텐베르거, 카슨, 레이몬드 브라운 등이 쓴 주석을 읽어 본 독자라면, 저자가 주해하면서 얼마나 절제하고 있는지 알 것이다. 그렇지만 가장 핵심적이면서 유용한 주해는 거르지 않고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실용적이다. 요 1:12 주해를 예로 들면, 가능한 한 헬라어를 사용하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불가피하게 사용해야 하거나 중요한 단어인 경우 적절한 분량으로 주해한다.

서두에서 밝힌 것이지만 원고를 수정하고 다듬는 퇴고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분량을 줄이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하고 싶은 많은 말이 있음에도 축소, 축약하는 일은 쉽지 않다. 저자는 바로 그 점을 훌륭하게 해냈다.

주의해서 볼 곳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가 실린 요 4:1-42의 이야기다. 저자는 '여섯 시'를 유대식 시간인 정오가 아닌 로마의 시간으로 환산해 오후 6시로 보자고 한다. 우리는 남편이 다섯이 있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여인을 음란하다고 평가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아무도 오지 않는 정오에 물을 길으러 왔다고 해석한다. 문제는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곧바로 동네 사람들을 찾아갔고, 그녀의 말을 듣고 사람들이 예수님께 왔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을 근거로 "여성이 남들의 이목을 피해 가면서 고립된 생활을 했다기보다 오히려 동네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살았음"(126쪽)이 더 옳다고 말한다.

저자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요한복음의 가장 중요한 신학 주제인 저기독론으로 끌고 간다. 여인은 예수님을 향해 종말에 올 선지자(타헤브)냐고 묻는다. 여인은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전통과 지식으로 예수님께 질문하지만 많이 뒤틀려 있다. 그녀는 예수님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는 점점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 간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내가 그라(에고 에이미, ἐγώ εἰμι)"고 하신다.

저자의 통찰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남편 다섯'이라는 표현은 음탕한 여인이라는 뜻이 아니다. 결혼과 이혼을 다섯 번 했을 뿐이다. 남편이라는 단어는 합법적인 것이며, "당시 유대나 사마리아 사회에서 정당한 이혼을 부정하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132~133쪽)는 점에 유의한다.

마침내 여인은 예수님을 '타헤브'로 인식하고 놀라 동네로 내려가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예수님과 이틀 동안 머물며 직접 이야기한다. 그리고 마침내 테헤브가 아닌 "세상의 구주(ὁ Σωτὴρ τοῦ κόσμου)"라고 고백한다. 저자는 이곳에서, 이틀 동안 머물면 참선지자라는 디다케의 조언을 절묘하게 끌고 온다. 요한은 디다케가 기록된 당대 상황에서 복음서를 기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한 문장으로 표현해 보면 이렇다. '고도로 집약적이면서도 풍성하며, 난해한 부분을 속 시원하게 풀어 가면서도 목회적인 주해서.' 과연 요한복음의 새 관점이라 할만하다. 이 책을 단순하고 간략한 주해서로만 알았던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요한복음을 곁에 펴두고 이 책을 함께 읽는다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요한복음의 맛'을 느끼리라 믿는다.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정현욱 /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인, 에레츠교회 담임목사

외부 기고는 <뉴스앤조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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