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진 대로 과학은 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엄정한 가치중립의 관점에서 객관성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기본 요건이 된다. 가치중립이란, 연구자의 가치판단 곧 연구자가 옳거나 그르다고 생각하는 것과 관계없이 현상이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연구하는 태도를 뜻한다. 객관성은 자기 주관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가 보더라도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실을 기술하거나 설명한다는 의미다.

1970~1980년대 한국교회가 양적으로 크게 성장한 것을 설명한다고 생각해 보자. 신앙으로 말한다면, 아마도 "하나님의 크신 축복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공감을 구할 수 있을지 몰라도,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설명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사회학의 관점은 당시 한국 사회가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로 급격한 사회변동을 경험하던 상황이라는 점에 주목해 설명을 시도한다. 이런 관점에서 당시에 고향 시골을 떠나 도시에서 타향살이하던 사람들에게 교회가 일종의 대체 가족 또는 대체 공동체를 제공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게 됐다는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

사회학 관점에서 교회와 신앙생활을 바라본다면, 모호한 언설로 표현되던 부분이 더 명확해지고 우리 자신과 교회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우리는 교회에 대해 말할 때 교회는 영적 영역이고 세상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특수한 공간이라고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학 관점에서 보면, 교회 역시 여러 사회단체 중 하나이고 일반 사회단체와 공통적 특성을 지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과학의 방법을 활용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이며 과학의 방법으로 설명할 때, 더 명확해지는 부분이 있으므로 가능한 대로 과학의 방법을 활용해 더 명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또한 어떠한 과학의 방법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며 이 영역은 사회과학이 건드릴 수 없는 신학의 영역이 된다.

사회학은 객관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사회학 관점의 설명에 기대다 보면 하나님의 섭리가 약화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현상을 객관성 있게 설명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약화되거나 신앙이 약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병에 걸렸을 때 기도에만 의지하지 않고 병원에 가거나 약을 먹는다고 해서 신앙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주위를 보면 자기 분야에서 전문가이며 권위자로 인정받는 사람조차도 신앙에 대해서는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그러한 사람이 이른바 '신앙 좋은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물론 신앙은 의심이 아니라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이지만, '덮어놓고' 믿기보다는 이성으로 따지며 '깊이 상고'하는 태도로 신앙생활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결코 신앙에 반하는 것이 아님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사회학이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사회학의 관점을 통해 다른 사람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절대 진리를 믿기 때문에 도덕적 우월감을 갖기 쉬우며 배타성이 강해서, 심지어는 제국주의적 태도를 야기하기도 한다. 그러한 태도는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이며 사회와 소통할 가능성을 없애 버려 교회를 게토(ghetto)화할 위험성이 있다. 그러나 종교의자유가 있고 다원화한 현대사회에서 자신의 종교 신념이 다른 사람의 것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할 객관적 근거는 없다.

우리는 우리의 종교 신념을 일방적으로 주장하거나 강요할 것이 아니라 대화와 토론을 통해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상대방을 존중해야 우리도 존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 신앙이 사회학을 만날 때 우리 신앙은 더 폭넓은 보편성과 합리성을 갖추게 될 것이다.

종교성의 다양한 차원

이러한 사회학 관점에서 종교를 본다면 종교에 대해 더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에게 있는 종교적 성질을 뜻하는 '종교성' 개념은 매우 다양한 차원을 포함하고 있다.

흔히 우리는 현대인보다는 원시인들이 훨씬 더 '종교적'이라고 생각한다. 원시인들이 더 종교적으로 강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TV에서 보이는 원주민들이 이상한 소리를 지르면서 원시적 주술을 하는 모습이 매우 종교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인들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덜 종교적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이라는 말이 그런 것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전 세계 인구 중 85% 이상이 종교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현대사회일수록 덜 종교적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절대다수의 인구가 종교인인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은 어떤 종교성을 추구하는 것일까.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우선 그것이 원시인들의 종교성과는 다를 것이라는 점은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을 기준으로 볼 때는 과연 어떤 사람이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질문을 바꿔서 기독교인에게 적용한다면, 어떤 사람이 독실한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있을까. 교회 예배에 많이 참석하는 사람이 독실한 크리스천일까, 아니면 성경을 많이 읽는 사람? 아니면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 그것도 아니면 헌금을 많이 내는 사람이 독실한 크리스천일까.

답을 구하기 위해 종교성의 여러 차원을 살펴보도록 하자. 종교성을 연구한 사회학자들은 다양한 종교성 차원이 사회계층과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경험 연구를 통해 종교와 사회계층의 관계에 대한 설명을 최초로 제안한 후쿠야마(Fukuyama)는 종교성을 의례(예배 출석, 조직 참여), 인지(교리와 조직에 대한 지식), 교리(전통 교리에 대한 개인적 충성), 헌신(개인 기도, 종교에의 의존성 표현)의 방식으로 구분한다. 앞의 두 가지 종교성은 중산층에게서, 뒤의 두 가지 종교성은 하류층에게서 더 두드러진 현상이라는 점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종교성과 사회계층의 관계에 대한 물음은 누가 더 종교성이 강하냐 하는 것이 아니라 각 계층이 어떤 종교성을 갖느냐 하는 물음이어야 한다. 계층에 따른 종교성은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종류의 문제인 것이다.

이런 연구와 관련해 생각해 볼 때, 한국교회에서는 주로 의례의 차원과 교회에 대한 헌신과 관련한 종교성이 발달돼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한국교회가 가장 애쓰는 것은 사람들을 전도해서 교회 문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고, 그 후에는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며 교회 일에 헌신해 봉사하게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거기에서 교회의 역할이 끝나고 만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주일날 빠짐없이 예배에 참석하고 교회에서 하는 여러 일에 참여해서 열심히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이상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종교성에는 그 이상의 차원이 있다. 단순히 예배 의례에 참여하고 설교 말씀을 잘 이해하는 데서 그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성경과 개신교 전통에 대해 공부하고 사고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를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 준비하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이전의 삶의 방식과 태도를 바꾸고 비기독교인들과는 구별되는 대안적 삶의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 이와 같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주위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드러내 삶을 통해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후의 삶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를 시인하고 영접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생을 통해 끊임없이 수행하고 훈련돼야 한다.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전도 폭발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많은 사람을 교회 안으로 들여오는 데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만, 전도돼 온 사람들을 어떻게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게 할 것인지에 대한 관심과 프로그램은 빈약하다. 교회 교육 프로그램들은 초신자에게 필요한 '구원의 확신' 과정이나 기껏해야 중급 수준의 내용을 쳇바퀴 돌리듯 돌리고 있으며 그나마도 주로 개인 경건 생활이나 교회에서 봉사하는 법을 안내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또한 구원의 확신을 통한 회심은 단순히 감정상의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격적인 변화와 세계관의 변화를 의미한다. 회심은 일차로 한 개인 인성 안에서의 변화를 의미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그의 세계관과 가치관, 삶의 태도에 영향 미쳐 종국에는 사회 변화를 지향하는 데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한 개인이 회심하는 것으로, 자녀 성격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가정교육 방법, 자본 축적과 기업 활동에 기여하는 경제적 행동과 판단,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방법에 변화가 온다면, 이러한 변화는 결국 사회제도나 구조의 변화를 일으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독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일에 매여 교회 밖의 일에는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는 상황이 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 열심인 사람은 사회에 더욱 관심이 없고, 분리주의자나 배타주의자와 같은 태도를 갖게 되고 마는 것이다. 이전에 미국 윌로우크릭교회 빌 하이벨스 목사가 자체적으로 조사 연구한 결과를 바탕으로 "십일조를 하고 전도를 하고 봉사를 하는 영적인 활동과, 하나님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영적 성숙함은 궤를 같이하지 않았다"며 반성한 사실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신앙생활은 교회 안 생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과 직업 활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해야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특히 평신도들은 세상에 대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므로 이들이 우리 사회 각 영역에서 자기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권면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는 구원의 확신을 갖고 그리스도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 나가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가르쳐 줘야 한다.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일상과초월)은 바로 이 점에 천착하고 있다. 이를 통해 사회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 되심이 인정되고 하나님나라가 확장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정재영 /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종교사회학 교수

3월 20일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 인도자 세미나 바로 가기(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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