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기독교, 불교, 자연과학 세계관의 통합 가능성에 관심을 두고 연구해 온 신학자가 있다. 일본 나고야에 있는 난잔대학교 소속 난잔종교문화연구소 소장 김승철 교수다. <침묵>(홍성사)으로 유명한 소설가 엔도 슈사쿠 전문가로 알려져 있으며, 관련 강의를 위해 수차례 방한했다. 기독교, 불교, 과학에 이어 문학까지 다방면에서 신학적 글쓰기를 실천해 왔다.

김 교수의 이력은 특이하다. 고려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스위스 바젤대학교 신학부에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를 주제로 논문을 써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부산신학교 신학과에서 가르치다가, 2001년 일본으로 건너가 긴조가쿠인대학교 교수를 거쳐 2012년부터 난잔대학교 인문학부 교수이자 난잔종교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승철 교수는 <무주와 방랑 – 기독교 신학의 불교적 상상력>·<침묵의 소리>(동연)와 엔도 슈사쿠의 문학 세계를 '아시아적 기독교의 수용'이라는 주제로 조망한 <엔도 슈사쿠, 흔적과 아픔의 문학>(비아토르)을 출간한 바 있다. 2월 15일 서울 필동 카페바인에서 비아토르·포이에마가 주관하는 엔도 슈사쿠 강의 참석차 한국에 온 김 교수를 만났다. 그와 나눈 대화를 두 차례 나눠 게재한다. 기독교가 불교, 자연과학과 교류해야 하는 이유 등을 먼저 다룬다. 후속 기사에서는 엔도 슈사쿠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김승철 교수를 만났다. 기독교와 불교, 자연과학 그리고 엔도 슈사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 기독교 신앙은 어떻게 갖게 됐나. 신대원에 들어가기까지 과정이 궁금하다.

3대째 감리회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엔도 슈사쿠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기 결단과는 관계없이 기독교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1970년대에 한국이 산업화하면서 이공계를 많이 육성했는데, 아마도 그 영향 때문이었는지 고등학교 때 이과를 선택했고 학부는 물리학과로 갔다. 고등학교 2~3학년 때 뉴턴이나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같은 물리학자들의 짤막한 글들을 읽었다. 기술공학보다는 철학적이고 세계관적인 이야기, 물리적 세계상에 관심이 있었다.

물리학을 공부하다가 신대원에 들어간 하나의 특별한 계기가 있다면,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다. 대학교 4학년 때다. '격정의 회오리'라는 표현이 적합한 시대였다. 내가 믿어 왔던 기독교가 혼란스러운 현실과 따로 노는 듯했다.

이런 상황이 닥쳤을 때 기독교를 더 정치적으로 해석해 들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다른 질문이 있었다. 기독교와 한국 현실이 왜 물과 기름처럼 관계없이 따로 있는 듯이 느껴질까, 이 둘 사이에는 어떤 연결점이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변선환 박사가 교수로 있었고, 토착화 신학을 가르치는 감리교신학대학교로 가서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 신대원에서 신학 공부를 해 보니 어땠나.

아주 재밌었다. 교회나 학교에서 전혀 배운 적 없었던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 시기였다. 내 안에 소화가 안 된 채 꼬여 있던 실타래 같은 것이 풀려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신대원 들어가서 처음 읽었던 것이 루돌프 불트만의 책이었다.

자연과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는 성서에 나오는 기적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문제다. 학교에서 물리학을 공부하면서 배운 자연과학의 세계와 성서의 설명이 맞지 않으니까. 자연법칙에 예외가 있다면 자연과학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성서에 나오는 기적 같은 것을 보면서 어떻게 소화해야 할까 나름대로 고민이 있었다. 교회에서는 설명해 주지 않았다. 설명해 주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불트만 책에 비신화화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불트만 글을 읽으면서 (자연과학과 성서가 충돌하는 것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는 느낌을 받았고, 굉장히 기뻤다. 불트만은 이해가 안 되는 것을 억지로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불트만은 '자기 이해'라는 표현을 쓴다. 성서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자기 이해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들었을 때 해방감을 느꼈다.

같은 류 책 중 오래된 것이 존 A. T. 로빈슨의 <신에게 솔직히>(대한기독교서회)다. 로빈슨은 불트만의 비신화화, 본회퍼가 말하는 기독교에 대한 비종교적 해석, 그리고 틸리히의 비문자화를 이야기한다. 그다음에는 윤리에 있어서 조셉 플레처의 타자를 향한 존재로서 신앙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분이 나처럼 고민해 왔구나', '내 고민이 잘못되지 않았구나' 하는 위로를 받았다.

- 신대원 졸업 이후 바젤대학교로 유학을 갔다. '파울 슈츠의 종말론적 신학과 고려 시대 보조국사 지눌의 선불교 사상의 대화'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상당히 특이한 주제다. 이전부터 불교에 관심이 있었나.

대학원 3년째에 들어갔더니, 어느 날 변선환 박사님이 학교로 오라고 하시더라. 추천장을 이미 써서 보냈으니까 (유학을) 준비하라고 하셨다. 부탁드리지도 않았는데 소개로 가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값없는 은총이었다.

당시 바젤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하인리히 오트 교수가 논문 지도교수였고, 프리츠 부리 교수가 부지도교수였다. 프리츠 부리 교수는 변 박사님의 박사 지도교수였다. 이분들이 아시아의 불교, 특히 일본의 불교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아시아 사람이 오면, 아시아와 연결된 주제로 논문을 쓰기 원했다.

대학 4학년, 기독교와 한국의 현실이 왜 따로 노는지 의문을 가졌을 때도 '지평'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기독교를 수용할 때 한국인의 마음에서 작용하고 있을 것이 분명한 지평 말이다. 그게 불교 지평일 수도 있고 유교 지평일 수도 있겠다. 교리학 같은 것을 논하는 것보다 아시아의 바탕에 자리 잡고 있는 불교와 기독교의 관계,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를 다뤄야겠다고 판단했다. 불교적 지평과 기독교가 융합하면서 한국의 기독교가 형성됐다고 보고 연구하게 됐다.

김 교수는 한국의 기독교가 특별히 불교, 자연과학과 대화를 나눠야 한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 불교와의 대화를 통해 형성되는 기독교 신학의 가능성에 관심 있다고 들었다. 어떤 가능성을 발견해 가는 중인가.

오늘날 기독교 신앙이 대화해야 하는 두 파트너가 자연과학과 불교다. 자연과학의 경우, 생물학이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생존 가능성이 컸기에 살아남았다고 보기도 한다. 이것은 기독교의 초월자를 비롯한 주요 주장의 뿌리를 무화하는 주장이다. 불교는 어떤가. 불교는 공을 통한 해탈의 길을 이야기한다. 해탈의 길을 제시한다는 불교라는 종교의 존재는, 기독교의 절대성을 무화한다.

인간의 역사를 보면, 과학의 경우 관찰을 통해 이론이 점점 쌓여 왔다기보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가듯, 어느 시점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을 겪으면서 비약적으로 관점이 바뀌어 왔다. 인식의 좌표가 바뀌는 것이다. 신학도 마찬가지 아닐까.

20세기 초 에른스트 트뢸치가 <기독교의 절대성과 종교사>를 썼다. 종교의 역사라는 눈으로 기독교를 보면, 기독교도 하나의 역사적 현상이고 따라서 기독교의 절대성은 상대화한다고 말한다. 생명이 진화해 온 역사적 과정으로서 자연을 보면, 기독교는 진화 속에서 우연히 발생한 하나의 자연현상에 불과하다. 이런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씨름하는 곳에서 기독교를 새롭게 이해할 가능성이 열리지 않을까.

- 타 종교와의 대화는 한국 개신교가 꺼리는 대목이다. 종교다원주의를 우려하면서 적대적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불교와의 대화 등을 통해 '아시아적 기독교의 형성'을 연구해 온 학자로서 어떻게 보나.

'아시아적 기독교'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시아가 유럽의 역사적 상황과 달리 우선 형식적 면에서 보더라도 다종교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러 종교가 공존하고 있다고 해서 그 종교들이 서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형식적 차원에서 다른 종교와 공존하는 가운데 형성되는 기독교 모습이 뚜렷하게 아시아에 존재한다.

일례로, <침묵의 소리>에 나오는 엔도 슈사쿠 작품 중 '작은 마을에서'를 보면, 기독교 신앙과 일본의 정토진종 불교 이야기가 나온다. 은총에 의한 타력적 구원을 이야기하는 기독교는, 무조건적 수용을 이야기하면서 자비의 부처에게 구원을 받는 것을 강조하는 정토진종과 연결되는 측면이 있다.

종교다원주의를 이야기할 때 넘어야 할 산으로 '배타성'을 이야기한다. 처음부터 아예 반대하는 분도 있지만, 종교다원주의에 접근하는 방법은 많다. 다만 종교다원주의에 긍정적이라도, 어떻게 언어화해서 전달할 것인가는 같이 고민해야 할 문제다. 나 자신도 신학 논문을 쓸 때는 크게 불편하지 않은데, 가끔 교회에서 설교할 때 어떻게 교인에게 전할지 고민이다.

앞서 언급한 루돌프 불트만도 마찬가지였다. 불트만이 비신화화를 이야기했지만 교회에서 설교할 때는 아주 정통적으로 했다. 사람들이 비신화화를 많이 오해한다. 비신화화는 성서 안에 있는 신화적 이야기들을 버리자는 말이 아니다. 해석하자는 이야기다. 종교다원주의를 언급할 때도 언어 선택을 신중히 해야 한다. 그렇지만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찬반과 관계없이 역사 흐름은 종교다원주의적으로 가게 될 것이다.

기독교 신학의 역사를 보면, 크게 세 가지 대화 파트너가 있었다. 처음에는 희랍철학이었다. 기독교가 희랍철학과 만나 교리와 같은 하나의 체계를 만들었다. 그다음에 16~17세기 또 하나의 큰 변혁을 가져다준 것이 자연과학이었다. 계몽주의라든지 합리화 영향으로 기독교가 많이 바뀌었다. 최근 만난 대화 파트너는 종교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를 의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갈등도 있지만, 또 서로 사귀어야 어떻게든 결과가 나올 것이다. 시간이 필요하다고 본다.

- 생물학·유전공학과 신학을 다루는 책 <DNA에서 만나는 신과 인간>(동연)도 냈다. 자연과학과 신학의 만남도 연구하는 입장에서, 한국의 창조론과 진화론 논쟁을 어떻게 보나.

창조론과 진화론, 기독교와 자연과학의 대립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흥미로운 사실은, 알프레드 화이트헤드가 <과학과 근대 세계>(서광사)에서 말하듯이, 기독교 신앙은 서구에서 자연과학이 발생하는 근거가 됐다. 자연과학은 사물의 진행, 움직임이 합리적이라는 신념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 신념의 배경에는 인격적 신에 의해 사물이 합리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기독교의 창조 신앙이 자리하고 있다.

다시 화이트헤드 말을 빌리면, 희랍의 비극이 가르쳐 주듯 변경 불가능하고 누구에게나 무차별적으로 동일하게 작용하는 운명에 대한 자각도 자연과학의 발생에 영향을 끼쳤다. 그는 "고대 희랍의 운명 관념이 근대 자연과학이 말하는 자연법칙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보면, 인격적 신을 믿는 기독교와 무차별 자연법칙으로서 진화론은 사실 일란성쌍둥이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과학과 기독교 신앙이 갈등을 빚는다는 사실은, 기독교 신앙 측면에서 본다면 자연과학을 탄생시킨 기독교가 자신에게서 태어난 자연과학에 의해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격적 존재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명체의 끊임없는 변화를 말하는 진화론은 하나님의 인격성이라는 개념이 인간의 자기중심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것(나만을, 나의 집단만을, 인간만을 사랑하는 하나님 개념)을 막아 준다.

또 진화론은 인간과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흐름 속에 연결돼 있다고 말한다. 인간이라는 종과 다른 생명체 사이에 절대적 불연속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연구자는 인간과 다른 생명체가 '유전정보의 흐름'에서 연결돼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 기독교가 더 새롭게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기독교 역사를 보면 패러다임이 계속 바뀌어 왔다. 두려움이 있더라도 자연과학을 받아들이는 게 약이 된다고 본다.

학부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김 교수는 자연과학에도 관심을 기울여 왔다. 기독교와 자연과학을 교차하는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 단행본으로 <DNA에서 만나는 신과 인간>(동연)이 있다.

나는 한국에서 복제 양 돌리를 다루는 신학 서적을 냈고, 일본에 가서는 이를 다른 버전으로 썼다. <神と遺伝子(신과 유전자)>라는 책이었다. 기독교 신학이 인간 복제(human cloning)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다뤘다. 복제 문제는 리트머스시험지가 아닐까 한다. 이것을 신학자 머릿속에 집어넣어서 입장에 따라 어떻게 색깔이 변하는지를 보면, 이 사람 신학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듯하다.

나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봤다.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 행세(Playing God)를 하면 안 된다고 하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신앙의 관점이다. 또 하나는 이 맞은편 극단에 있다. 하나님이 세속화한 이 세계에서 인간더러 하나님 역할을 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황 윤리>(종로서적)를 쓴 조셉 플레처 같은 입장이다.

세 번째는 중간쯤에 있는 종말론적 입장이다. 복제 문제를 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상황을 조금 지켜보자는 말이다. 아직까지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종말이 돼 봐야 안다. 그때까지 복제도 인간의 본질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긍정적 시각으로 지켜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입장이다.

- 그동안 기독교, 불교, 자연과학이라는 세 분야를 교차하면서 글을 써 왔다. 세 분야를 따로 놓고 보면 이질적이다. 통합 가능성을 어디서 발견할 수 있을까.

기독교, 불교, 자연과학을 한 점으로 모이게 하는 것이 각자에게 있는 신앙이다. 우리는 모두 과학의 세례를 받은 시대를 살고 있다. 전기가 나가면 스위치를 찾아보고, 퓨즈 박스를 열어 보고, 그렇게 해도 해결하지 못하면 전기회사에 전화하지 않나. 전기가 나갔다고 기도하는 사람은 없다. 이미 자연과학의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의식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다른 종교들과 같이 살고 있다. 기독교인이 이때까지 기독교 신앙에 익숙한 용어를 써 왔기 때문에 자연과학과 타 종교에 거리감을 느끼는 것 같지만, 이미 우리 마음속 신앙은 어떤 형태로든 이를 다 섭취해서 통합하고 있다고 본다.

사람에 따라서는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일본 사람은 일본어가 제일 편하고 미국 사람은 영어가 제일 편하듯이. 그러나 깊이 들어가 보면 그 세계가 어떤 식으로든 통합돼 있다. 물론 완성된 형태라기보다는 평생 고민하는 과정을 거칠 것이다. 조각가가 대리석을 조금씩 깎아 나가는 것처럼.

니시타니 케이지는 <종교란 무엇인가>에서, 과학과 종교의 만남을 다루며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을 인용했다. 하나님께서 의로운 자에게나 불의한 자에게나, 선한 자에게나 악한 자에게나 다 비와 해를 내려 주시지 않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니시타니 케이지 말에 따르면, 의로운 자나 불의한 자나 똑같이 비를 내리고 해를 비추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이다. 이를 자연과학적으로도 볼 수 있고 종교적으로도 볼 수 있다. 자연과학적으로 비가 내리면 그 사람이 윤리적이든 아니든 다 젖는다. 이것이 객관적 자연과학의 세계다. 의로운 자나 불의한 자나 똑같이 하나님 사랑을 받는다고 인식하는 건 종교의 세계다. 이 두 가지 인식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일 것이다. 세계가 하나이고 하나님이 한 분이듯이.

비유하자면, 뫼비우스의 띠다. 띠 안쪽으로 들어가서 보니까 어느 순간 밖으로 나온다. 이미 연결돼 있다. 우리 신앙 현실이 그렇다는 말이다.

- 그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엔도 슈사쿠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기독교 신앙은) '다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을 보려는 노력'이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창구는 다른 대상, 타자를 제외하고는 없지 않을까. 타자에게서 하나님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신앙이다. 이는 어려운 일이다. 미운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어떻게 간단히 말할 수 있겠나. 그러니까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이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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