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안산 화정교회 박인환 목사가 감신대에서 4월 15일 열린 '트라우마에 대한 신학과 목회 세미나'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허락을 받아 전문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1. 2014년 4월 16일 아침

암담하였다.

2. 비상식적인 일들

세월호 참사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비상식적인 일로 가득하다. 선원들, 해경의 태도, 가짜 뉴스, 집권 세력의 진상 규명 방해, 세월호를 정치적 문제라고 말하는 사회의 분위기…. 가장 비상식적이고 엽기적인 것은 교회의 태도였다.

설교 시간에는 (심지어 세월호 유족이 있는 교회 목사마저도) "세월호는 교통사고일 뿐인데, 세월호 가족이 정치화됐으며 야당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식의 설교를 가장한 폭력이 아무 거리낌 없이 자행되고 있었다. 기독교인 세월호 유족 중 많은 수가 다니던 교회를 떠났다. 성경책을 찢어 버리고 아주 교회 밖으로 나가 버린 이도 있다. 목사의 설교가 충격적이었고, "아이가 천국에 먼저 갔는데 왜 아직까지 울어?"라는 식으로 위로하는 교인들 말이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유족들이 분노하고 슬퍼하는 것을 교회가 용납하지 않았다. 분노와 슬픔을 비신앙적이라고 단죄했다. 유족을 노골적으로 쫓아낸 교회도 있다. 세월호 유족 때문에 교회 분위기가 침울해지고 교회 부흥이 막힌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창현이 엄마가 교회에서 쫓겨난 얘기는 참담하다. 창현이 엄마는 아이를 잃고서도 13년 동안 해 오던 주일학교 교사를 계속할 정도로 열심 있는 집사였다. 광화문에서 삭발을 한 그 주 주일 아침에 주일학교 아동부 부장으로부터 "집사님, 주일학교 교사 그만하셔야겠어요"라는 말을 들었다.

"왜요?"

"머리를 삭발한 채로 아이들에게 나타나면 아이들이 놀라잖아요?"

"그래요? 목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

"알았어요. 목사님 뜻이 그렇다면 순종해야죠."

그렇게 대화하고 11시 예배를 위해 예배실로 올라간 창현이 엄마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섬뜩했단다. 그날 창현이 엄마가 헌금위원이었는데, 자기가 헌금 바구니를 돌려야 하는 줄에 한 명도 앉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날로 창현이 엄마와 아빠는 교회를 나왔다. 지난 4년 이상을 안산분향소 예배실에서 열린 '세월호 가족과 함께하는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해 온 그의 모습에서, 예수를 향한 믿음은 갖고 있으나 한국교회는 신뢰하지 않는 유족들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트라우마에 대한 신학과 목회 세미나'가 4월 15일 감신대에서 열렸다. 발표하는 박인환 목사(위). 뉴스앤조이 최승현

3. 세월호 유족들의 트라우마

세월호 유족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이지만, 유족들에게 다가서는 것이 쉽지 않았다. 청운동에서 유족들이 노숙 농성할 때 포도 몇 박스를 들고 간 적이 있다. 우리 교회 유경근 대변인을 앞세웠다.

"우리 교회 목사님이십니다. 포도를 가져오셨어요."

"……"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보는 유족들의 분노 어린 눈길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바다에 수장되는 아이들의 죽음을 TV 중계로 지켜만 볼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자괴감, 자기들이 갖고 있던 상식과 믿음이 무너진 데서 오는 절망감이 유족들에게 찾아온 트라우마의 첫 원인일 것 같다.

구조에 책임이 있는 정부가 구조를 하지 않고 오히려 구조를 방해하고 유족들을 괴롭힌 것도 상처이지만, 불의한 기득권자들 편을 들고 고통당하는 자들을 괴롭히는 사회적 분위기, 권력자들이 만들어 퍼뜨린 세월호에 관련한 가짜 뉴스들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일반 시민들 앞에서 절망했다.

그들이 더 크게 절망한 것은, 이웃이 없어졌다는 데서 오는 허무함 때문이었다. 참사 1주일 후, 어느 기자가 단원고 희생 학생이 살았던 집 바로 옆에 사는 할머니에게 "옆집 아이가 죽었는데 지금 마음이 어떠냐"고 물었는데, 할머니의 대답은 "어휴, 옆집 아이는 그래도 효도하고 죽었지요. 우리 같은 서민이 언제 5억을 만져 봐?"였다.

참사 이후에도 직장을 다니던 어떤 엄마는 자기가 듣는 줄도 모르고 "쟤는 좋겠다. 보상을 많이 받아서"라며 수군대는 직장 동료들 말에 더 이상 직장을 다닐 수 없게 되었다. 이웃들이 아이들의 죽음에 슬퍼하고 유족들의 아픔을 공감하기보다는 배보상 받을 돈에 더 관심을 두는 것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아파하는 이웃은 보이지 않고 돈만 보였던 것이다.

4. 교회의 해석과 반응

거기에 더해 세월호에 대한 교회의 해석과 반응은 놀랍다. 초기 유명 목사들의 개념 없는 말들은 차치하더라도 교회가 지난 5년간 세월호와 관련해 보여 준 태도가 유족들에게 꾸준히 상처를 주고 있다.

단원고 희생 학생들이 다니던 교회는 37곳이다. 그런데 5년째 이어져 오는 '세월호 유족들과 함께하는 예배'에 한 번이라도 온 교회는 4곳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중 한 교회의 목사는 아이를 잃은 당사자이다(자발적으로 찾아온 큰 교회는 하나도 없다). 얼마 동안 같이 울어 주고 장례를 치러 주는 것으로 할 일은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지는 모르겠다.

세월호 안산 분향소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은혜와진리교회는 참사 3년째 되던 해에 '노란 리본'을 달고 교회에 나온 청년을 내쫓았다. 안산에서 세월호와 관련한 집회를 열 때마다 소리를 지르거나 방해하는 사람들 중 많은 이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다. 손에 전도지를 들고 성경책을 옆구리에 끼고 악다구니를 쓰는 사람들도 있다.

세월호 4주기 기억 예배에 참석한 어느 큰 교회 목사가 마스크를 쓰고 고개 숙이고 있는 사진(교회에는 기억 예배 광고를 하지 않고 혼자 왔다)을 보면서, 성장신학이라는 가짜 신학에 심취해 있는 한국교회 목사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고 생각했다. 세월호를 얘기하면 교인들이 떠나갈까 봐, 장로들이 싫어할까 봐, 교회 부흥이 안 될까 봐 그러는 것이다. 그런 목회가 과연 예수와 관계있는 것일까.

5. 자신을 돌아보다

세월호 참사 당일, 팽목항에 내려가지 못하고 저녁 시간에 예은이네 집에 가서 엄마를 만났다. 그 와중에서도 기도해 달라고 울부짖는 예은이 엄마 손을 붙들고 기도는 했지만, 태어나서 가장 난감하고 민망한 시간이었다.

예은이가 일주일 만에 올라오고 장례를 치렀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그때 무슨 설교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장례식을 통해 예은이 부모나 자매들을 조금도 위로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목사인 나 자신부터 위로받을 수 없었으니까.

예은이 장례식을 치른 후부터 죽음과 관련해 생각하게 된 것이 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해소해야 한다는 것 △삶과 죽음은 같이 있다는 것(현생과 이생을 분리하지 말아야). △미화된 천국을 버려야 한다는 것 등이다.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고통스러웠던 것은 내가 믿는 하나님을 유족들에게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교인들에게 "말씀에 순종하면 복 받는다. 주님 잘 섬기는 자가 형통하다"는 설교를 수도 없이 해 왔다. 세월호 참사는 나의 그런 설교를 무참히 박살내고 말았다. 성장과 경쟁, 세속적 축복이라는 화두 속에 머물러 있는 한국교회를 비판하며 살아왔지만, 나 자신도 그런 화두에서 100%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수의 제자를 자처하면서 과연 예수의 제자답게 살았는지 반문했다.

6. 세월호 활동을 시작하다

내가 세월호와 관련한 활동을 하게 된 것은 다음 두 가지 동기에서다.

(1) 우리 교회 예은이를 기억했고, 예은이의 희생 앞에서 슬픔과 분노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부모의 고통을 보고 그 곁을 조금이라도 지켜 주고 싶었다.

(2) 세월호를 대하는 비상식적인 일들, 특히 교회(목사들)의 태도에 분노했다. 남의 일처럼 말을 아무렇게나 그것도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목사들 문제는 대형 교회만의 일이 아니었다. 안산 지역 목사들마저 별로 다르지 않아 보였다. 악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회가 예수 믿는 집단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복을 받기 원하는 무속 집단 같아 보였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예은이 아빠에게 내가 무엇을 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이 저희에게는 힐링입니다"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 후부터 미친 듯이 서명을 받으러 다녔다. 1만 800명 서명을 받았다.

어느 날 예은이 엄마 박 전도사에게 "교회를 떠나 방황하고 있는 유족들을 위해 내가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되겠느냐"고 물었다. 주일날 교회를 가지 못하고 분향소에서 방황하는 유족들을 위해 와서 예배를 해 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세월호 유족들과 함께하는 분향소 예배'다.

처음에는 안산 지역 교회들이 돌아가면서 찾아오도록 했는데, 전통 교리에 익숙해 있는 설교들이 오히려 유족들에게 상처가 되는 일이 생겼다. 외연을 넓혀 유족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 설교를 할 수 있는 목사가 있는 교회들을 초청해 함께 예배했다. 영월 지역 목회자들도 먼 거리에서 찾아왔다.

오는 목사들에게는 교훈적 설교, 섣불리 위로하는 설교("아이들이 천국 갔으니 슬퍼 말라" 등) 같은 것을 하지 말아 달라고 미리 부탁했다. 예배 후 유족들 얘기를 들어 주고, 함께 울고 공감하며 유족들과 함께하겠다는 말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7. 세월호 교회

초기에는 교회를 떠나거나 교회에서 쫒겨난 유가족들이 교회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5년이 지난 지금은 그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이 믿던 하나님(기도하면 들어주시고 구해 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을 그들이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미 예수 정신이 사라진 죽은 교회에 돌아가 봐야 무슨 좋은 일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지난 5년 동안 진행된 세월호 기독교인 유가족들의 변화이다. 교회와 목사들에게 상처받고 교회를 떠나기는 했지만, 고난의 5년 세월 동안,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것이다. 아이들의 희생과 자기들의 삶을 예수의 십자가 신학 안에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독교인 유족들은 매주 목요일 장신대 학생들이 주축이 된 '목요 기도회', 감리회가 주축이 된 주일 오후 5시의 '찾아가는 예배'에 참여했다. 그들 스스로 매주 수요일 아침 성경 읽기 모임을 했다(분향소 폐쇄 때까지. 박은희 전도사가 신학을 공부한 이였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성경 읽기 모임을 통해 그들의 신앙이 크게 성숙해진 것 같다. '찾아가는 예배' 후에 그들이 하는 발언을 들으면, 마치 학문이 깊은 신학자들 같았다. 교회와 목사들에게 실망해 교회를 떠났으면서도 성경에 매달리는 그들의 모습이 짠했다. 기존의 기복적이고 내세를 강조하는 이원론적 한국교회의 설교는 이제 유족들에게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었다.

유족들은 지금도 하나님과 씨름하고 있다. 그들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세월호 교회'라고 하는 새로운 교회를 만들어 가고 있다. 언젠가 박은희 전도사에게 "목사 안수를 받고 세월호 교회를 담임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제안했던 적이 있다. 세월호 가족들을 다니던 교회로 다시 돌아가게 하는 것보다는, 고통을 통해 체험한 그들의 하나님 체험과 믿음이 또 다른 한 신앙 공동체로 탄생되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있다.

4월 7일, 생명안전공원이 들어설 화랑유원지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5주기 기억 예배.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각 반 아이들 이름을 부르는 엄마·아빠들(위)과 참석자들(아래). 뉴스앤조이 박요셉

8. 여전히 2014년 4월 16일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

유족들은 여전히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416목공소에서 같이 일하는 미지 아빠(착한 사람이다)는 "5년이 됐는데, 분노가 더 치밀어요. 답답해 미칠 것 같아요. 그냥 죽이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모두 병을 얻었다. 아이들 부모 가운데는 아직 쉰 살이 되지 않은 이들도 있는데, 이들마저도 돋보기를 써야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경우가 많다. 너무 울어서 시력이 나빠졌고, 스트레스가 심하다 보니 면역력이 떨어져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무기력증 현상이 나타나고 우울증 때문에 고생하는 이도 많다. 수면제가 아니면 밤잠을 설치는 부모가 대부분이다. 모두 마음의 병뿐 아니라 각종 육체적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서 실수하는 이들도 있다.

요즘은 배보상 받은 얘기를 하면서 "이제 다 끝났지?" 하고 묻는 목사가 많다. 돈이면 끝나나. 보상금을 한 푼도 쓰지 못하고 있는 유족도 많다. 아이의 생명값인데 어떻게 쓸 수 있느냐는 생각에서다. 참사 초기부터 오늘까지 유족들의 싸움은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모든 분야에서의 반성과 새로운 세상을 위한 것이었다. 국민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

9. 출구?

지난 5년 동안 유족들은 극심한 고통과 트라우마 가운데서도 열심히 버텨 왔다. 그 힘은 △가족들이 모여 있는 것 △다른 이들에게 알리는 것 △아픔당한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는 것 등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세월호 문제의 출구가 보이지 않아 답답하지만, 교회가 아픔당하는 자들 곁에 섰던 예수님의 모습을 흉내라도 낼 수 있다면 뭔가 보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 한 가지는 교회의 언어를 정직한 언어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헛되니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위로받자!" 이런 것은 안 된다. 성령·구원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하고, 정의·평화와 같은 기본 교회 언어를 회복해야 한다.

교회가 자꾸 '하나님의 뜻'을 이상한 곳에 붙여 버리면, 책임질 자들과 범죄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종교 언어가 혼잡해 있으니 목사들이 무당이 되고 교인들이 이상한 이원론적 신앙에 빠지고 변질된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과 관계없는 이상한 집단이 되는 것이다.

나에게 "아직도 세월호 배지 달고 다니냐"며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도 많이 있지만, 그들 못지않게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박 목사는 세월호 희생자가 있는 교회의 목사니까 아직도 세월호 관련 활동을 하는 것을 이해해 줘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다. 그렇다면 희생자가 없는 교회 목사들은 그러면 안 된다는 말인가. 이런 것만 봐도 오늘 목사들이 다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화순 목사님 말씀을 항상 기억한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두 발이 어디에 있느냐를 보면 안다."

그들 곁에 서는 것은 위로를 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넘어 부끄러움과 변화를 향한 책임 의식을 갖기 위함이다. 비록 소수이지만, 여기 계신 여러분과 같이 새로운 세상을 위해 아파하는 자들에게 공감하고 그 곁으로 한 발자국씩 다가서고자 하는 의로운 자들의 믿음이 세월호 유족들에게 치유의 시작점이 되리라고 믿는다.

박인환 / 안산 화정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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