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교회사는 기독교회의 기원과 발전 과정을 연구한다. 여느 역사와 마찬가지로, 2000년 교회사도 어떤 시선으로 돌아보느냐에 따라 얻을 수 있는 메시지가 달라진다. 약자를 끌어안고 권력에 저항하다가 순교를 당한 역사가 있는가 하면, 제국 권력과 결탁해 소수자를 억압하고 마녀사냥을 자행한 역사도 있다.

교회사학자 하희정 박사는 2000년 기독교 역사를 '여성' 시선으로 돌아보는 <역사에서 사라진 그녀들 – 젠더로 읽는 기독교 2000년>(선율)을 출간했다. 남성의 얼굴을 걷어 내고 여성의 얼굴을 되살리자, 배제된 자들의 역사가 드러났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주류 역사에서 외면당했던 이름 없는 여성들을 민중사 관점에서 조명했다.

하희정 박사는 감신대 대학원에서 한국교회사를 전공했다. 미국 버클리 GTU(Graduate Theological Union)에서 미국 종교사와 아시아 관련 역사를 공부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 박사는 역사를 공부할수록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고 다양성을 존중하게 된다고 말했다. 오늘날 교회가 폐쇄적이라며, 이를 극복하고 100년 전 3·1 운동 당시처럼 이웃 종교까지도 넉넉히 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 근본주의적 성서 읽기를 넘어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경기도 고양 능곡역 근처 연구실에서 하희정 박사를 3월 8일 만났다. 교회사를 공부하게 된 계기, 교회사학자 시선으로 본 성서와 오늘날 한국교회에 대한 이야기, 역사를 보는 눈과 책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 기사에서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다뤘다. 이번 글에는 한국교회 상황과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역사에서 사라진 그녀들> 출간을 맞아, 하희정 박사를 만났다. 뉴스앤조이 장명성

역사가 '오래된 미래'인 이유
"공감 없는 지식은 오만하게 만들 뿐
다양성 존중하는 태도 배워야"

- 한국교회는 순교, 신사참배 거부와 같이 주로 업적이 될 만한 역사를 되새기는 듯하다. 어떤 시선으로 역사를 보는 것이 좋을까.

한국교회는 자부심을 줄 만한 과거 업적과 영광을 부각하기 바쁘다. 자신감을 잃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자신감이 있다면, 오히려 실기失機했던 부분을 끄집어내 재검토하면서 개선점을 찾아갈 것이다. 실수를 들여다볼 용기가 없는 듯하다. 과거를 찬양하는 데 익숙하다.

역사에는 버릴 게 없다. 업적보다 실패에서 많이 배운다. 역사를 돌아보면 잘못된 선택으로 생겨난 결과가 있는데, 그 결과를 충분히 복기하지 않아 실수를 반복한다. 결국 그것이 폭력이나 적대감, 전쟁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을 본다. 위기감이 그렇게 표현되는 것이다. 용기를 내어, 잘못 선택했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치부한 부분을 들여다봐야 한다.

새로운 길을 가려면 지도가 필요한데,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속에서 제대로 길을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걸어온 길을 더듬어 큰 그림으로 봐야 한다. 그렇게 하면, 미래가 막연하지 않고 방향 찾아가는 것도 어렵지 않다. 해답은 분명히 역사 안에 주어져 있다. 그래서 역사는 '오래된 미래'다.

역사라고 하면 우리는 '과거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기억하기 바쁘다. 사실을 암기하고 기억하려다 보니, 정작 그 기억의 주인은 누구인지 질문하지 않는다. 사건의 주인을 묻다 보면, '그 시대도 우리 시대와 다르지 않았구나' 생각할 수 있다. 과거 사실에 매몰돼 있고 과거 사실 자체를 기억하려 애쓰다 보니, 그 과거가 불러오는 나 자신과 우리 시대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역사는 과거 그 자체를 복원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과거는 이미 흩어져 버린 시간이다. 역사는 선택된 기억의 재구성이다. 중요한 문제는 누가 어떤 관심으로 역사를 소환하느냐다. 이 시대에 어떤 질문이 있어서 역사를 끌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역사는 우리를 향해 던지는 질문이 된다. 과거를 통해 우리 모습을 들여다본다. 과거에 있었던 문제 중 오늘날에도 발견하게 되는 문제가 많다. 그때 역사를 통해 공감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 역사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도움이 될 만한 책이 있다면.

<사진 신부 진이>(문학수첩)처럼 역사가 담긴 문학책을 추천하고 싶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 딱딱한 교재보다 문학책을 많이 활용한다. 나는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 때 엔도 슈사쿠의 <침묵>(홍성사)을 만나, 인간의 고통과 신의 침묵에 대해 깊이 고민할 수 있었다. 문학은 사람을 획일화하지 않고 이해할 수 있도록 상상력을 풍성하게 해 준다.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특히 역사가 담긴 문학에서 다양한 삶을 만날 수 있다.

일례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기록은 많은데, 그의 부인이 남긴 기록은 없다. 어느 작가가 다양한 자료를 모아 부인 카타리나 관점에서 루터와 함께한 시간을 전기소설 장르를 빌려 썼다. <불순종의 아이들>(솔출판사)이다. 역사에서 배제되는 자들은 글을 갖지 못해 기록을 남길 수 없는 자들이다. 기록이 남지 않았다고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때 문학이 이들을 역사로 소환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교회에서 사라진 게 문학 아닌가. 간증집, 성경만 읽으니까 인간에 대한 이해가 좁아서 성경 구절로 모든 것을 다 판단하고 가르치려 든다. 이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을 만든다. 기독교인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게 인간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다. 지식만 쌓는다고 우리 삶이 건강해지지는 않는다. 공감 없는 지식은 사람을 오만하게 만들 뿐이다. 교회가 문학, 역사서를 통해 상상력을 풍부하게 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었으면 한다.

그런 점에서, 천재와 악마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았던 미술가 카라바조를 다룬 <카라바조의 비밀>(레드박스)도 참고가 되는 좋은 역사소설이다. 카라바조의 성취뿐 아니라 삶의 그림자까지도 자세하게 들여다본다. 예술가만큼 현실 너머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도 없고, 치열하게 삶을 살았던 사람도 없다. 그러다 보니 예술가의 삶을 보면 시대 군상도 자연스럽게 들여다볼 수 있더라. 예술가 평전이나 예술가 관련 역사소설을 읽어도 좋겠다.

하희정 교수가 출간한 저서 2종과 추천 도서들. 뉴스앤조이 장명성

"3·1 운동 100주년,
교회의 폐쇄주의 극복 계기 삼자
성서 읽기, 문자숭배주의 넘어
이 시대 고통 보는 눈 필요"

- 한국교회가 자랑스러워하는 역사가 3·1 운동이다. 올해 3·1 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여러 행사를 열기도 했는데, 어떤 자세로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야 한다고 보는가.

사실 3·1 운동을 돌아볼 때, 우리는 만세 부르고 독립을 외친 것만 기억한다. 하지만 3·1 운동은 의미가 훨씬 크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출발시킨 토대였고, 미래를 위한 청사진을 그린 사건이다. 3·1 운동 당시 발표한 선언문에 공통적으로 담긴 그림이 있다.

이들은 막연하게 독립을 외치지 않았다. 독립을 하려면 주권자가 누구인지 밝혀야 한다. 대한제국 한일 강제 병합 후 독립이 이뤄졌다. 한일 강제 병합이 이뤄진 것은 황제가 무한한 군주권을 갖고 있었고 이것을 일본에 영원히 양도한다는 문서 때문이었다. 이 문서를 영원히 폐기하고 탄핵할 방법으로,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대한민국은 독립된 국가라는 것을 선언하고 만세를 부른 것이다.

19세기 말, 우리나라가 근대국가로 가면서 어떤 국가를 지향할 것인지 묻는 시점이 있었다. 이때 한일 강제 병합이 이뤄지면서, 이 논의가 단순히 근대 정치체제 논쟁이 아니라 주권 의식에 대한 이야기로도 확장됐다. 이들은 국민이 주권을 갖는 기초 위에서 대동 평화 사상을 올려놓았고, 그 위에 만인 평등사상을 놓았다. 서양 공화제는 왕정 체제를 없애고 난 다음에 세워졌는데, 대동 평화 사상은 왕을 배제하지 않고 모두가 주권자로 함께하는 나라를 이야기했다.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다는 대동 평화 사상의 정신에서 33인 종교인이 함께 참여했다. 그러면서 과거에만 머물지 않고 미래를 그려 냈다. 독립선언문에는 '평화', '인간 존엄' 등 종교의 핵심이 담겼다. 독립 대한의 미래 세대는 세계 시민사회에 합류할 것이고, 인류 평화를 위해 기여한다는 약속도 있다. 이 정신을 실현하는 게 앞으로 주어진 과제일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3·1 운동에 기독교인이 얼마나 참여했는지에만 관심을 두는 것 같다. 어느 교회에서 누구 장로를 통해 태극기가 전달됐는지 신경 쓴다. 총칼을 두려워하지 않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운동에 참여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그들이 갈망한 세계는 모두가 함께 평화롭고 평등한 사회였다. 100년 전 선언했던 이 청사진을 위해 그동안 교회가 얼마큼 노력해 왔는지 질문해야 하겠다.

종교들이 합심해서 100년 전 3·1 운동에 참여했다. 오늘날 우리 또한 마찬가지로, 아직까지 이루지 못한 과제를 이루기 위해 종교의 경계를 넘고 성별의 경계를 넘고 지역의 경계를 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교회의 폐쇄주의를 빨리 극복해야겠다. 문을 열고 시민사회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보편적 인류 사회를 위해 대의를 갖고 통 크게 이웃 종교와도 함께해야 한다. 교회가 헌신하는 마음으로 자기 울타리를 넘어야 하지 않을까.

100년 전 기독교에는 이 자신감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자신감을 상실해 위축된 채로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있는 상황이다. 기독교가 폐쇄적인 것도, 그만큼 자신이 없어졌기 때문 아닐까 싶다. 자신감을 회복해 이웃 종교도 넉넉히 품어 안아야 진짜 큰 종교가 될 수 있다. 다른 교단은 둘째 치더라도, 바로 옆 교회도 못 품는 게 한국교회 현실이다. 3·1 운동 100주년을, 미래를 향한 이정표를 세워 가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100년 전, '감리회 몇 명 참여했느냐', '장로교 몇 명 참여했느냐', '저 사람 교단이 뭐냐' 따졌으면 3·1 운동은 안 일어났을 것이다.

- 오늘날 한국교회에 있는 폐쇄주의는 근본주의적 성서 읽기와 연결돼 있다고 본다. 바른 역사 읽기는 바른 성서 읽기와도 상통하는 측면이 있는 듯한데, 교회사학자 입장에서 오늘날 성서 읽기는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하나만 아는 것은 하나도 모르는 것과 같다"는 말을 하고는 한다. 성서만 아는 것은 성서도 모르는 것과 같다. 성서도 그 시대 공유된 자산이다. 당시 주변 환경을 비롯해 여러 가지를 알아야 제대로 알 수 있다. 성서가 진리를 담은 보고寶庫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성서와 우리 사이에는 시간의 비거리가 있다.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오히려 성서를 왜곡하는 오류에 빠진다.

성서의 언어는 그 시대 세계관을 담고 있다. 21세기 언어와 큰 차이가 있다. 둘 사이 거리를 무시하고 보면, 문자숭배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성서에 담긴 풍성한 진리를 상당히 협소하고 궁색하게 만드는 것이다. 성서의 진리를 교회 밖 세상과 공유할 때, 바로 그 성서가 가장 걸림돌이 되는 모순에 빠진다. 성서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고 했을 때, 그 하나님은 성서 밖에서도 일하시는 분이다. 다른 데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 성서에서도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것이 아니다.

성서가 아무리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어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르다. 공격하는 데 쓰면 무기가 된다. 다른 의견을 가진 공동체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성서를 쓰는 경우가 많다. 성서는 인간이 가야 할 길을 밝혀 주는 말씀이다. 공격 무기가 아닌데, 우리는 자꾸만 그 사실을 잊는다.

교리로만 접근하니까 이해가 안 되는 지점도 생긴다. 이해가 안 되니 무조건 믿으라 한다. 역사를 통해 성서를 들여다보면, 전체 그림을 파악하고 성서에 있는 풍성함을 그대로 받을 수 있다. 종교개혁 시대 개신교가 '오직 성서로만'을 이야기했는데, 누가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었다. 서로 자기 해석만 옳다고 주장해, 종교전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경험이 다르면 서 있는 자리가 다르니, 성서를 보는 관점도 다를 수밖에 없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것이 배타성을 낳고 적대와 혐오의 언어를 부른다. 결과적으로 성서의 정신을 정면으로 위배하게 된다. 16세기 세계관이 담긴 종교개혁 시대 성서관을 극복하고, 성서를 틀에 가두지 말고 열린 책으로 놓아둬야 한다. 그래야 새 시대에 새롭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공유할 공간이 생기지 않겠나.

하희정 박사는 종교개혁 시대 성서관을 극복해야 한다고 했다. 그럴 때에야 성서에 담긴 풍성한 진리를 누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성서의 가치를 충분히 수용하지 못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세상에 대한 시각에 있다. 우리를 지배했던 오랜 교리가 원죄론이기에, 어떤 것보다 죄를 먼저 본다. 모든 고통과 어려움이 죄로부터 출발한다고 본다. 죄를 만들어 놓고 다른 것을 보니까 고통받는 사람을 오히려 죄인으로 모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죄가 있어서 고통받는 게 아니라, 고통을 유발하기에 죄가 되는 것이다.

죄보다 인간 안에 있는 고통을 먼저 봐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삶으로 가르쳐 주신 것이다. 고통을 들여다보기도 전에 죄라고 먼저 낙인찍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시선을 열고, 우리 안의 고통, 우리 시대의 아픔을 먼저 들여다볼 수 있어야겠다. 아픔을 볼 수 있는 눈을 키워야 한다. 교회가 세상과 소통하기 어려운 공동체로 각인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죄가 아니라 고통을 먼저 살피고 시선을 바꾼다면, 기독교 콘텐츠가 완전히 달라지지 않을까.

우리는 늘 하나님을 찾으면서 하나님이 어디 계실까 질문한다. 고통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 무엇을 얻기 위해 예수님 이름, 하나님 이름을 도구화하면서 자기 욕망을 채우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고통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믿음 하나 있으면, 오늘날 경험하는 수많은 문제에 남 이야기하듯 손가락질하거나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모른 척 외면하는 일은 최소한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과 시대에 무한 책임 의식을 갖고, 세상과 시대의 질문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이다. '난민 탓이야', '여성 탓이야', '동성애자 때문이야' 할 것이 아니다. 교회는 세상에 있는 어떤 고통일지라도 모두 우리 책임이라고 고백해야 한다. 교회 일뿐 아니라 교회 밖 어떤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무한 책임 의식을 갖는 게 예수님이 보여 줬던 삶의 모습이다. 그래서 자기 목까지 내놓으시고 새 길을 내셨다. 그것 하나 붙잡는 것이 핵심이다. 예수님은 고통에 공감하고 무한 책임을 갖고 스스로 그것을 짊어지면서 가셨다. 그러기에 '나 홀로 구원', '나 홀로 행복'은 없는 것이다.

모두가 행복해야 내가 행복하고, 모두가 즐거워야 내가 즐거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참인간이 되는 것은 고통에 얼마만큼 공감하고 책임감을 느끼느냐에 달렸다. 예수님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하지만, 교리와 이념 속에 있는 예수님을 그릴 것이 아니라 오늘날 숨 쉬는 고통 속에서 나도 똑같이 아픔에 공감하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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