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게토(ghetto). 20세기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유대인을 격리·차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통제하고 탄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게토를 사용했다. 히틀러의 죽음과 함께 사람들을 한곳에 가두고 관리하는 물리적 게토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지금도 장벽에 갇혀 사는 이들이 존재한다.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미셸 더나이어(Michell Duneier) 교수는 <게토: 장소의 발명과 아이디어의 역사 Ghetto: The Invention of a Place, the History of an Idea>에서 도심 빈민가 흑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철조망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고 했다. 저자는 게토라는 공간을 통해 흑인 빈민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지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동부 필라델피아시에서도 가장 위험한 흑인 빈민 지역 '노스센트럴(North Central)'에서 사역 중인 이태후 목사도 흑인 빈민 지역이 게토와 같다고 말한다. 사회와 단절된 삶을 사는 아이들은 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다. 이 목사는 '게토 허무주의'(Ghetto Nihilism)가 만연한 이곳에서 약 13년을 보냈다.

필라델피아시의 '할렘'으로 불리는 흑인 빈민 지역에서 사역하고 있는 이태후 목사가 펀드레이징을 위해 잠시 한국을 찾았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특별한 일을 한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무작정 길을 쓸었고 눈을 치웠다. 지나가는 주민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고 얼굴을 익혔다. 이 목사는 동네를 관찰하던 중 가난한 아이들이 평소 거리에 방치돼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태후 목사는 필라델피아시에서 식사를 지원받고 한인 교회 도움을 받아, 동네 아이들을 위한 여름 캠프를 시작했다. 소규모로 시작한 여름 캠프는 이제 동네 사람 중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큰 연례행사가 됐다.

외지인 한 명 없던 흑인 빈민 지역에서 동양인 목사로 13년을 살았다. 서서히 동네로 스며든 이태후 목사는 여름 캠프 너머를 준비하고 있다.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편히 와서 먹고 놀다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커뮤니티 센터'를 세우려 한다. 이 공간을 만드는 데 필요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이태후 목사를 3월 19일 서울 필동 카페바인에서 만났다.

사회와 단절되고 무기력하게 살던 아이들
여름 캠프 통해 꿈 갖고 지경 넓혀
범죄 환경 만연한 빈민 지역
방과 후 안전하게 머물 공간 필요

동네에서 '레버런드 리'(이 목사)로 불리는 이태후 목사는 2006년부터 여름 캠프를 열었다. 캠프는 7월 4주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진행한다. 아침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아이들과 함께 노는 게 주요 일과다. 5일 중 2일은 교외로 나가고, 3일은 무술·공작·미술·춤·문학 등을 배운다. 일정을 시작하기 전, 짧게 찬양과 설교, 성경 공부도 진행하지만 원하지 않으면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무슬림 아이까지 부담 없이 참여하게 됐다.

7월 한 달간 동네 길을 막고 길에서 여름 캠프를 진행한다. 미국 전역에서 찾아온 자원봉사자들이 아이들과 함께 뒹굴며 시간을 보낸다. 사진 제공 이태후

그는 이 캠프를 통해 빈민가 아이들의 변화를 직접 목격했다. 이 목사는 "가장 큰 변화는 '꿈'이라는 단어가 없던 곳에 이 단어가 들어섰다는 것이다. 허무주의에 빠져 될 대로 되라며 살던 아이들이 구체적인 꿈을 그리고 대학 입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TV에서나 보는 연예인, 스포츠 스타 등을 말하는 게 전부였지만 이제는 다르다"고 말했다.

꼬마 때부터 캠프에 참가했던 한 학생은 지금 대학에서 응용범죄학을 공부하고 있다. 6살 때부터 캠프에 참석했다가 지난해에는 자원봉사자로 참가한 한 고등학생은 대학 갈 꿈을 꾸게 됐다고 말한다. 보이지 않는 장벽에 막혀 사회와 격리돼 살던 이들이, 미국 전역에서 찾아온 자원봉사자를 만나고 대화를 나누면서 롤모델을 찾았다. "나를 아버지로 생각한다는 아이도 있었다." 이 목사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이들의 변화는 어른들의 변화로 이어졌다. 이전에는 술에 찌들어 자녀가 공부하는지 마는지 별다른 관심도 두지 않았던 부모가 아이들 숙제를 챙기기 시작했다. 이태후 목사가 지나가면 다가와 포옹하며 "목사님이 하는 일이라면 다 좋다"고 응원하는 엄마도 있다.

의심의 눈초리로 여름 캠프를 보던 마을 어른들도 이제는 자원봉사자로 캠프에 참여한다. 현장 본부석에 앉아, 다치는 아이는 없는지 심한 장난을 치는 아이는 없는지 살피고, 배식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이다. '너희들의' 여름 캠프가 '우리들의' 여름 캠프가 된 것이다.

여름방학에도 딱히 갈 곳이 없고, 사회와 접점이 없는 빈민 지역 아이들에게, 여름 캠프는 지경을 넓힐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사진 제공 이태후

'커뮤니티 센터'는 여름 캠프의 연장선에 있다. 여름 캠프는 1년에 한 차례, 4주만 진행하지만 커뮤니티 센터는 연중 내내 아이들과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 9살부터 13살 청소년을 위한 안전한 공간을 목표로 한다.

이태후 목사는 "학교가 끝난 오후 3시부터 저녁 식사를 하는 6시 사이가, 아이들이 범죄의 유혹에 빠질 수 있는 시간대"라고 말했다. 남자아이들은 동네 형의 심부름 부탁을 받고 마약을 배달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세계에 발을 들인다. 여자아이들은 그루밍 성폭력에 노출되기 십상이다.

고등학교에 간다고 해도 환경이 변하지 않는 이상 삶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흑인 빈민 지역에 사는 흑인 고등학생 70%가 학교를 중퇴하고 30대 흑인 20%가 감옥에 다녀온다는 통계가 있다. 그들이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사는 게 아니다. 딱히 대안을 보여 주지 못하는 어른들의 삶, 아무도 관심 보이지 않는 게토 안의 삶을 살다 보면 자존감이 땅바닥에 떨어진다.

이태후 목사는 "'너를 지으신 모습 그대로 너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들은 아이들이 자존감을 회복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삶을 꿈꾸기 시작한다. 이 아이들의 꿈을 유지하려면 무엇보다 안전한 공간이 필요하다. 빈민가 특성상 원치 않아도 범죄의 길로 빠질 수 있는 여건이 많다. 건전하고 안전한 환경을 만들자는 취지에서 커뮤니티 센터를 기획하게 됐다"고 말했다.

왜 교회 먼저 세우지 않느냐고?
"여름 캠프가 이미 교회"
전 세계 선교 앞장서는 한국교회
흑인 빈민들 삶에도 관심 갖길

커뮤니티 센터를 세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건 2010년이다. 그때 마침 동네에 3층짜리 건물이 매물로 나왔다. 주인이 제시한 가격은 12만 달러(한화 약 1억 3800만 원)였다. 이미 동네에는 한 차례 투기 바람이 분 뒤였다. 너무 비싸다고 생각한 이태후 목사는 더 낮은 금액을 제시했고, 계약은 성사되지 않았다.

이 건물을 커뮤니티 센터로 바꾸기 위한 펀드레이징을 진행하고 있다.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저녁 식사 전까지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구글 맵 갈무리

2011년 비자 문제로 한국에 왔다가 2014년에야 돌아간 이태후 목사는 그때 그 건물이 6만 달러(한화 약 6900만 원)에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목사는 "필라델피아로 돌아가는데 건물이 안 팔렸을 것 같더라. 주인과 협상 끝에 결국 3만 5000달러에 계약했다. 많지 않은 돈으로 꼭 필요한 건물을 구입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도 하나님이 개입하셨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스러져 가는 건물이었지만 어쨌든 장소는 마련했다. 건물 옆 공터도 시에서 진행한 경매를 통해 낙찰받았다. 문제는 이를 수리할 돈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한인 교회를 중심으로 사역을 소개하고 펀드레이징을 시작했다. 아직 필요한 돈을 다 모으지 못했다.

커뮤니티 센터가 아닌 '교회'를 세운다고 하면, 선교에 익숙한 한국교회 문화에서 모금이 더 쉽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이태후 목사는 "이미 교회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지금도 동네 사람들은 누가 죽거나 병원에 입원하는 등 힘든 일이 있으면 나를 찾는다. 나도 동네 사람들을 내가 돌봐야 할 양 떼라고 생각한다. 커뮤니티 센터를 운영하다가 기도 모임이 생길 수도 있고, 예배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으면 예배해야 할 수도 있다. 함께하는 사람들 필요에 따라 다양한 교회 모습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릴 때부터 여름 캠프에 참여했던 아이들이 성장해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사진 제공 이태후

이태후 목사는 흑인 빈민가에서 사업으로 성장한 한국계 이민 1세대가 흑인 빈민들을 위한 일에 힘써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 목사는 "1970년대 이민 온 한국인들이 미국에 도착하기 전, 이미 흑인 인권 운동가들이 치열한 투쟁을 통해 인종차별에 대한 장벽을 허물었다. 백인이 아니어도 시민권·투표권을 얻을 수 있고, 실력 위주로 평가받을 수 있도록 최소한의 제도를 마련했다. 흑인의 희생이 없었다면 한국계 이민자들도 그만큼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태후 목사는 빈민가를 "창살 없는 감옥 같은 곳"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누가복음 4장 18절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를 인용하며 "아프리카·아시아·남아메리카 등 전 세계 선교에 힘을 쏟는 한국교회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꿈을 잃은 자가 꿈꾸게 하는 이 일에도 관심을 보여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커뮤니티 센터 건축 후원 문의 taehoolee12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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