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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삶에 의미를 더하다
[서평] 마크 A. 매킨토시 <신앙의 논리>(비아)
  • 정다운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9.03.29 09:25

"그른 것이 옳게 되리라, 아슬란이 오실 때
그 우렁찬 포효가 울릴 때, 슬픔은 사라지리라.
그분이 이를 드러내실 때, 겨울은 죽음을 맞으리라.
그분이 갈기를 흔드실 때, 다시 봄은 찾아오리라."
- C.S. 루이스 <나니아 연대기> 중

삶은 이야기와 닮았다. 삶은 어떤 논리나 개념, 논증, 전제와 결론으로 채워진 체계가 아니다. 삶은 우연한 만남과 사건들로 가득하고, 어떤 이론이나 설명보다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게다가 이 삶이라는 '이야기'는 (우리가 만들어 낸 여느 이야기와 달리) 기승전결이 선명히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작은 머리로는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즐비하고, 끝나서는 안 될 것 같은 시점에 이야기가 끝나 버리기도 한다. 죽음을 '끝'이라 여기는 우리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우리가 여러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찾고 즐기는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일지 모른다.

무수한 이야기들을 향유하며 우리는 바란다. 눈에 보이는 이 삶이라는 이야기가 전부는 아니기를, 우리 삶의 의미를 밝혀 주는 더 큰 이야기가 있기를. 그렇게 우리는 우리라는, 불완전하고도 파편적인 이야기의 의미를 밝혀 줄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추운 겨울 속에서 따스한 봄을 기다리고, 아슬란이 오기를, '슬픔이 사라지는' 날을 꿈꾸는 나니아인들처럼.

<신앙의 논리 - 그리스도교 신학의 넓이와 깊이>(비아)는 이 동경, 기다림의 자리에서, 그 기다림의 배경을 알려 주는 활동,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이라는 배경 속에서, 그 맥락 아래서 삶과 만물의 의미를 찾는 활동"이 바로 신학이라고 말한다. 신학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우리 일상 깊은 차원에 있는 진정한 의미, 희망, 고통, 용기, 사랑과 같은 신비의 근원을 발견하는 활동, 우리 삶이라는 작은 이야기에 빛을 비추는 큰 이야기, 이야기 중의 이야기를 찾는 활동이다. 혹자에게는 다소 낯설고 당혹스러울 수도 있는 이 신학에 대한 정의는 이 책 전체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신앙의 논리 - 그리스도교 신학의 넓이와 깊이> / 마크 A. 매킨토시 지음 / 안에스더 옮김 / 비아 펴냄 / 284쪽 / 1만 4000원

<신앙의 논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용을 충실하게 담아낸 신학 입문서이지만 여느 신학 입문서처럼 여러 신학자들의 생각을 정리하거나 신학 논쟁을 나열하거나 명제와 논증을 이어 가는 식으로 책을 기술하지 않는다. 물론 신학사와 주요 신학 이론을 잘 알고 있는 이라면 저자가 그 모든 것을 잘 알고 있고, 그에 관한 의견도 곳곳에서 제시하고 있음을 눈치챌 테지만, 이 책은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논증, 증명, 비판이 아니라 은유, 예, 이야기다.

이를테면 그리스도교 핵심 교리인 삼위일체에 대해 말할 때 매킨토시는 삼위일체와 관련한 주요 공의회에 관한 세부 정보들, 여러 신학자의 삼위일체에 대한 세부 논의들,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라는 개념적 용어들 대신 사랑을 내어 주고, 그 사랑을 돌리는 성부와 성자, 성령의 관계, 그 속에 넘쳐흐르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결과 창조·타락·죄·구원·종말(혹은 완성)이라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큰 뼈대들, 그리스도교 신앙이 고백하는 하느님의 핵심 활동은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펼쳐 내시는 일관된 이야기'라는 살, 이야기를 얻게 된다. 매킨토시가 전해 주는 (신학이 전하는) 큰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 태초에, 만물이 시작되기 전에, 삼위 하느님이 영원히 서로 주고받으시는 사랑의 관계가 있었다. 성부는 끝없이 자신을 내어 주시며 성자는 그 사랑을 받고 또다시 자신을 순종으로 내어 주신다. 그리고 성령은 기쁨으로 그 사랑을 전하고 흐르게 하신다. 이러한 관계, "사랑하는 이, 사랑받는 이, 기뻐하는 이" 사이의 친교를 통해 세계가, 만물이 창조된다. 애초에 "사랑의 대화가 이 세계를", 만물을 존재하게 했다. 그렇기에 깊은 차원에서는 만물 안에 이 사랑의 원리가 흐르고 있다. 코스모스 꽃 위에 앉은 잠자리 한 마리, 모래 한 알에도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이 담겨 있다.

피조물 중에도 인간은 독특한 존재다. 하느님이 '관계로서의 하느님'이듯,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 또한 관계로서의 인간이다. 우리는 관계의 산물이자, 사랑하고 사랑받는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완성된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관계 속으로 들어가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 그 사랑의 이야기를 이루는 문자들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우리가 속한 이야기를 망각했고, 그 사명을 스스로 저버렸다.

'믿', '음', '소', '망', '사', '랑'이라는 글자가 따로 떨어진 채로는 아무 의미를 담아내지 못하듯, 우리는 우리가 속한 참된 이야기, 이야기 중의 이야기에 속하기를, 그 사랑의 관계에 편입되기를 거절하고 고립을 자초해 파편화되고 부유하게 되었다. 이에 '이야기 중의 이야기', 모든 이야기 저변에 흐르고 있는 원리인 '말씀'이 스스로 역사라는 시공간을 꿰뚫고 이 파편화된 세상에 왔다. 그리하여 말씀은 우리에게 우리가 속한 본래 이야기를 상기하고, 글자를 이어 단어를, 단어를 이어 문장을 만들 듯, 우리 삶에 이야기와 의미를 회복하시며, 조각난 관계를 회복한다.

말씀, 성자로서 예수의 활동, 십자가에서의 죽음, 부활은 끝없는 자기 비움과 성부 하느님을 향한 온전한 순종, 우리를 향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이 우리가 만든 적자생존의 원칙, 폭력과 경쟁의 원리에도 사라지지 않음을 '드러내는' 동시에, 적자생존의 원칙, 폭력과 경쟁의 원리가 "거짓"이며 "망상"임을 폭로한다. 이제 우리에게는 그 사랑을 온몸에 익혀 그 이야기에 온전히 참여해야 하는 과제가 남았다.

하느님께서 펼쳐 나가시는 이야기의 문자들인 우리는 함께 모여 서로 연결되고 그분이 하신 일, 하실 일을 끝없이 기억하며, 서로를 더욱 온전히 사랑하는, 이야기에 합류하고 이야기가 되는 훈련을 이어 간다. 그렇게 우리는 '나' 자신을 넘어 '본래의 우리'가 된다. 이야기 중의 이야기, 모든 이야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야기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우리가 그 이야기에 합류하여 그 이야기를 살아 냄으로 이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완성될 것이다.

이 아름답고도 낯선 이야기는 그의 독창적인 고안물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낯설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그가 우리가 익히 아는 개념, 논증들, 파편적인 지식들을 하나의 큰 흐름, 서로 분절되지 않는 하나의 일관된 이야기로 엮어 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그는 탁월한 신학자들은 언제나 이를 강조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어쩌면 작은 씨앗이 땅에 심겨 큰 나무가 되고 열매를 맺는 과정에 가깝다. 씨앗, 떡잎, 나무, 열매 각각의 화학적 구성을 분석하는 시각만을 고수해서는 나무의 생을 다 이해하지 못하게 되거나, 적어도 그를 이해하는 중에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된다.

매킨토시는 현대신학이 흔히 빠지는 이 분절적인 시각을 조정하며, 우리가 진정으로 보아야 할 것은 씨앗에서 나무로 성장해 열매를 맺는 과정, 흐름, 이야기라고 말한다. '신앙의 눈'이 없는 이에게는 작은 씨앗에서 큰 나무로 자라나는 과정이 분절적으로 보이지만, '신앙의 눈'을 지닌, 그 흐름에 자신을 맡긴, 그 이야기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이 일관된 흐름이 보인다는 것이다. 신학, '신앙의 논리'는 이 흐름을 일관되게 파악하며 2000년을 이어 온 그리스도교 교리가 본래 가리키는 바, 교리의 본래 마음을 전해 준다.

좋은 이야기, 참된 이야기는 늘 그렇듯 '우리 삶에 더 깊고 새로운 의미를 더해 준다.' 비록 이 땅을 사는 동안 경험하는 작은 이야기가 다 해석되지 않고,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해 보이더라도, 우리가 넘어져 일어날 힘이 없을 때도, 삶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우리를 짓누르는 듯한 순간에도, 이 삶의 근원에는 그 큰 이야기, 영원하고 무한한, 어떤 죄도, 어떤 악도 끊을 수 없는 그 사랑이라는 이야기가 흐르고 있다고 매킨토시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말한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그분을 '나누어 주시는 활동'이며, 그분의 '사랑이 펼쳐지는 길'이다. 우리 삶은 그 사랑의 이야기 속에서만 제자리를 찾는, 작지만 커다란, 유한하나 무한한 이야기다. 언젠가 C.S. 루이스는 좋은 이야기의 특징에 관해 말한 바 있다.

"그 책들(좋은 이야기)은 우리가 '그 안의 고유한 세계'에 들어가게 해 주는데, 일단 접하고 나면 그 세계는 '필수적인 것이 된다. (중략) 그곳에 가 보기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곳이지만, 한번 가 보면 절대 그곳을 잊을 수 없다."

이 말은 궁극적으로는 이야기들의 이야기, 모든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 그 이야기 아래에, 근원에 언제나 변함없이 역동적으로 흐르고 있는 그 큰 이야기에 대한 말일지 모른다. 그의 말대로 이 이야기를 한 번이라도 만난, 내 삶이 그 큰 이야기와 이어져 있음을 깨달은 사람은 누구라도, "가 보기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그 '필수적인' 이야기를 절대 잊을 수 없다. 그 이야기 속에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바로 그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신앙의 논리>는 이 필수적인 이야기를 전하는 신학 본연의 기능을 상기하고, 그 이야기를 다시 전하는, 그렇게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지키시고, 언제나 우리를 부르시는 그분의 이야기에 합류하라고, 그렇게 그분의 이야기가 되어 가라고 우리를 향해 손짓하는 하나의 초대장이다.

정다운 /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풍요로움을 담은 책들을 정갈한 한국어로 옮기는 데 관심이 있다.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십자가>·<순례를 떠나다>·<신학자의 기도>(비아)를 한국어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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