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카시즘의 '근본주의적 변형'

한국교회 강단에서, 때아닌 네오마르크스주의 논쟁이 뜨겁다. 이 논쟁이 교회의 공적 책임 차원에서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철학적 주제에 대해 목회자들이 관심을 보인 결과라면 기뻐하고 환영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우려는 이 논쟁이 단순히 철학적 논쟁이 아닌 매카시즘(McCarthyism)의 '근본주의적 변형'이라는 문제의식에서 발생한다.

현재 한국교회 강단에서 설파되는 네오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은 특정한 패턴이 있다. 예를 들어, "네오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교묘한 변형으로 하나님을 배제하는 사상이다", "이들은 인권·환경·성평등 등을 강조하지만 사실 사회를 무너뜨리고 교회를 파괴하려 한다", "네오마르크스주의의 가장 강력한 도구가 바로 동성애 운동이고 그 집합체가 현 정권이기에 교회는 이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 등이다.

목회자가 개인의 신앙적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과 신학자가 자신의 신학적 체계 내에서 비판하는 것은 토론과 반론의 열린 공론장公論場을 지향하는 현대사회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이 네오마르크스주의 논쟁처럼 신학 분야나 종교적 영역을 넘어 나아갈 경우, 그 분야나 영역에 전문 지식이 없는 이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비판을 가할 때는 더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신학 교육을 받지 않은 철학자들이 한국교회 문제에 '포괄적인 신학적' 비판을 가한다면 많은 목회자와 신학자가 그 비판의 비전문성을 지적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강단에서 설파되는 네오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은 다양한 사상가들의 유사한 경향성에 대한 포괄적 개념인 네오마르크스주의를 하나의 단일한 사상인 것처럼 보는 잘못된 이해와 그 다양성과 경향성에 대한 개괄적 지식이 결여된 상태에서 진행되고 있다. 얇은 인문학 지식을 가진 신학자, 법학자 내지 과학자인 그리스도인들이 진행하는 네오마르크스주의 비판은 너무나 가볍고 경솔하기만 하다.

1875년의 칼 마르크스. 네오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 사상의 실천적 타당성에 대한 논쟁에서 시작됐다.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칼 마르크스로부터
칼 마르크스를 넘어

네오마르크스주의는 포괄적 개념인 만큼 이를 한두 마디로 정의할 때 자칫 개념 왜곡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럼에도 우선 몇 가지 경향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먼저 네오마르크스주의가 1917년 10월 구러시아에서 일어난 볼셰비키 혁명에 자극받은 유럽 지식인들에 의해 1918년부터 시작된 마르크스 사상의 실천적 타당성에 대한 논쟁을 통해 시작됐다는 점이다.

특히 1920년대에 독일의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 1885~1977), 헝가리의 루카치 죄르지(Lukács György, 1885~1971)와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 등이 초기 담론을 주도했다. 블로흐의 1918년 <유토피아 정신에 관하여 Vom Geist der Utopie>와 루카치의 1923년 <역사와 계급의식 Geschichte und Klassenbewußtsein>은 이 시기 대표 저작이다. 특히 루카치의 책은 마르크스의 후기 저술에서 '소외'(Entfremdung) 개념을 발굴해 계급투쟁 중심의 혁명성에만 매몰돼 있던 마르크스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공했다.

1923년 창립된 프랑크푸르트의 '사회연구소'(Institut für Sozialforschung)는 1931년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 1895~1973)가 소장으로 취임하면서 그의 공동 연구자로서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 1898~1979)와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 그리고 테오도르 W.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1903~1969)를 받아들였다. 이후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인간을 예속하는 환경으로부터의 해방을 지향하는 이론, 즉 '비판 이론'(Kritische Theorie)을 치밀하게 완성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특히 '68혁명'과 함께 프랑크푸르트학파(Die Frankfurter Schule)의 비판 이론이 크게 주목을 받으며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 사조로 자리를 잡았다.

루카치를 향해 "객관적 관념론자로서의 수정주의자"라고 낙인을 찍은 레닌의 비판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네오마르크스주의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가 자본주의적 모순의 극복이라는 본래의 지향보다는 계급투쟁에 기반한 혁명성만을 강조해 동구권의 전체주의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로 전략한 것에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그러므로 네오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주의뿐 아니라 후속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 과정을 통해 전체주의와 비인간화 문제뿐 아니라 후기 자본주의사회의 인간 소외와 극단적 개인화 문제 등을 극복하려는 경향성을 보인다.

이처럼 네오마르크스주의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가 집중했던 체제 비판을 넘어 그 체제 때문에 억압받는 인간의 문제에 집중했으며, 마르크스의 사상이 자본주의사회 하부구조인 경제 영역에만 지나치게 함몰돼 있다는 점에 주목해 상부구조인 정치, 문화 이론을 새롭게 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람시의 정치적 강제와 지적·도덕적 동의의 결합을 통한 새로운 지배 질서로서 '문화적 헤게모니'(Egemonia culturale) 개념은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오늘날 네오마르크스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네오마르크스주의(Neomarxismus)를 비롯한 다양한 사상가들의 담론에서 나타나는 경향성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개념적 포괄성 때문에 네오마르크스주의를 하나의 단일한 철학 사조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물론 안드레아스 폰 바이스(Andreas von Weiss, 1910~1994)와 같이 사상사思想史적 측면에서 네오마르크스주의는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와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로부터 출발한 철학 체계와 관련한 사상의 전통들을 아우르는 '후속 마르크스주의'(Nachfolgemarxismus) 중 가장 포괄적인 한 부류이다. 하지만 네오마르크스주의로 분류되는 많은 사상가는 마르크스주의뿐 아니라 후속 마르크스주의에도 강력한 비판을 가했고, 각 사상가들 간 차이점과 다양성은 단순히 네오마르크스주의를 하나의 단일한 사상 체계로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크다.

비판 이론의 경우, 후기 자본주의 체제뿐 아니라 전체주의 이념으로 전락한 구소비에트 체제의 교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Dogmatischer Marxismus)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지만, 제1세대 비판이론가들인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이성의 도구화'(Instrumentalisierung der Vernunft)에 대한 비판에 집중했다면, 제2세대 비판 이론가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1929~)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의사소통적 이성'(Kommunikative Vernunft)을 구성하려고 노력했다. 흔히 제3세대 비판 이론가로 평가받는 악셀 호네트(Axel Honnet, 1949~)는 의사소통의 전제 조건으로서 '인정'(Anerkennung) 문제에 더 집중하고 있다. 더구나 문학비평가이자 철학자인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비판 이론가들과 깊은 사상적 접촉을 했지만 그의 사상을 비판 이론으로 규정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루카치와 같이 시대에 따라 그 사상이 변화하기도 했다. 루카치는 히틀러의 등장과 함께 1933년 베를린에서 모스크바로 이주하는데, 1934년 <유물론의 의미 Die Bedeutung des Materialismus>를 통해 1923년 <역사와 계급의식>의 생각을 철회했다가 전후 1955년 베를린에서 <이성의 파괴 Zerstörung der Vernunft>를 통해 1932년 이후의 자기 입장에 대해 스스로 비판을 가했다. 때로는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와 루카치처럼 견해의 차이로 갈등하기도 했다. 1955년 메를로-퐁티가 <변증법의 모험 Les aventures de la dialettique>을 통해 <역사와 계급의식>에 대한 해석을 시도했을 때, 루카치는 메를로-퐁티의 해석에 대해 항의했다. 때로는 각 나라의 정치적 상황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1940년 레프 트로츠키(Лев Тро́цкий, 1879~1940)가 스탈린의 사주로 멕시코에서 살해됐을 때, 트로츠키의 반스탈린주의적 특성으로 당시 구소비에트 체제와 냉전 관계에 있었던 미국의 사회 비판적 지식인들은 트로츠키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때로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이해하는 방식에 분명한 차이를 보이기도 했다. 1954년 전 3권으로 간행된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 Das Prinzip Hoffnung>는 마르크스주의적 비판과 메시아적 희망을 접목했다. 하지만 1965년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8~1990)의 <마르크스를 위하여 Pour Marx>는 역사 주체로서의 인간을 강조한 그람시, 루카치 등 인간주의적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면서 과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다양성 때문에 네오마르크스주의는 하나의 단일한 사상 체계라기보다는 '마르크스로부터 출발하지만 마르크스를 넘어서기 위한' 다양한 철학적 시도들을 포괄적으로 아우르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무례한 그리스도인의 무리한 비판

오늘날 한국교회 내 네오마르크스주의를 향한 비판은 다양성을 가진 철학적 사조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도 없는 상태에서 진행되고 있다. 무분별한 네오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 이면에는 사실 자본주의는 기독교적이라는 이데올로기(Ideologie)가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이는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Protestantische Ethik und Kapitalistischer Geist>에 대한 오독에 기인한다.

베버의 글은 합리성을 기반으로 한 근대 자본주의의 기원을 금욕적 노동관을 가졌던 청교도 정신에서 찾고 있다. 하지만 그 글의 마지막 부분은 근대 자본주의가 더 이상 청교도 정신과 관계없이 자신만의 체계를 통해 돌아가고 있음을 지적한다. 도대체 모든 가치를 자본으로 전환하는 현실 자본주의의 어떤 측면이 하나님의 뜻과 인간성을 존중했던 예수의 가치와 동일하단 말인가. 설사 베버의 주장대로 그 출발점이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했다고 해서 그 결과도 역시 기독교적이라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그렇다면 현실 세계 속에서 기독교 이단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 이단異端은 결국 그 끝이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네오마르크스주의가 한국교회와 한국 사회의 성 윤리를 약화한다는 주장도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독일이나 프랑스와 같은 서유럽의 경우, 68혁명 이후 성 윤리 변화는 많은 부분 네오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한국의 보수 기독교가 신봉하는 미국 사회에서 '성 해방'(sexual revolution)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1960년대는 베트남전쟁으로 미국 정부가 시민들 신뢰를 상실하고 본격적으로 탈근대(post-modern) 담론이 등장하던 때였다.

이 시기 '히피'(Hippie 또는 Hippy)로 상징되는 탈근대적 문화 운동은 미국의 전통적인 성 윤리가 약화하는 데 더 큰 영향을 미쳤다. 물론 히피는 '좌파 운동'이나 '미국 시민권 운동'과 더불어 1960년대 미국의 대표적 반문화 운동이지만 네오마르크스주의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더구나 사회학적 분석에 따르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성 윤리 변화는 후기 자본주의사회에 의해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는 성 상품화에 더 큰 영향을 받고 있다.

현재 한국교회 강단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네오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에는 이러한 다층적인 철학적·사회학적 분석들이 결여돼 있다. 사상사를 잘 살펴보면, 신학적 체계에서 출발해 사회적 혹은 정치적 체계로 전환됐다고 할지라도, 종교적 색채가 사라지고 독자적 구조와 가치 체계가 형성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히려 칼 슈미트(Carl Schmitt, 1888~1985)의 정치신학(Politische Theologie)처럼 강한 가톨릭적 색채가 오히려 정치학적 인식을 왜곡해 전체주의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특정한 구조와 가치 체계를 '기독교적이냐, 아니냐'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면밀한 분석과 주의가 필요하다. 단순히 교회에 단기적으로 이익이 되느냐를 두고 경솔하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경솔함은 오히려 교회를 이익 단체로 전락하게 할 뿐이다. 그럼에도 한국교회의 많은 목회자와 신학자가 자본주의를 기독교적 - 나아가 개신교적 - 이라는 '믿음'을 가진 채 모든 문제를 네오마르크스주의로 돌리는 현실은 신학 교육에 있어 부족한 인문학적 소양을 보여 주는 것이다.

네오마르크스주의를 향한 경솔한 비판은 목회자의 인문학적 소양 부족을 보여 준다.

"네오마르크스주의만으로 충분한가?"

지금 한국교회 강단에서 던져야 하는 질문은 "기독교가 추구하는 총체적 인간성을 회복하기에 네오마르크스주의만으로 충분한가?"이다. 공적 영역에서 교회의 책임을 고민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오늘날 현대사회가 직면한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영역과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 2장 7절 말씀처럼, 인간을 물질적 요소('흙')와 영적 요소('생기')의 결합으로 이해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구조적 측면에서만 혹은 정신적 측면에서만 접근하는 인간성 회복이 아니라 총체적 인간성 회복을 고민해야 한다.

그 어떤 서구의 철학적(혹은 인문학적) 사조도 총체적 인간성 회복을 위해 필요한 종교적 심성에 대해 그리스도인만큼 고민하지는 않는다.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와 F. D. E. 슐라이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1834) 사이의 이성과 종교적 심성에 대한 사상 차이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신학은 언제나 신앙에 대해 철학이 그어 놓은 한계를 극복해 가며 발전해 왔다.

이러한 측면에서 네오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논쟁은 네오마르크스주의 범주에 속하는 다양한 사상에 대한 세밀하고 면밀한 분석을 통해 사회 체계로서 혹은 가치 체계로서 네오마르크스주의의 장점과 단점, 나아가 신학적(혹은 종교적) 차원에서 극복해야 할 한계를 먼저 분명하게 해야 한다. 만약 한국교회가 네오마르크스주의 비판(혹은 논쟁)을 지금처럼 매카시즘에 의존해 진행된다면 과거 개발독재를 정당하기 위해 민주화 운동을 '빨갱이 운동'으로 낙인찍었던 우를 다시금 반복하게 될 것이다.

박성철 / 총신대 신학과를 졸업했고, 독일 본대학교에서 신학 석사(조직신학)와 철학 박사(종교철학) 학위를 받았다. 하나세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며,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초빙교수, 교회와사회연구소 대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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