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예배 모범 -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제시한 아름다운 예배를 찾아서> / 손재익 지음 / 흑곰북스 펴냄 / 376쪽 / 2만 2000원

책을 받아 보고 영어 참고서 같아 한참을 되작거렸다. '학습 현황 점검표'도 있고, 단원이 마칠 때마다 '단원 학습 점검표', '스터디 플랜과 인도자 가이드' 등이 있어서 영락없는 학교 참고서였다. 책을 중간쯤 볼 때 누군가를 통해 책을 이렇게 편집하는 것이 출판사의 콘셉트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용을 더 잘 파악하게 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생각하고, 예배의 기본 개념을 이해하는 데 이런 형태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제목 <특강 예배 모범 –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제시한 아름다운 예배를 찾아서>(흑곰북스)에 '신개념 기독교 고전 학습서'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말 그대로 '고전 학습서'를 만들고자 애쓴 책이다. 저자는 책 끝부분에서 '예배 모범'이라는 말에 대해 중요한 지적을 한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하던 대로, 듣던 대로, 보던 대로 교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모범이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기에, 모범을 찾거나 따를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행동이 당연시되면서 본질과 참 많이도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329쪽)

예배 모범이 예배의 표준이나 통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53쪽) 예배 형식은 어느 날 급조된 것이 아니라 신학과 교회 현실이 농밀하게 담겨 있는 결정체다. 예배가 어떤 형태를 갖게 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인데, 우리는 오랜 시간 익숙해진 예배 형식에 정색하며 질문하지 못했다. 왜 이렇게 하는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목회자들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우리가 예배의 뿌리를 찾는 이유가 될 것이다.

교단의 특징이 점점 사라지는 지금,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을 중심으로 장로교 예배 형태를 다시 살펴보는 것은 개혁파 교회 전통을 살필 좋은 기회다. 특별히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의 원문과 번역문을 함께 싣고 오늘날 한국교회 예배를 되짚는 해설 부분은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조목조목 한국 장로교 헌법을 비교해 볼 수 있게 한 것도 큰 장점이다.

목사가 된 지 수십 년이 지나도 헌법책에 수록된 예배 모범을 읽어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책은 예배 순서가 왜 필요한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한국교회가 소홀히 하고 있는 예배 순서는 무엇인지 잘 설명하고 있다. 알다시피 한국교회 예배 형태는 유럽 개혁파 교회로부터 전달받은 것은 아니다. 1800년대 미국 교회 부흥 시대의 예배 형태가 주요하게 이식된 것이다.

개신교 예배는 가톨릭과 달리 다양성과 자유를 전제하지만, 한국 장로교회가 장로교 근간이 된 개혁파 교회 예전을 온전히 전달받지 못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말씀과 성찬을 중심에 둔 3~4세기 교회의 예배 형태가 중세기 동안 의식儀式 중심, 사제 중심으로 바뀌면서 회중은 예배 구경꾼으로 전락했다. 라틴어로 진행하는 예배를 대다수 회중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찬양도 몇 사람의 전유물이었다. 화체설 영향으로 회중에게 성찬 때 잔을 주지 않았는데, 포도주를 흘린다는 이유에서였다. 개혁자들 예배는 중세 예배를 원래의 성경적 의미대로 회복하는 것이었다.

루터는 자국어 예배를 주장했고, 칼뱅은 성가대를 폐지했다. 회중의 찬양보다 찬양대와 오케스트라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는 오늘날 교회 현실에 비춰 봤을 때는 생경한 모습이다. 예배를 간소화하고 화체설을 부정해 회중에게도 성찬을 위한 잔을 전달하게 됐다. 이후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예배 모범을 작성하고 1645년 공포해, 이것이 장로교 예배의 근간이 됐다.

개혁파 교회 예배 모범의 핵심은 하나님과 회중의 온전한 교제를 방해하는 요소들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예배 내용과 형식, 예배 공간에서 인간의 고안물을 걷어 냈고 강단 장식마저도 회중의 시선을 분산하지 않도록 화려하지 않고 단순하고 소박하게 만들었다(365쪽). 설교자 얼굴이 잘 보이는데도 강단에 대형 화면을 설치해 설교자 얼굴을 비추는 한국교회 예배 풍경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예배 순서를 맡은 이도 한 사람의 회중에 불과하다는 개혁자들 생각을 잘 갈무리해야 한다.

칼뱅은 "목사가 회중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그의 의자를 회중이 앉는 의자와 마찬가지로 크기나 모양이 평범한 의자를 사용하였고, 이 의자를 설교단 아래, 곧 성도들 사이에 성도들과 같은 높이에 놓아두었는데, 예배 인도자로서의 목사가 회중과 동일하다는 표현"(104쪽)이었다.

설교에는 두 가지가 있다. '보이지 않는 설교' 혹은 '들리는 설교'인 강단에서 전하는 '설교'와 '보이는 설교'인 '성찬'이다(242쪽). 보이는 설교는 시각적 전달이 중요하므로 성찬상의 성찬보를 제거하고 성찬기를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도 목회자들이 기억해야 한다. 성찬보는 빵과 잔에 먼지가 앉지 않기 위해 사용했는데 성찬기 뚜껑을 덮어 둔 상태이니 이중으로 덮어 '보이는 설교'를 방해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아래 강대상'이 성찬상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위 강대상보다 한 단계 아래 있는 아래 강대상이 아니라 성찬을 진열하기 위한 성찬상이다. 개혁파 교회에는 설교단과 성찬상, 성찬상 위에 세례를 위한 세례반이 항상 진열돼 있다(366쪽). 한국교회 예배당 구조도 유럽 개혁파 교회보다 미국 교회 형태를 따른 것이다. 찬양대석이 강단 옆에 위치한 것이 대표적 예다. 책에서 예배당 공간에 대한 세밀한 언급이 있었다면 한국교회 예배 공간을 이해하는 데 더 큰 도움을 받지 않았을까. 공간에는 생각이 담겨 있다. 예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예배 공간은 달라지기 마련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예배당 안에 설치돼 있던 성화와 성직자의 예복, 촛대, 향 등을 제거했는데, 여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과 고신 교단은 강단의 십자가까지 부착하거나 설치할 수 없도록 결정했다(367쪽). 저자도 이 결정에 동의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될까. 성찬상에서 성찬보를 제거해 회중들이 성찬기를 보며 그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면(258쪽), 회중이 강단의 십자가를 보며 주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 또한 가능한 일 아닌가.

강단에 십자가 부착을 금지한 것은 상징의 역기능, 즉 '상징의 타락'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상징은 본질을 가리키는데 그 기능을 상실해 상징이 우상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찬이 '들리지 않는 설교'(242쪽)이듯 십자가도 말없이 전달되는 메시지가 될 수 있다. 기독교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회중에 전달하는 풍성한 순기능이 있는데도 역기능을 염려해 미연에 제거하는 것은 오감을 통해 누릴 수 있는 은혜를 메마르게 만드는 일이 될 수 있다.

보는 것을 고려할 때 또 한 가지 중요한 순서는 '축도'다. 저자는 '축도'를 "눈을 감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눈을 떠야 하는 시간"(281쪽)이라고 말한다. 축도는 '축복기도'가 아니라 '강복 선언'(Benediction) 시간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이 맞다. 개혁파 교회는 '축도'가 아니라 '강복 선언'으로, 민수기 6장 24-26절과 고린도후서 13장 13절 등을 대표 선언의 말씀으로 삼았다. 눈을 뜨고 목사가 손을 올려 강복 선언하는 것을 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다.

하지만 한국 장로교단은 대체적으로 강복 선언보다 축도에 가깝다. 교단이 정해 놓은 정형화한 축도문도 있다. 축도를 강복 선언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교단이 정해 놓은 축도문을 벗어나 성경 구절을 낭독하는 것도, 회중이 눈을 뜨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가능하리라고 생각된다.

이 책은 성찬의 공동체성과 종말적 측면(241쪽), 음식으로서의 떡과 포도주(250쪽), 유아세례(219쪽), 영어 예배(183쪽)에 관한 문제, 장로가 예배할 때 어디에 앉아야 하는지(103쪽), 교육 전도사의 설교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176쪽) 등 교회가 전통 속에서 함께 고민해야 할 중요한 문제들로 가득하다. 예전禮典에 취약한 한국 장로교회가 장로교 전통 속에서 현재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잘 정리된 책이다.

*이 글은 <크리스찬북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서중한 / <크리스찬북뉴스> 운영위원, 다빈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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