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년 역사를 가진 우리가 2차 세계대전이 갈라놓은 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이것을 거부하고 남과 북이 하나가 되어 정의와 평화를 위한 국가를 이룩해야 해요. 사랑하는 동포·동지 여러분,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 일이에요. 다시 한 번 손을 잡고 남과 북이 하나가 되어 인류 평화에 공헌하는 나라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주세요. 나는 나이가 많아서 여러분과 같이 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 개인이 아니라 세대를 이어서 뜻을 가진 동지가 일체, 일심이 되어 해야 하는 일입니다."

[뉴스앤조이–박요셉 기자] 고 문동환 목사 생전 모습이 화면에 나오자 객석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문 목사는 고령에도 또렷하고 강한 어조로 자신의 뜻을 전했다. 사람들은 평생 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위해 헌신한 고인을 기억하며, 그의 가르침을 가슴 깊이 새겼다.

문동환 목사 장례 예배가 3월 12일 한신대학교(연규홍 총장) 신학대학원에서 열렸다. 유족들을 포함해 각계각층에서 온 300여 명이 예배당을 가득 채웠다. 이해찬 대표(더불어민주당), 임채정 전 국회의장, 김상근 이사장(KBS), 이홍정 총무(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완상 박사, 이재정 경기도교육감, 박종화 원로목사(경동교회) 등 고인의 제자와 동료들이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문 목사의 유족이 영정 사진을 들고 한신대 신학대학원 채플실로 들어오고 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한완상 박사는 문동환 목사가 진정한 예수의 복음을 실천했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이해찬 대표는 의를 위해 몸을 기꺼이 던졌던 고인의 삶을 되새기겠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이해찬 "문 목사, 고난받는 민초와 함께해
의를 위해 몸 던진 삶, 되새기겠다"
한완상 "민주화 운동을 위해 싸운 신앙인
용서와 화해를 실천한 사도"

장례 예배는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참석자들은 의미 있는 일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핍박과 억압에도 당당하게 맞섰던 고인을 기억하며, 같은 길을 걷겠다고 다짐했다.

이해찬 대표는 조사弔詞에서 "고인은 고난받는 민초들 삶의 현장으로 내려가는 것이 곧 구원이라고 생각하며, 독재와 억압에 시달리는 민중을 외면하지 않았다. 이제 그분의 뜻과 가르침은 남아 있는 자들의 몫이다. 의를 위해 핍박받을 것을 각오하고 몸을 던진 그분의 삶을 깊이 되새기겠다"고 말했다.

한완상 박사는 "역사의 별 하나가 졌다. 한국 역사에서 예수 사랑 실천으로 민주화 운동을 위해 싸워 온 신앙인이자 교육자였던 고인이 우리 곁을 떠났다. (고인은) 칠흑같이 어두웠던 유신 폭압 속에서도 용기 있게 노동자 인권을 위해 헌신해 왔다. 예수의 복음과 하나님나라 운동이 무엇인지 제도 교회가 알려 하지 않을 때, 고인은 교회와 강단뿐 아니라 열악한 노동 현장에서 진정한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실천했다"고 말했다.

문 목사 제자였던 김성재 교수(한신대 석좌)는 "고인은 '생애 놀라운 변화'를 깨닫게 하는 교육자이자 민중과 떠돌이들의 목사였다. 민중신학과 민중 교육의 선구자이자 민주화와 평화통일 운동의 거목이었다. 또한, 아픔과 고난의 한반도 100년의 역사를 사랑으로 껴안고 용서와 화해의 역사를 실천한 사도"라고 회상했다.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김충섭 총회장은 "고인께서는 제자들에게 평소 복음을 갖고 진지하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왔다. 그분은 북간도 명동촌에서부터 유신 시대와 민주 항쟁, 세월호 참사까지 오늘날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갈릴리 예수의 삶을 살았던 분이다. 그분이 뿌린 복음의 씨가 우리 교단과 한국교회에 아름답게 피울 것을 소망한다"고 말했다.

김충섭 총회장은 고인이 뿌린 복음의 씨가 한국교회에 좋은 결실을 맺을 것이라고 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한신대 신학대학원 채플실 한쪽 벽에는 헌화대가 마련됐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유족들이 헌화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문 목사의 제자, 동료 등 300여 명은 고인의 뜻과 가르침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교리 위주 교육 벗어나
삶을 통한 성경 학습 도입
유신 정권서 해직과 투옥
노년에 '이민자 신학', '떠돌이 신학' 연구

문동환 목사는 1921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문재린 목사와 김신묵 여사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형은 평생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에 함께했던 늦봄 문익환 목사(1918~1994)다. 문동환 목사는 명동촌에서 저항 시인 윤동주의 외숙부 김약연 목사 영향을 받고 자라며, 일찍부터 목회에 뜻을 품었다.

문 목사는 1947년 조선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하트포드신학대학원에서 수학했다. 1961년에는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 신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같은 해 12월 문혜림 여사와 결혼했다.

문 목사는 '나와 세계'라는 과목을 가르치며, 신학생들에게 내면의 자아를 성찰하게 하고 새로운 눈으로 하나님과 세상을 바라볼 것을 주문했다. 학생들은 문 목사를 통해 하나님과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됐다며, 고인을 '생애 놀라운 변화의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동시에 고인은 성경과 교리 중심의 전통적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나,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성경을 학습하는 새로운 방식의 기독교 교육을 도입했다. 기장 총회는 1969년 문 목사의 교육 방식을 '교회 교육 지침서'로 채택했다. 문 목사는 기장 총회의 기본 정책인 '사회 선언 지침', '신앙고백', '선교 정책' 등을 작성할 때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고인은 설교와 교육에 그치지 않고 몸소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1972년 자신의 집을 개방해, 제자들과 함께 '새벽의집'이라는 이름으로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다. 공동체 구성원이 모든 소유를 공유하며 가사 노동을 함께했다. 이를 보고 유신 정권은 공산 집단이라고 오해하기도 했다. 새벽의집은 문 목사가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미국에 망명하면서 문을 닫고 말았다.

문 목사는 유신 정권과 싸우다 여러 차례 고초를 당했다. 1974년 현장 중심의 새로운 신학 교육 모델을 연구하기 위해 한국신학대학 선교신학대학원을 개설해 원장으로 재직했지만, 이듬해 대학원이 폐쇄되고 문 목사는 해직됐다. 1976년에는 '3·1 민주 구국 선언문' 사건으로 투옥돼 2년 가까이 복역했다. 석방된 이후에도 민중운동에 관심을 갖고 동일방직·YH 노조 투쟁을 지원하다 다시 투옥됐다.

현실 정치에도 참여했다. 고인은 1986년 김대중 전 대통령 권유를 받아, 민주화 운동을 했던 재야인사들과 함께 평화민주당 창당에 합류했다. 평화민주통일연구회 이사장과 평화민주당 수석부총재를 역임했고,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고인은 1991년 이후 미국에서 노년을 보내며 성서 연구에 주력했다. 그는 민중의 눈과 역사로 성서를 이해하려 했다. 미국에서 저임금노동자로 살아가는 이주 노동자의 참담한 삶을 목격하며, 미국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민중신학을 심화·발전한 '이민자 신학', '떠돌이 신학' 연구에 매진했다.

고인은 2019년 3월 9일 밤 10시 9분 98세 일기로 별세했다. 장지는 '민주 열사의 안식처'로 불리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이다. 이곳에는 전태일 열사를 포함해 박종철·장준하·함석헌·안병무·노회찬 등이 있고, 고인의 형 문익환 목사도 이곳에 묻혔다.

일반 교인들도 문 목사를 기리기 위해 장례 예배에 참석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한신대 교직원들이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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