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길에서 꽃 한 송이에 걸음이 멈추면 / 나는 그 꽃입니다.
밤하늘 바라보다 별 하나 눈 마주치면 / 나는 그 별입니다."
- 박두규, '그렇게 그대가 오면' 중

여울교회에서 설교하던 3월 10일, 주보에 있는 이 시가 바짝 다가왔습니다. 남궁억 선생이 무궁화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무궁화가 되어 전국 보급으로 독립 정신을 고취하셨나. 강원도 홍천군 모곡리에 낙향해 고통받는 이들과 눈 맞추고 하나 되어 희망을 노래하신 것인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 삼천리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이 동산에 할 일 많아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 곧 이날에 일 가려고 그 누가 대답을 할까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삼천리 강산 위해 /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 강산에 일하러 가세"
- 새찬송가 580장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1절

이탈리아 작곡가 도니체티의 오페라 '루치아 디 람메르모어 Lucia di Lammermore'에 나오는 합창곡에 한서 남궁억 선생이 가사를 붙인 찬송가입니다. 독립의 그날까지 소망을 잃지 말고 힘차게 일하자고 노래한 한서의 치열한 삶의 흔적은 그 호칭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계몽운동가, 구한말 관료, 애국지사, 독립운동가, 교육자, 언론인, 저술가, 기독 신앙인".

1863년 서울 정동에서 출생한 한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영어 학교(동문학)를 수석 졸업하고(1884년), 고종 황제의 어전통역관으로 시작해 여러 관직(내부토목국장, 칠곡부사 등)을 맡았을 때 잘못된 관습을 바로잡고 백성의 불만과 원성을 들어 주어 칭송받았으나 한계를 절감하고 독립운동가로 삶을 전환했습니다. 내부토목국장 시절 다른 관료들 반대를 뚫고 탑골공원을 완공했는데, 후일에 3·1 혁명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역사적 장소가 됩니다.

한서는 독립협회 총무를 시작으로, 근대 시민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언론의 힘을 직시해 1898년 <황성신문>을 창간하고 초대 사장이 된 후 러일협정에 문제를 제기해 4개월간 구금당하는 등 4번의 옥고를 치렀습니다. <황성신문>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시, 장지연의 사설 '시일야방성대곡'을 게재해 조선인들의 공분을 이끌어 냈습니다.

관동학회 회장으로도 헌신하고, 전국에 70여 개 지부를 둔 대한협회 회장으로 사립학교(상록수) 운동을 주도한 결과, 학생들이 3·1 혁명을 전국으로 확산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교육이 곧 독립'이라는 한서의 신념은 <대한협회보> 창간사에서 밝힌 "사상이라는 자는 사실의 어미다. 그러나 능력이 없는 사상은 아무 쓸모가 없으니 사상에 능력을 더하라"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1915년 남감리회 본처전도사가 된 한서는 서울에서 더 이상 독립운동가로 살아갈 수가 없게 되자 1918년 선친의 고향 모곡리(보리울)로 낙향했습니다. 1919년 사재를 털어 10칸 기와집 모곡예배당을 세우고 매주 토요일이면 마을을 돌며 "내일은 주일이니 교회로 나오시게" 하면서 전도하자, 곧 예배당이 비좁아 바깥마당에 멍석을 펴고 예배했습니다. 민족 교육의 실천으로 4년제 '모곡여학당'을 비롯 6년제 모곡학교를 설립해 12회 졸업생까지 배출합니다.

음악에 재능이 많은 한서가 직접 작사·작곡한 구국의 심정을 담은 사상가歌들은 전국 각지로 퍼져 애창가가 됐고, 오늘날에도 부르는 찬송 '일하러 가세'도 있습니다. 한서는 노동 정신을 강조해, 실습 시간에는 무궁화와 뽕나무 묘포 작업, 도로 수선, 새끼 꼬기, 가마니 짜기 등으로 생활 농촌교육을 실시했습니다. 독서회, 토론회, 웅변대회, 학예회를 열었으며, 생활 신앙에 철저해 인간 차별의 악습을 없애려고 누구에게나 깍듯이 경어를 썼다고 합니다. 그가 쓴 역사책 <동사략>, <조선 이야기사>는 제자들이 먹지로 복사하고, 원근 각처 사립학교에서 구입해 다시 복사하는 것으로 일경日警의 눈을 피해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쓰였습니다.

선생은 일제가 만든 기차나 버스를 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연희전문학교 졸업식에 축사告辭를 부탁받았을 때, 2월 초순이었지만 무명 바지저고리와 두루마기를 입고 도보로 눈 덮인 고개를 넘고 넘어와 이렇게 연설했습니다.

"(전략) 우리는 강자를 도와서 부스러기 권세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약자를 살려 주고 같이 강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졸업생들에게 간절히 부탁하는 것은 내가 산속의 눈길을 걸을 때 눈을 뚫고 원래의 길을 찾아서 걸은 것처럼, 여러분이 바로 걸어야 뒤에 따를 사람도 바른 길을 걸을 것이니 저 피폐한 농촌에 내려가서 일하기를 바랍니다."

한서는 나라꽃 무궁화에서 우리 민족의 끈기와 지조, 번영을 찾을 수 있다고 보고, 일찍이 무궁화 나라꽃 운동을 펼쳤습니다. 모곡으로 내려온 뒤로는 무궁화 묘목을 가꾸어 전국 각지 교회와 사립학교로 보내는 운동을 전개해 구속되기까지 10년 동안 무려 30만 그루를 전국 각지로 보급하며 민족혼 고취에 힘을 쏟았습니다. 이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홍천경찰서 일경들은 1933년 11월 모곡학교로 들이닥쳐 선생을 연행했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마을 청년들 집을 수색해 기독교대한감리회 춘천선교부를 중심으로 일어난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으로 결성된 십자가당 기록을 입수하고 마을 청년들까지 연행했습니다. 일제는 이 조직과 한서가 주도한 애국 독립운동을 엮기 위해 극심하게 고문을 자행했지만, 한서는 평소 공산주의 한계와 문제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반대했기에 대부분의 청년이 석방됩니다.

그러나 한서는 평소 펼쳤던 민족 교육과 독립운동이 빌미가 되어 보안법 위반 혐의로 투옥된 후 1935년 가을 병보석으로 나오기까지 옥고를 치렀습니다. 연로한 한서는 심한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1939년 4월 5일 77세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한서의 무궁화 운동은 세계 독립운동사에서 그 어떤 활동보다 극적이고 큰 영향력을 행사한 운동일 것입니다.

한서교회. 이근복 그림

남궁억 선생이 남긴 주옥 같은 말들이 한서교회 교우들과 마을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 오고 있습니다. "내가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과일나무 밑에다 묻어서 거름이나 되게 하라. 나는 죽어서도 민족의 거름이 되겠다", "나는 독립을 위해 일했지만 독립을 보지 못하나 너희는 독립 후의 일을 준비하라". 이렇게 한서는 실천적 독립운동가요, 성서를 정독하고 이해하고 가르치며 신앙 구국과 교육입국을 위해 일생을 바친 민족 지도자입니다.

3·1 운동 100주년에 기억할 만한 교회를 찾다가 3월 2일 한서교회를 방문했는데, 5000평 땅에 심긴 무궁화를 볼 수 없어 아쉬웠습니다. 자명, 환희, 동철, 영백, 파랑새, 삼천리……. 여러 품종이 적힌 작은 표지판만 봤습니다. 앞에 동상이 서 있는 '한서남궁억기념관'에는 다양한 자료가 전시돼 있었고, 전통 한옥으로 2004년 복원한 모곡교회당에는 낡은 풍금이 긴 역사를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한서가 갖은 고문과 협박, 회유에 넘어가지 않고 지조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심성과 불굴의 정신 덕분이요, 그가 위로받고 새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한 십자가 신앙 덕분이었습니다.

옛 모곡교회 오른쪽에는 1998년 감리회 동부연회가 힘을 모아 봉헌한 한서기념예배당이 있습니다. 100년 전 한서가 세운 모곡예배당 정신을 이어 가는 교회인데 한서교회로 이름을 바꾼 것은 1960년대 중반입니다. 1995년 부임한 현재호 목사님과 교우들의 각별한 수고로 한서교회 과거 역사를 기리고 새날을 열어 가는 모습이 특별해 보입니다.

십자가 종탑과 제단 위 십자가 조형이 주는 울림이 크고, 친교실에는 교우들의 신앙 시와 그림, 조각 작품들이 전시돼 있습니다. 한서기념관과 무궁화 동산, 100주년 기념 동산에는 자연이 주는 생명의 힘이 충만하고 그늘막, 의자와 테이블이 마련돼 있어 누구든 지나가다 들어와 쉬어 갈 수 있는 아름다운 쉼터입니다. 오랜만에 만난 현재호 목사님은 자신의 목회 철학과 교회 운동은 한서 남궁억 선생의 "독립 후의 일을 준비하라"는 말에서 시작됐다고 전해 주었습니다.

"어느 순간, 그대가 오면 / 나는 그대일 뿐입니다."

박두규 시인의 '그렇게 그대가 오면' 마지막 연입니다. 이제 남궁억 선생이 우리에게 다가왔으니, 우리도 남궁억이 되면 나라다운 나라를 세우는 무궁화가 될 것입니다.

*'그림으로 만나는 한국교회'는 매월 2차례 업데이트됩니다.

이근복 / 목사,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을 거쳐 현재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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