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이 한 게 뭐가 있죠?"

페미니즘에 관해 이야기할 때 이런 질문을 종종 받는다. 자매품으로는 "여성 이슈를 왜 페미니즘이 다 독점해야 할까요?"라는 질문도 있다. 즉 교회 안과 밖에서 형성되고 있는 '페미니즘' 담론을 과잉이라 여기며 불편하게 보는 것이다. 혹은 (나는 전혀 몰랐던) 페미니즘이 도대체 한국 사회에서 무엇을 했는지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서 던진 질문일 수도 있다. 고백하자면, 나도 그 질문을 하던 시기가 있었다.

물론 '페미니즘'이 모든 여성 이슈를 다 대변하고, 여성의 역사를 이끌어 온 것은 아닐 것이다. 이른바 '페미니즘 레이블'을 달지 않고도 여성의 이야기를 충분히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의 역사는 페미니즘을 관통하지 않고는 진보할 수 없었다. 그런 여성의 역사를 탐구하다 보면 페미니즘과 만나게 되고 나의 안목을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내가 '낙태'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배워 온 복음주의적 체계에만 갇혀 있었다면 많은 맥락을 놓쳤을 것이다. 여성으로 사는 삶의 의미, 젠더, 퀴어 관련 주제도 그렇다. 보수주의적 그리스도인인 나에게 새로운 언어를 주고, 더 큰 지혜의 세계로 인도한 것에는 페미니즘의 역할이 컸다.

그렇다고 나는 전적으로 페미니스트일까. 사실 잘 모르겠다. 어떤 주제는 진보적이지만, 어떤 주제는 보수적일 수 있듯 페미니즘에 관해서도 내 안에 다양한 내가 존재한다. 누군가에게 나는 '충분하지' 못한 페미니스트일 것이다. 애초에 페미니즘을 '몇 %의 페미니즘'으로 계량화할 수도 없고, 페미니즘을 사회와 여성을 바꾸기에 '유일한 방법론'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페미니즘을 통해 사유의 지경을 넓히길 원하지만, 꼭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은 필요하고, 기독교와 페미니즘은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페미니즘 작가 벨 훅스는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문학동네)에서 페미니즘을 이렇게 정의한다.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다." (18쪽)

아마 이 정의에 반대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그렇게 믿고 싶다). 그녀는 그런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세상을 이렇게 상상했다.

"아무도 지배받지 않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여자와 남자가 무조건 똑같거나 평등한 곳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존중이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의 틀을 만드는 기준인 세상 말이다. 누구나 타고난 모습 그대로 살 수 있는 세상에서, 평화로운 가능성의 세상에서 산다고 상상해 보라. 페미니즘 혁명만으로는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없다. 인종차별과 계급 엘리트주의, 제국주의도 함께 종식해야 한다. 하지만 페미니즘 혁명을 통해, 우리는 여자로서 그리고 남자로서 완전한 자기실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랑의 공동체를 건설하고 그 안에서 함께 살아가며 자유와 정의를 향한 우리의 꿈을 실현하고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진리를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22쪽)

이 문장이 어쩐지 익숙하지 않은가. 우리가 교회에서 배워 온 '하나님나라'가 이와 같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기독교가 추구하는 세상과 페미니즘이 바라는 세상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이 한 게 뭐가 있죠?"라는 질문으로 돌아가 이 질문에 답을 해 보고자 한다. 내 책상에는 <여성신문>이 창간 30주년을 기념해 만든 책이 꽂혀 있다. <세상을 바꾼 101가지 사건>(여성신문사)이라는 이 책은 짧게는 30년, 길게는 그 이상의 세월 동안 여성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 그러기 위해 어떤 투쟁을 했는지 역사가 담겨 있다. 강간범 혀를 깨문 죄로 피해자에서 오히려 가해자가 된 '안동 주부 사건' 때 여성들은 "여성이 강간의 위험에 처했을 때 '정당한' 방어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질문하며 사회적 통념을 바꾸었다. 지금은 너무 당연하게 존재하는 '여성가족부'도 여성들이 투쟁한 결과였다. 요즘 한창 쟁점이 되는 '성평등 명절 문화'는 30여 년 전 '언니들'이 '꼴페미' 소리 들어 가며 주장하던 것이다. 동성동본 금혼 폐지, 남녀차별금지법 제정, 호주제 폐지, 간통죄 폐지 등 여성의 삶뿐 아니라, 사회를 변화시킨 주요 사건들에 페미니즘 방법론과 상상력이 이렇게 편만하게 존재한다.

멀리 가지 않더라도 최근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고 있는 '미투' 운동이나, 속속 드러나고 있는 디지털 성범죄 카르텔, 여성의 기본권을 억압한 낙태죄 헌법 불합치 판결 등을 상기해 보라. 모든 운동이 '페미니즘'으로 수렴될 수는 없지만, 페미니즘이 '한 게 뭐가 있냐'는 질문을 할 정도는 아니다.

페미니즘을 통해 세계와 한국 근현대사에 내가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여성의 자리를 배치하여 새롭게 배우며 나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내가 캠퍼스와 사회에서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나라 운동을 하겠다고 기도하며 실천할 때 페미니즘이라는 물결은 거스를 수 없이 도도하게 흘러 사회를 변화시켰다. 그 역사에 대해 무지한 것도 모르고 '복음주의' 중심성을 가지고 판단하며 살아온 나에 관한 부끄러움이 지금의 나를 움직이고 있다.

이제 질문을 바꿔 보자.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무엇을 했고, 앞으로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에서 낙태를 죄로 규정하는 법은 헌법 정신에 어긋난다고 판결한 '낙태' 이슈를 예로 들어 보자. 우선 나는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그리스도인의 가치를 존중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도 생명이 귀하다고 생각하고, 가능하면 우리 모두 그 생명을 살리는 방향으로 노력하면 좋겠다. 그러나 "낙태는 살인이다"는 말을 반복하며 여성들을 '살인자'로 만들어 모멸감과 죄책감을 주는 것은, 내가 배운 복음의 정신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교회는 그동안 여성의 삶을 억압하는 국가정책에 신앙적으로 협력했다. 이 국면에서 나는 교회가 그동안 법과 제도 영역뿐 아니라 교회에서조차 배제와 정죄를 경험하며 고통스러워했을 여성들에게 미안해하고, 이제라도 여성이 존중받으며 정당하게 법과 제도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종교가 할 수 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전에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 한국교회는 그동안 여성을 억압하는 국가의 정책에 신앙적 근거를 제공하며 불평등을 실행하는 국가권력에 협력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믿으면서 '보이는' 바로 곁의 여성을 배제하고 정죄하는 방향으로 자신이 배운 신학과 신앙을 함부로 동원한 지난날을 회개하자. 여성 목사 안수 금지, 목회자 성폭력 옹호 등 불의한 현실을 방치한 채 유·무형의 여성 차별과 혐오를 성찰 없이 수행한 일을 회개하자. 어렵게 임신 중단을 선택한 여성도 하나님의 귀한 딸이다. 여성은 '생육과 번성'해야 하는 '자궁'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능동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인간이다.

- 낙태'죄'에 관해 기독교가 규정한 '죄'와 사회 법에 적용하는 '죄'의 개념을 혼동하지 말자. 헌법재판소에서 판결한 '낙태죄 헌법 불합치'는 낙태를 규정하는 형법상의 죄가 여성의 기본권을 침해해 왔다는 국가의 책임을 명시하고 법 개정을 명령한 것이다. 사회 법을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등치해서 왜곡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 우리가 '낙태는 죄'라고 배워 온 성경적 근거가 무엇인지, 그게 과연 합당한 해석인지 다시 학습해 보자. 또한 사회 법이 그동안 어떤 이유로 낙태를 죄라고 규정해 왔으며, 지금은 죄가 아니라 판단한 것인지 그간의 역사와 논의의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관련한 책이나 아티클을 통해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자. 적어도 수많은 여성의 삶을 '죄'로 규정하려면 그 정도 학습 과정을 거치는 건 기본이다. 최근 출간된 <배틀 그라운드>(후마니타스)를 추천한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입법기관은 모자보건법을 비롯한 관련 법안을 2020년 12월 31일까지 전면 개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그동안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성교육, 고용 차별, 노동, 가족, 청소년, 장애, 이주, 보건 의료 영역의 불평등이 개선되고, 성적 건강과 재생산 권리 보장이 이루어지도록 법과 제도를 재고하는 방향으로 사회적 흐름이 변화할 것이다. 인간의 기본권을 '반대'할 근거는 없다.

4월 11일 헌법재판소 앞. 의료계에서도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는 시위를 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그렇다면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적어도 이제는 '생명 vs. 선택'이라는 낡은 대립 구도는 반복하지 말자[기독교에서 주로 이야기하는 'Pro-life'와 'Pro-choice' 개념은 미국 보수 진영과 복음주의 진영의 전략으로 채택된 것이다. 즉,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전략은 '백래시(backlash)'의 결과다]. 앞서 언급했듯이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사회가 성적으로 문란해지고, 생명을 경시해서 생긴 결과가 아니다. 이제야 비로소 여성을 시민으로 인정하고, 상식적인 시스템을 구성할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그런 인식 가운데 이 판결의 의미를 새기며 이 사회가 어떤 변화를 맞이하고 있고, 그 변화의 의미는 무엇이고, 기독교가 기여할 수 있는 바는 무엇인지 숙고하는 생산적이고 발전적인 논의를 하면 좋겠다(포괄적 성교육 실시, 성폭력 목회자 처벌, 성평등 문화와 제도 마련 등).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더 많은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교회에서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무려' 40년의 세월을 광야에서 보냈다고 배웠다. '와~ 정말 긴 세월을 광야에서 힘들게 보냈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낙태죄가 폐지되기까지 무려 66년의 세월이 걸렸다. '광야 40년'보다 26년이 더 걸린 것이다. 이제 감이 오는가? 여성들이 얼마나 긴 세월 동안 남성 중심, 가부장 사회라는 벽을 힘겹게 밀어내며 여기까지 왔는지. 그 세월 동안 사회가 많이 변했다. 사회가 변했으면 역할도 달라져야 하는 게 당연하다. 다시 묻겠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가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한국 기독교가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고, 정의와 평화를 사랑하고, 약자를 환대하며 사회 변화에 기여한 역사에 자긍심을 느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과 다른 선택을 하는 존재들을 신앙의 이름으로 멸시하고 혐오하는 기독교에 관해서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 두 기독교는 양립 불가능하다. 바라기는, 교회가 전자의 모습을 회복하여 신앙의 이름으로 좁아지는 것이 아니라 품이 넓어지는 방향으로 성숙하길 바란다. 적어도 사회 진보의 걸림돌이라는 부끄러운 역사를 가지지 말았으면 좋겠다.

낙태죄가 폐지되었다고 세상 안 무너지고, 하나님 진노 안 하시니 탄식하고 두려워 마시고, 성폭력 저지른 목회자를 제대로 처벌하는 데 힘을 모으시길.

오수경 / 청어람ARMC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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