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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뿌리내릴 수 있을까
[고려인 연재] 3차례의 이주, 4세대의 삶(4)
  • 희정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9.04.30 17:41

고려인은 러시아와 독립국가연합(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우크라이나 등) 등에 거주하는 한민족이나 그들의 후손을 이르는 말입니다. 조선 말과 일제강점기에 연해주 지역으로 대규모 이동하여 정착, 이후 1937년에 러시아 극동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는 비극을 겪기도 했습니다. 현재 한국을 포함 세계 각지에 80만 명의 고려인이 있다고 추정됩니다.

'고려인독립운동기념비' 건립 비용 모금을 위한 기획 연재를 진행합니다. 펀딩 사이트 '같이가치'에 공동 게재되고 있습니다. 고려인독립운동기념비 건립은 연해주 등지에서 이뤄진 고려인의 항일 항쟁 역사를 대한민국 땅에 기록하기 위한 것입니다. 낯선 땅에서 굴하지 않고 삶을 지켜 낸 이들, 더 나아가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웠던 그러나 이름 없이 잊힐 수밖에 없던 수많은 이들을 기억하는 작업에 함께해 주시길 바랍니다. 5만 명의 고려인독립운동기념비 건립자가 되어 주세요. - 고려인독립운동기념비건립국민추진위원회

후원 참여: 신용협동조합 131-017-209819 안산희망재단
기념비 건립 모금을 위한 스토리 펀딩 사이트 바로 가기

"부모는 뿌리내리게 하는 사람이에요."

이주한 까닭을 물으니 이리 답한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뿌리내릴 수 없기에 2010년 자녀들을 데리고 한국에 왔다고 했다. 천따찌야나 씨 이야기다. 당시 첫째가 11살, 둘째는 8살이었다. 친구들과 떨어져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곳에 가야 했다. 당연히 가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붙잡고 따찌야나 씨는 말했다고 한다.

"우즈베키스탄 우리 고향 아니야. 이제 우즈베키스탄은 우즈베키스탄 사람들 고향이야."

그래서 우즈베키스탄을 떠나왔다고 했다. 고향이 될 수 없어서.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없어요

고향은 무엇을 의미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우선 따찌야나 씨의 고향은 어디냐고 물었다. 그녀는 예전이라면 '소련'이라 답했을 거라 한다. 그러나 소련은 사라졌다. 1991년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은 해체된다.

1980년대부터 소련 내 민족주의 운동이 확산되고 중앙아시아 공화국들의 독립국가 건설 요구가 커진다. 그에 따라 공화국은 자민족 언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하기 시작한다. 독립 후인 2004년에는 우즈베키스탄의 모든 공문서가 우즈베크어로만 작성된다. 러시아어를 사용해 온 고려인들에겐 새로운 언어 장벽이었다.

학교 수업도 우즈베크어로 진행됐다. 이때 많은 고려인 교사들이 교편을 내려놓아야 했다. 다른 직업들도 마찬가지였다.

"우즈베키스탄 사람 아니면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없어요."

한국에 온 이유를 물으면 우즈베키스탄 출신 고려인들은 이 대답을 했다. 강제 이주 세대의 혹독한 적응을 발판 삼아 다음 세대는 고등교육을 받고 전문 직업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수십 년에 걸쳐 이룬 사회적 지위가 또다시 흔들렸다. 민족 부흥 정책은 소수민족에 대한 배제로 이어졌다.

그런 가운데 정국은 불안했고, 물가는 요동쳤다.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은 안정된 삶을 찾아 각지로 흩어진다. 그러다 한국에 온다.

자녀의 인생을 생각해 한국에 오다

국내 한국인과 고려인들이 서로의 존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1988년 서울 올림픽 때였다. 각국 사람들이 서울에 온 그때, 소련 선수단 명찰을 달고 고려인 선수들도 올림픽에 참가한다. 고려인들도 변화된 남한 모습을 생중계를 통해 접한다. 이후 소련의 개방정책 흐름을 타고 대우그룹 등 기업과 한국 선교사들이 러시아 영토로 진출한다.

점차 고려인들도 한국을 찾게 되고, 2007년 방문 취업 비자(H-2)가 구소련 지역 동포들에게 발급되자 국내 고려인 수는 급증한다. 출입국 통계에 따르면, 2019년 현재 국내 거주 중인 고려인은 8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두 아이 아빠인 박알렉산드라 씨는 고려인들이 단지 일자리 때문에 한국에 오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아이들 학교 가는 것도 차로 데려다주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여기(한국)는 안전하게 가르칠 수 있어서 좋습니다."

통학길마저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래서 5년 전 가족들과 한국으로 왔다. 2014년이 첫 방문은 아니었다. 14년 전인 2000년, 24살 나이에 한국으로 일하러 왔다. 방문 취업 비자가 발급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는 우즈베키스탄 소속으로 왔다.

의정부 남양주에 회사가 있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이주 노동자들에게 제공되는 일은 빤했다. 일은 힘들고 말은 통하지 않았다. 같이 일하는 한국인들도 고려인이 누구인지 알 리 없었다. 4개월 만에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간다.

그 후 가족이 생겼다. 우즈베키스탄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일자리 구하기는 더 힘들어졌다. 박알렉산드라 씨는 다시 한국으로 왔다. 세월이 지났으니 노동환경이나 작업장 사정이 나아졌느냐고 물었다. 별로 그렇지 않은 듯 했다. 그래도 오래 머문다. 자녀의 인생을 생각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고려인지원센터 너머에서 진행하는 한국어 수업. 사진 제공 고려인너머

인정받아야 한다

천따찌야나 씨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제 자녀들에게 고향이 생겼을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애들 지금 고향이 없는 느낌으로 살고 있어요."

딸에게 들은 말이 있어서다. 몇 해 전 방송국에서 취재를 왔을 때, 딸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국적은 우즈베키스탄인데, 쓰는 말은 러시아 말인데, 민족은 고려인에. 우리 대체 무슨 사람입니까?"

한국에 와 적응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딸은 종일 책상에 앉아 러시아 책만 읽었다고 한다. 딸은 울었고 따찌야나 씨는 독하게 마음먹는 편을 택했다.

"우리 여기서 외국 사람처럼 (취급)받고 있는데, 노력해서 한국에서 인정받아야 한다고 했어요."

한국에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그녀의 말은 강제 이주 직후 고려인들의 선택을 떠올리게 한다. 따찌야나 씨 아버지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이 고향이다."

혼신을 다해 고향에서 살아야 한다고 했다. 소련에서 적성 민족이 아닌 '국민'으로 인정받고자 한 노력은 고려인들을 콜호스(집단농장) 노동영웅으로 만들었다. 독보적인 생산량에는 막대한 땀이 들어갔다. 따찌야나 씨도 한국에 와 12시간 노동을 감내한다.

열매를 맺고, 나중에

"(자식들이) 다 자라니까 열매를 보고 마음이 자랑스러워요."

딸이 스무 살이 됐다. 취업을 하고 한국어 능력 시험(TOPIK) 6급 자격증을 땄다고 한다. 일하면서 돈을 모아 대학에 갈 생각이다. 딸 자랑이 끊이지 않는다. 그녀가 노력의 열매이자 '인정'의 조건이라 믿고 있는 고등교육, 유창한 한국어, 번듯한 직업을 자녀들이 하나씩 이뤄 내고 있다.

그렇다면 따찌야나 씨의 열매와 뿌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는 영주권을 따기 위해 한국어 공부를 했었다고 한다.

"지금은 마음이 좀 피곤해서 놔뒀어요."

정확히는 여력이 없다. 안산에서 화성까지 매일 출퇴근을 한다. 일하면서 자격시험을 준비하는 일은 어렵다. 자신은 재외 동포 비자(F-4)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자식들은 다를 거라 믿는다. 자녀가 한국 사회에서 안정적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 목표인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은 뒤로 미룬다. 그런 이에게 꿈을 물었다.

"애들 미래가 제 인생이에요."

그러다 잠시 후 말한다.

"사실은 아직까지도 마음속에 꿈이 있는데, 애들 돌보고 가르쳐 주는 거예요."

우즈베키스탄에서 교사 생활을 1년 했다. 평생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한국에 오게 됐다. '나중에'를 말한다.

"나중에 손주 생기면, 손주 친구들 모아서 유치원을 만들고 싶어요."

새로운 고향으로 삼길

자신을 나중으로 미루고, 자녀들이 뿌리내리길 바란다. 한국을 새로운 고향으로 삼길 기대한다. 처음부터 묻고 싶던 질문을 한다. 이들에게 고향이란 무엇일까.

내가 만난 고려인들은 '한국'을 다양하게 정의했다. '아버지의 나라'라고 강하게 말하는 이도, '역사적 조국'이라고 건조하게 말하는 이도 있다. 누군가는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우즈베키스탄에 해가 되는 내용은 담지 않았으면 한다고. 다시 돌아갈 나라라고 했다.

한자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러시아 땅에서 가문의 본이 적힌 종이를 몇 세대 동안 간직한 가족도 있었다. 한편 한국에서 사망한 부모의 시신을 꼭 러시아로 모셔 가겠다고 하는 이도 있다. 그곳에 선산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한국은 자식들이 새로이 뿌리내리길 기대하는 땅이기도 하다. 이들에게 돌아갈 곳이라 여겨지는 '고향'은 저마다 다른 의미로 존재했다. 따찌야나 씨가 말한 고향이란 '자신을 공동체 성원으로 인정하는 사회'일 것이다.

외국 사람으로 취급받지 않는 사회에서 살길 원한다. '인정'에 한 발 다가갔다는 생각에 그녀는 딸이 받은 상장과 자격증에 감동한다. 그런데 이들이 한국 사회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 이러한 '인정'일까.

인정과 환대

<사람, 장소, 환대>(문학과지성사, 2015)에서 김현경 교수는 "사람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저절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환대를 통해 사회에 들어가야 사람이 된다. "환대란 자리를 주는 행위"이고, 사람이 된다는 것은 사회에서 자리를 갖는다는 의미이다.

필요한 것은 '환대'이다. 그래야 따찌야나 씨와 같은 이들이 자꾸만 자신을 뒤로 미루지 않고, 지금 이곳에서 자리 잡을 수 있다. 환대는 단지 마음이 아니다. 자리 마련. 그러니까 한 사람의 거주권을 인정하고 지원하는 제도와 법이 따라가야 하는 문제이다.

한국 사회는 고려인들의 새로운 고향이 될 준비가 되어 있는지 궁금해진다. 다음 편에서는 고려인들이 말하는 한국에서의 '자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은 이들에게 어떤 자리를 내어 주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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