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9세기 흑인 노예제도 이야기, 20세기 흑인 분리와 차별 이야기는 300년간 이어진 영국령 아메리카 식민지와 독립 공화국을 아우르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영역이다. 오늘날 미국인 대부분은 피부색과 인종, 민족 여부를 불문하고, 이 역사를 자신들의 찬란한 과거에 오점을 남긴 암울한 흑역사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현대 미국이 유색인, 특히 흑인을, '법적으로나, 또는 공식적으로나마' 백인과 동등한 사람으로 대하고, 인간이자 국민으로서의 이들의 평등한 권리를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오늘날까지 채 60년도 지나지 않은 가까운 과거, 즉 1950년대 이래로 진행된 대규모 흑인 민권운동(Civil Rights Movement)을 통해 당대 여러 사회혁명과 더불어, 흑인, 특히 미국 남부 흑인이 전국의 백인 및 북부 흑인과 더불어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을 획득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미국 흑인들은 다양한 형태의 저항을 통해 자신들의 권리를 찾으려 했다. 노예제가 존속된 당시에는 노예 반란도 있었고, 남북전쟁 이후에 독립된 흑인만의 교회를 개척해 자율 공동체를 만든 것도 저항의 한 양상이었으며, 도시로 이주한 흑인들이 음악 등 다양하고 독특한 예술 장르를 발전시킨 것도 문화적 저항운동이라 불릴 만했다. 학교를 통한 교육과 의식 및 생활 계몽운동도 강력했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움직임이 1960년대에 하나의 강력한 대규모 비폭력 대중 시위운동으로 수렴되는데, 이 운동 중심에 서서 흑인과 백인 지지자들, 타국의 인권 운동가와 뜻있는 기관들을 모은 인물이자, 정치사와 문화사, 종교사를 통틀어 20세기 '사람들'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콘 중 하나가 된 인물이 바로 마틴 루터 킹 목사였다. 그가 흑인 민권운동 전체 지도자이자 대표로 서게 된 배경에는 그가 가진 목회자 및 지식인, 학자, 연설가로서의 재능 및 역할이 있었다. 그의 고향, 그의 가정, 그의 학업, 그의 경험, 그의 교회 또한 그를 형성한 재료였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in Luther King, Jr, 1929~1968)는 39세라는 짧은 생애를 살다가 결국은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39년이라는 짧은 생애 안에 극히 다양한 요소가 워낙 압축적으로 담겼기에, 그의 삶은 지극히 다채로우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본 글에서는 루터 킹의 생애를 그의 삶을 형성한 배경이자 내용인 다음 네 가지 키워드에 담아내고자 한다. △미국 남부 △기독교 △비폭력 저항 △순교. 물론, 개별적인 이 네 키워드를 관통하며 하나로 엮어 주는 핵심 키워드가 따로 있다. 바로 '흑인'으로서의 경험이다.

마틴 루터 킹.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1. 미국 남부1)

오늘날의 미국과 캐나다에 해당하는 영국령 북미 식민지에 아프리카 흑인이 도착한 첫해는 1619년이었다. 아직 청교도가 북부 뉴잉글랜드의 플리머스와 보스턴에 정착하기 이전인 이 시기에, 첫 영국령 아메리카 식민지 버지니아에 흑인이 '약정 고용 노동자'로 유입되었다. 당시 중남미 아메리카의 스페인 및 포르투갈 식민지에서 광범위하게 이뤄지던 흑인 노예제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업은 유사한 환경조건을 갖춘 북아메리카 지역에서도 곧 정착되었다. 이로써 오늘날 미국 중에서도, 특히 남부 지역에서 처음에는 피고용 노동자였던 흑인이 이후 노예로 신분이 바뀌면서, 서아프리카에서 흑인을 데려다 노예로 활용하는 생활 방식이 미국에 빠르게 정착되었다.

그러나 17세기 당시에는 노예제도나 노예 소유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한 사례가 백인 세계 전역에서 거의 없었다. 단지, 노예를 소유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흑인이 소위 '문명 세계'의 백인이나 동양인과 같은 수준의 인간이냐 하는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한 이들도 거의 없었다. 미국에서는 거의 유일한 예외가 보스턴의 청교도 지도자 코튼 매더(Cotton Mather, 1663~1728)였다. 그는 1706년에 흑인의 인간성을 열렬히 변호했으나, 그마저도 노예제도 자체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당대 백인 사회에서 노예제의 반기독교성과 비인간성을 지적한 거의 유일한 집단은 메노나이트나 퀘이커 같은 재세례파 계열의 공동체였던 것 같다. 이들은 산상수훈의 황금률, 즉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을 근거로 흑인 노예 편에 섰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데다, 사회적으로도 고립주의의 길을 걸은 이들의 목소리는 당대에 거의 영향력이 없었다.

미국독립혁명(1775~1783) 전후에 노예제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아도, 흑인 노예를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던 선교사나 목회자들은 적지 않았다. 그러나 노예를 소유한 노예주 중에는 노예에게, 스스로든 외부 전도자를 통해서든, 복음을 전하기를 거부한 이들이 많았다. 크게 세 부류였다. 하나는 극단적인 극소수 백인 우월주의자로, 이들은 흑인이 백인과 같은 영혼을 지닌 인간이 아니므로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다고 믿었다. 이보다 좀 더 많은 숫자로, 흑인과 백인이 같은 인간일지라도, 백인에 비해 지성이나 인격성이 부족하므로 복음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고 믿은 노예주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흑인이 집단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수용할 경우, 특히 이들 중 일부가 글을 읽을 줄 알아서 스스로 성경을 읽고 내부적으로 이를 공유할 수 있으므로, 일종의 '의식화' 작업이 일어나 흑백 평등과 노예해방을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이들이 있었다.

냇 터너(Nathaniel 'Nat' Turner, 1800~1831)의 반란이 바로 농장주들이 우려한 그 실례였다. 어릴 때부터 읽고 쓰기를 깨친 노예였던 터너는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으며 개종하여 기독교인이 되었다. 농장주의 허락하에 동료 노예들에게 주일과 여러 행사에서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가 되어, 동료 흑인들에게는 '예언자'로 불렸다. 그러나 "주인에게 순복하라"는 메시지를 주로 전하여 고분고분한 노예가 되기를 원했던 노예주들 바람과는 달리, 그는 신구약 성경에서 속박과 압제에서 해방된 유대인과 기독교인에 대한 메시지를 더 많이 발견했다. 더구나 환상을 자주 보았기에, 결국 자신에게 임한 묵시를 압제받는 자기 민족의 해방을 명령하는 계시로 해석했다. 터너의 주도로 반란이 일어나, 결국 적어도 50명의 백인이 죽고, 터너를 비롯한 200명이 넘는 흑인이 백인 민병대에 복수당해 죽는 결과를 낳았다. 이 사건 이후 예배를 포함해서, 노예들이 노동 이외에 집단으로 모여 있는 행위는 대개 백인들의 지독한 의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냇 터너의 생애와 그가 주도한 반란을 주제로 만든 영화가 최근에 제작되었다. 'The birth of a nation'이라는 제목인데, 역사가나 영화 평론가들로부터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신생국 미국 전역에 자극을 준 2차 대각성(1790년대~1840년대)은 백인뿐만 아니라 북부의 자유 흑인과 남부의 노예 흑인 모두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흑인 중에도 기독교인이 많이 생겼다. 특히 흑인의 신앙 정서 및 사회 문화적 배경에 더 잘 들어맞는 대중적인 침례교와 감리교에 흑인 신자 절대다수가 입교했다. 북부에서는 1785년에 뉴잉글랜드 회중교회의 레뮤얼 헤인즈가 첫 흑인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1816년에는 첫 흑인 교단인 아프리카감리교회(AMEC)가 필라델피아에서 리처드 앨런을 초대 감독으로 임명하며 창설되었다. 이로써 흑인 교회의 독립이 시작되어, 북부에는 1845년 당시 5개 이상 흑인 교단이 존재했다. 이들은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 아이티 등 해외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국내에서는 금주 및 절제 운동에도 참여했다.

2차 대각성이 진행되던 와중에 19세기가 되면 북부에서는 대각성의 여파로 노예제 폐지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부흥사 찰스 피니(Charles Grandison Finney, 1792~1875), 노예제 폐지 활동가 시어도어 드와이트 웰드(Theodore Dwight Weld, 1803~1895)와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William Lloyd Garrison, 1805~1879), 장로교 신학파 소속 신학교로 부흥 운동과 노예제 폐지 운동의 중심부에서 활약한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의 레인신학교(Lane Theological Seminary), 미국 최초로 남녀공학 및 인종 공학을 실시한 오벌린칼리지(Oberlin College), 예일의 신학파 장로교도 라이먼 비처의 딸 해리엇 비처 스토(Harriet Elisabeth Beecher Stowe, 1811~1896)의 소설 <엉클 톰스 캐빈>, 노예해방 운동 정신을 담은 조지 더필드 5세(George Duffield, Jr., the fifth, 1818~1888)의 찬송 '십자가 군병들아' 등이 이 시대 유산이었다. 북부 운동가들은 신생 공화국 미국이 참되고 정의로운 민주주의국가를 완성하는 가장 중요한 길이 노예제 폐지라 주장했다.

남부에서는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미 언급한 대로, 남북전쟁 전에 노예법에 근거해 모든 집회 및 교육 기회를 박탈당했던 흑인 중 극소수가 노예주가 참석하던 교회의 분리된 좌석에서 예배 참석을 허용받거나, 자체 흑인 설교자를 세워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결국은 여러 노예 폭동의 여파로, 독립된 신앙 공동체를 허가받지도, 노예 상태에서의 해방을 얻지도 못했다. 노예제 자체의 부도덕성에 대해서도 초기에는 양심적인 남부 지도자 대부분이 유보적이거나 중도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들이 이 제도를 적극적으로 변호하게 된 계기는 남부 사람들을 악마화한 북부의 가혹한 비난이었다.

이런 논쟁 와중에 남부 기독교인은 노예제를 성경적으로 변호하는 독특한 논리를 만들어 냈다. 첫째, 노예제는 흑인이 안정된 질서 속에서 백인의 기독교 신앙과 개화한 문명을 배우는 특권적 제도다. 둘째, 북부의 노예제 비판은 성경적이거나 건전한 민주주의라기보다는, 반기독교적이고 급진 계몽사상이나 무신론에서 유래한 세속적인 인권 주장이다. 결국 이런 주장들과 더불어, 1844년에서 1861년 사이에 남부 기독교인의 약 90%를 차지한 감리교(1844), 침례교(1845), 장로교(1861)가 각각 북부 교회와 분리되어 남부만의 인종주의적이고 지역주의적인 교단들을 탄생시켰다. 미국 역사가 고언(C. G. Goen)이 쓴 1985년 고전 Broken Churches, Broken Nations: Denominational Schisms and the Coming of the American Civil War (Macon, Georgia: Mercer University Press, 1985)의 제목은 이 점에서 의미심장했다. 미국이 남북으로 분열되어 전쟁을 치른 1861년 이전, 20년 전에 이미 미국 주요 교회는 남북으로 갈라져 있었다. 나라가 교회를 가른 것이 아니라, 교회가 나라를 갈랐다! 기독교 자체가 전쟁 원인은 아니었으나, 갈등과 전쟁의 원인과 현상을 심화하고 유통되는 창구와 네트워크 기능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남북전쟁 이전부터 미국 주요 교회는 이미 남북으로 갈려 있었다.

남북전쟁은 1861년 4월부터 1865년 5월까지 4년간 전개되었다. 남북전쟁은 외적으로는 둘로 분리된 나라가 맞서 싸운 정치적 내전이지만, 내적으로는 종교전쟁의 특징이 다분했다. 양편 다 자신들이 종말론적 성전을 치르고 있다고 믿었고, 상대가 악의 화신이라 확신했다. 북부는 노예해방 전쟁이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남부는 북부의 세속주의를 막는다고 내면화했다. 전쟁 중 전국 규모 부흥회와 금식 대회가 빈번했고, 각 교회 목사, 신학 교수, 군목의 십자군식 설교가 만연했다. 군대(특히 남군) 안에서 신앙 부흥도 빈번히 일어났고, 여성 등 열정적인 신자들은 자원봉사(위생, 간호, 물자 보급, 문서 보급)로 이 전쟁을 복음주의 대의를 실현하는 창구로 삼았다. 대통령 링컨은 이 시기 이후 미국 시민 종교의 신화적 인물로 흔적을 남기는데, 노예제, 남북전쟁에 대한 유명하고도 감동적인 종교적 수사[예컨대, "제 끊임없는 기도와 관심은 (주님이 우리 편이 아니라) 이 나라가 주님 편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를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남북의 지역주의 시민 종교는 지속적으로 존재 의미와 당위를 찾아냈다. 북부 및 재통일된 연방 정부는 사악한 악의 세력을 극적으로 응징한 정의로운 십자군으로 자신을 정의했고, 남부는 패배의 경험을 참된 진리와 바른 대의를 위해 순교한 이들이 통과할 수밖에 없는 불 시험과 피 흘리는 시련의 도가니로 인식했다[Charles Reagan Wilson, Baptized in Blood: The Religion of the Lost Cause, 1865~1920 (Athens, Georgia: University of Georgia Press, 1980)].

미국 남부의 시민 종교는 이렇게 태어나고 자랐다. 북부는 형식적이고 법적으로나마 인종 통합을 이루었다. 그러나 남부는 달랐다. 비록 연방 정부의 법이 전국 흑인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켰지만, 남부는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자유 흑인을 각 주정부의 철저한 인종 분리와 차별법 아래 다시 준노예 상태로 환원했다. 마틴 루터 킹이 태어난 1920년대, 그리고 그가 저항운동에 뛰어든 1950~1960년대까지 남부의 흑인은 철저하게 열등한 인간이자 인종으로서, 제한된 빈민 구역에서 2등 시민이자 하층민으로서 그들만의 격리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야 했다. KKK단 등, 백인 우월주의 기독교를 표방하는 조직들의 집단 린치나 학대, 조롱도 일상이었다. 마틴 루터 킹이 블랙홀처럼 끌려 들어가서 저항하고 개혁하라고 요구받은 현실이 바로 이것이었다.

2. 기독교2)

마틴 루터 킹을 1950~1960년대 민권운동에서 다른 이들과는 구분되는 독특한 지도자로 만든 가장 중요한 유산은 아마도 기독교 신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929년에 미국 남부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태어난 킹의 가문은 독실한 흑인 기독교 명문 가문이었다.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 작은아버지, 형이 모두 흑인 침례교 목회자였던 명망 있는 목회자 가문이었다. 어머니도 목회자의 자녀였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깊은 신앙 전통을 누리며 자랐다. 바로 이런 이유로 그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가정은 부부간의 흔한 다툼도 없이 지극히 평온했고, 흑인이 처한 전반적인 처지에도, 낙관적이고 화목하고 모두 건강했다. 전국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 애틀랜타지부장도 맡고 있던 아버지는 자랑스러운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주 강조했다. 비열하고 이중적인 백인에게 당당하게 맞서라고 가르치며, 스스로도 모범을 보였다. 킹은 이런 부모를 지극히 존경했으며, 이들이 자신이 일평생 따라야 할 삶의 모델이었다고 자주 당당히 고백했다.

킹은 애틀랜타에서 공립 초등학교와 부커워싱턴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부커 워싱턴(Booker T. Washington, 1856~1915)은 남북전쟁 이후 자립이 필요한 흑인을 위해 앨라배마에 터스키기기술학교(Tuskegee Institute)를 설립한 교육자로, 온건한 흑인 지위 향상 운동의 선구적인 인물이었다. 몇 차례 월반으로 다른 학생들보다 훨씬 이른 15살이던 1944년에 킹은 무어하우스칼리지(Moorehouse College)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졸업한 학교로, 1867년에 오거스타학교(Augusta Institute)로 설립되었다가, 1879년에 애틀랜타로 옮겨 이름을 애틀랜타침례신학교(Atlanta Baptist Seminary)로 변경했다. 이 학교가 무어하우스칼리지로 이름을 바꾼 것은 1913년으로, 미국 남부의 대표적인 흑인 대학이자 (오늘날까지도 남성만 입학할 수 있는) 남자 대학 중 하나였다. 이런 식으로 킹은 신앙과 학문 영역에서 가문의 유산에 충실한 진로를 걸었다.

무어하우스에 다니는 동안에도 목회자 가문 유산은 늘 그를 따라다녔다. 가족의 모범을 따라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의사, 법조인의 길을 준비하고 싶었다. 목회자는 차선이었다. 더구나 대학을 다니는 동안 그가 자랐던 흑인 교회의 감정적이고 반지성주의적인 분위기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것이 목회자의 길을 주저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던 것 같다. 그러나 학교에서 배운 성서학 강의와 두 스승(학장 메이즈 박사, 철학/종교학 교수 조지 켈시)을 통해 신앙과 학문의 조화가 가능하다는 점을 깨닫고, 또한 무엇보다 목사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대학 4학년 때 그는 결국 목회자가 되었다.

킹이 정식으로 신학 공부를 시작한 것은 목회자가 되고 난 후였다. 그는 펜실베이니아주 체스터에 소재한 크로저신학교(Crozer Baptist Seminary)에 입학했는데, 북침례교 소속으로 1857년에 설립된 이 학교는 일찌감치 흑백 인종이 함께 공부하는 문을 열었고, 현대신학에도 열려 있는 상당히 진보적인 신학교였다.3) 이 신학교는 두 가지 면에서 킹에게 영향을 준 것 같다. 우선, 차별받는 흑인으로서의 어쩔 수 없는 콤플렉스와 상처를 가졌던 킹은 백인 문화를 수용하고 이들과 경쟁하며 극복하려는 성향을 보였다.

"나는 백인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흑인상이 어떤 것인지 잘 안다. 백인들은 흑인들이 게으르고 허세를 잘 부릴 뿐 아니라 항상 낄낄거리며 웃고 더럽고 추잡하다고 생각한다. 한동안은 나도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상당히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수업 시간에 조금이라도 늦게 되면 안달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안절부절못했다. 밝게 웃는 사람으로 보이기 싫어서 언제나 일부러 차갑고 심각한 표정을 지으려고 애를 썼던 적도 있었다. 나는 옷차림에 지나치게 신경을 썼고 방도 먼지 한 톨 없이 깨끗이 했으며 항상 반짝거리는 구두에 잔주름 하나 없이 다림질된 옷을 입었다."4)

크로저신학교가 킹에게 준 두 번째 영향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학문 유산을 이 학교에서 습득한 것이었다. 그는 입학과 동시에 "사회악을 일소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5)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루소, 홉스, 벤담, 밀, 로크, 마르크스 등의 사회철학 및 윤리학 이론을 섭렵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는 미국 사회복음의 아버지로 불리는 월터 라우션부시였다. 라우션부시의 견해 전부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복음의 사회성과 물질성에 대한 강조는 이후 킹의 이후 사회운동에 기반을 제공했다. 마르크스 저작도 비판적으로 읽었는데,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 방식, 윤리적 상대주의, 정치적 전제주의에 거부감을 느꼈다. 이것이 차후 그의 민권운동이 좌파 운동과는 맥을 달리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킹의 사상 체계를 뒤흔들어 놓은 가장 강렬한 경험은 신학교 강의와 하워드대학 학장 모디카이 존슨 박사 강의를 통해 인도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평화주의를 배운 것이었다. 간디를 통해 킹은 산상수훈에 기록된 예수의 비폭력 저항이라는 메시지가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인종 및 국가 간 관계에서도 실현 가능한 사회적 역량이라고 믿게 되었다. 신학교 마지막 학년에 재학 중일 때에는 라인홀드 니버에도 빠져들었다. 평화주의에 비판적인 현실주의 윤리학자였던 니버를 통해서 그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평화주의의 이상적 신념이 타당하지 않은 정치적, 현실적 상황이 있을 수 있다고도 생각하게 되었다. 종합하자면, 크로저신학교에서 보낸 3년간은 지적 호기심이 왕성했던 킹이 다양한 신학과 사회윤리학을 탐닉하듯 자유롭게 공부하면서, 진로와 세계관을 형성해 나가는 의미 있는 과정이었다.

마틴 루터 킹이 수학했던 크로저신학교 건물.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기독교 신앙과 신학, 역사와 윤리에 대한 학구적 열정이 넘쳤던 킹의 다음 진로는 보스턴대학 기독교사회윤리학 박사과정이었다. 미국 감리교 최초의 신학교이자 진보의 메카 보스턴의 개방성을 대변하는 보스턴대 신학부는 당시 월터 멀더, 에드가 브라이트먼, 해럴드 드 울프 같은 윤리학자들의 활약으로 미국에서 사회정의와 윤리를 가장 많이 강조하고 가르치는 학교로 각광받고 있었다. 원래 킹은 에드가 브라이트먼의 제자로 박사 학위를 연구하기 위해 입학했지만, 과정 중에 브라이트먼이 사망하면서 드 울프가 새 지도교수가 되었다.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은 <폴 틸리히와 헨리 넬슨 위먼의 사상에 나타난 신 개념 비교>로, 종교철학 및 현대신학 분야 논문이었다. 그러나 이 학교, 그리고 이 학교가 위치한 도시가 기독교윤리학과 사회운동의 중심지였던 만큼, 사회윤리의 실천성을 고민한 그에게는 더 없이 적합한 학습 공간이었을 것이다. 1954년에 박사과정을 끝내면서 킹은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피억압 대중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비폭력적인 저항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6) 다만, 이를 사상적으로 내면화하기는 했어도, 당시에는 이 사상을 효과적으로 세력으로 조직화하겠다는 결단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아는 것처럼, 당시의 킹은 몰랐지만, 그가 이 확신을 실험할 수 있는 때와 장소는 이미 그 앞에 임박해 있었다.

3. 비폭력 저항7)

"1955년 12월 1일, 이 자리에 있던 버스 정류장에서, 로자 파크스 여사는 버스에 오르는 백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기를 거부했다. 이로 인해 그녀는 체포되었고,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벌금을 선고받았다. 보이콧은 파크스 여사의 재판날인 12월 5일, 흑인들이 버스에서 받는 불공평한 대우에 대한 항의로서 시작되었다. 버스 승차를 거부하는 그들의 보이콧은 미국 대법원이 1년 후 대중교통에서의 흑백 분리 금지를 명령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보이콧을 이끌었고, 이는 현대 시민운동의 시작이 되었다."8)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1955.12.5.~1956.12.20.)으로 알려져 있는 이 사건이 미국 흑인 민권운동의 시작이었다. 킹은 보스턴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진행 중이던 1954년에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의 덱스터침례교회 담임목사직을 수락했다. 원래 킹은 대도시를 떠나서, 조용하고 한적한 남부 소도시에서 안정적이고 목가적인 목회를 하면서 박사 학위를 완성하기 위해 몽고메리로 갔다. 그러나 논문을 제출하고 박사 학위를 마친 후 채 몇 달이 안 되어, 그의 동네에서 역사적인 버스 보이콧 운동이 일어났다. NAACP 앨라배마지부 간사이기도 했던 로자 파크스가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기를 거부한 일로 체포되었다. 4일 후인 12월 5일에 파크스와 동료 여성운동가들이 보이콧 운동을 시작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지역 목사들과 함께 몽고메리진보협회(MIA)를 조직한 후, 이 협회 회장으로 26세의 젊은 목사 마틴 루터 킹 박사를 선출했다. 짧게 20분 동안 준비해서 행한 이날의 수락 연설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민운동가의 탄생을 알린 역사적 취임 연설이었는데, 여기서 이미 그가 기독교 신앙과 연결된 비폭력 저항 사상을 자기화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오늘 저녁,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폭력은 필요치 않다는 점을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해 본 적도 없습니다. 저는 몽고메리의 구석구석에, 그리고 이 나라의 구석구석에 우리가 기독교도라는 것을 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기독교의 진리를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습니다. 오늘 저녁, 우리 손에 들려 있는 유일한 무기는 바로 저항이라는 무기일 따름입니다. 오직 그것뿐입니다."9)

이 연설은 극적이고 역사적이었다. 그가 첫 연설에서 선언한 흑인 민권운동의 비폭력 정신을 당시 현장에 있던 이들도 충분히 공감할 만큼 설득력 있게 전달했고, 이로써 이 정신이 킹이 암살된 1968년 이후에도 지속된 유산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저항운동을 시작한 인물로 현장에 있던 로자 파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 정신이 예언자적이었다고 고백했다.

"연설을 끝맺으며, 그는 내가 절대 잊지 못한 예언적인 말을 했다. 내게 있어 그 말은 아직까지도 우리의 비폭력 자유 운동의 성격을 정의해 주고 있다. '훗날 역사가 쓰일 때에, 누군가는 말할 것입니다. '곱슬머리와 검은 피부색을 가진 한 종족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도덕적 용기를 갖고서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투쟁했다. 그 투쟁을 통해 그들은 역사와 문명의 혈관에 새로운 의미를 불어넣었다''라고. (중략) 킹 목사의 연설을 듣고 집으로 향하던 때, 나는 우리가 우리의 항거에 분명한 목소리를 부여해 줄 제대로 된 사람을 찾았음을 알았다. 몇 주가 가고 몇 달이 갈수록, 우리가 우리의 모세를 찾았으며, 그가 분명 우리 모두를 위한 자유와 정의가 있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리라는 것이 내게는 더욱 분명해졌다."10)

킹이 사역했던 덱스터침례교회.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비록 시작이지만, 이미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상당히 원숙해 보이는 킹의 이 비폭력 저항 사상의 기원은 정확히 어디일까. 많은 이는 그가 이 사상을 간디에게서 배웠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자서전에 따르면, 킹은 이 사상을 무어하우스칼리지에 15세로 입학한 1944년에 이미 접했다. 간디를 접하기 이전에 그에게 이 생각을 심어 준 인물은 미국 자연주의 철학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1862)였다. 대학에 갓 입학한 후 킹은 소로의 <시민 불복종>을 읽고 너무도 큰 감명을 받은 나머지, 책을 몇 차례나 다시 읽었다. 소로는 멕시코에서 미군이 노예 구역 확장을 위해 전쟁을 하는 데 자신이 낸 세금이 사용된다는 것을 알고 세금 납부를 거부했다. 킹은 적극적으로 선을 따르는 것뿐만 아니라, 소극적으로 악에 협력하지 않는 것도 중요한 저항이라는 사실을 소로를 통해 배웠다고 밝혔다. 그가 관여한 1955년 앨라배마주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 1960년 런치 카운터 연좌 운동, 1961년 조지아주 올버니 평화 시위 등이 바로 소극적이지만 사실은 강력하고 적극적인 악에 대한 저항이라며, 이것이 자신이 소로에게서 배운 바였다는 것이다.11)

신학교 재학 시에 간디에 대한 강연을 통해 배우고, 박사 연구 과정을 거치고, 저항 현장에서 무르익은 이 정신은 간디의 고향 인도를 직접 방문한 경험을 통해 더 구체화한 것 같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에서 승리한 후 몇 친구가 킹에게 인도 방문을 권했다. 마침 1956년에 간디의 후계자 네루 수상이 미국을 방문했는데, 그는 비서를 통해 킹에게 인도를 방문해 달라고 요청했다. 1959년 2월 3일부터 3월 18일까지 한 달 반 정도의 일정으로 방문한 인도는 킹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비폭력 저항운동이야말로 피억압 민중들의 자유를 향한 투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킹의 확신은 더 굳건해졌다. 귀국 후 4일이 지난 22일에 몽고메리에서 전한 설교에서 킹이 간디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 세상은 간디와 같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 세상 사람들은 예수와 같은 사람도 좋아하지 않고 링컨과 같은 사람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인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고 자기 목숨까지 바친 사람, 4억의 인도 국민들을 독립 운동에 나서게 만든 사람을 죽였습니다. (중략)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가슴에 품은 간디는 증오심을 가슴에 품은 사람의 손에 죽고 말았습니다. 역사는 이렇게 비극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역사에는 예수님과 간디 두 분이 모두 금요일에 돌아가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분이 같은 요일에 돌아가신 것도 어떤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중략) 하지만 신의 섭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간디의 가슴에 총알이 박히는 순간 인류의 가슴속에는 간디의 사상이 깊이 박혔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과 마하트마 간디는 분열된 국가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링컨이 저격당한 직후에 옆에 있던 스탠턴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제 링컨은 역사적인 인물로 남게 되었습니다.' 마하트마 간디도 저격당하는 순간, 역사적인 인물이 된 것입니다."12)

4. 순교

킹이 예수 그리스도, 마하트마 간디, 에이브러햄 링컨의 죽음을 두고 했던 말은 의미심장하다. 인류에 대한 사랑을 가슴에 품은 예수, 간디, 링컨은 인류에 대한 증오를 가슴에 품은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그들이 십자가에서 죽는 순간, 또는 총탄이 몸에 박혀 죽음에 이르는 순간에, 인류의 가슴속에는 죽은 이들의 사상이 깊이 박혔다. 이로써 이들은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다. 인류애, 희생의 제사, (링컨의 경우는 다를 수 있지만) 비폭력 저항, 역사적 기억이 만나고 교차되고 상기되는 의미 있는 죽음을 우리는 흔히 '순교殉敎', '순국殉國', '순직殉職', '취의就義', '선종善終' 등으로 지칭한다.

킹의 민권운동은 법적으로 크게 두 가지 성과를 이루어 냈다. 1964년에 민권법(The Civil Rights Act of 1964)이 통과되어 인종, 민족, 출신국, 소수 종교, 성별에 따른 차별이 공식적으로 불법이 되었고, 남부에서 자행되던 인종 분리도 공식 철폐되었다. 1965년 선거권법(Voting Rights Act of 1965)으로 주 및 지방 정부가 선거 자격을 제한하거나 투표에 필요한 요건, 표준, 관행, 또는 절차를 요구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로써 인종이나 피부색 때문에 미국 시민의 투표권을 제한할 수 없게 되었다. 전쟁과 인종차별, 가난이 서로 맞물려 있다고 믿은 킹은 흑인 민권운동과 함께, 백인을 포함한 도시 빈민과 노동자의 연대 투쟁에도 동참했고, 베트남전 반대 운동에도 투신했다. 이를 인정받아 1964년에는 역대 최연소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킹은 몇 차례 수감과 출소를 반복한 후 다시 1962년에 진행된 조지아주 올버니 '자유 승차' 운동(Albany 'Freedom Ride' Movement, 1961.10.~1962.8.)이 마무리되자, 비폭력에 반대하는 흑인들의 무장 소식을 듣고 우려 섞인 전보를 케네디 대통령에게 보냈다. 당시 흑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던 케네디에게도 그는 변함없는 비폭력 소신을 밝혔다.

"테러가 만연하는 지역에서 흑인들이 무장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아무리 잔인한 상대를 만나도 폭력을 쓰지 말라는 당부를 계속할 것입니다. 하지만 연방 정부가 과단성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저의 충고를 귀담아듣지 않을 것입니다. 흑인들이 보복적인 폭력을 사용하기로 마음을 굳히게 되면 남부 전역은 폭동의 어두운 수렁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13)

1964년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없애기 위한 민권법 시행 문서에 서명하는 린든 존슨 대통령.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1966년 백악관에서 대화 중인 린든 존슨 대통령과 마틴 루터 킹.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1968년 4월 4일, 킹은 테네시주 멤피스 소재 로레인호텔에서 제임스 얼 레이(James Earl Ray, 1928~1998)에게 암살당했다. 백인 인종주의자 레이는 킹 살해 후 영국으로 달아났으나, 체포된 후 99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사망했다. 킹의 죽음은 1963년 11월 22일에 암살당한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죽음과 함께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았던 죽음이었다. 킹의 죽음을 재심한 1999년 셀비카운티 순회 법정은 이 죽음을 레이의 인종주의적 단독 범행이 아니라, FBI, CIA, 군 정보국 등 정부 수사 및 비밀 조직과 마피아가 연계하여 일으킨 조직적 살해 음모였다고 평결했다. 진실은 지금도 여전히 뿌연 안개 속에 묻혀 있지만, 1968년 4월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2월에 애틀란타의 애버니저침례교회에서 행한 설교에서, 킹은 죽음을 예견한 듯, 자기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짚는 연설을 했다.

"나는 가끔 모든 인간은 인생의 공통분모인 죽음이 닥쳐올 순간을 늘 의식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생각합니다. 나는 이따금 나의 죽음과 장례식에 대해서 생각하곤 합니다. 나는 죽음을 음울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따금 '내가 진정으로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하고 자문합니다. 오늘 나는 여러분께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그날이 오면, 마틴 루터 킹 2세는 자신의 인생을 남을 돕는 데 바치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날이 오면, 마틴 루터 킹 2세는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날이 오면, 내가 전쟁 문제에 대해서 올바를 태도를 가지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날이 오면, 내가 굶주린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날이 오면, 내가 일생 동안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만나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날이 오면, 내가 인류를 사랑하고 인류를 위해 봉사하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나를 군악대장으로 부르고 싶다면, 정의를 알리는 군악대장, 평화를 알리는 군악대장, 평등을 위한 군악대장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나머지 사소한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중략) 내가 기독교인의 의무를 다 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할 수 있다면, 나의 삶은 헛되지 않은 것이 될 것입니다."14)

킹의 죽음을 순교라 부를 수 있는지 없는지는 '순교'의 신학적, 인류학적, 사회학적, 역사학적 정의와 의미를 탐구하는 학자들의 판단에 달려 있다. 그러나 순교라는 거창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해도, 마틴 루터 킹의 짧은 생애와 죽음은 단지 흑인 기독교인에게만이 아니라, 20세기 기독교 세계 전체에 준 충격과 도전이었다. 킹이 예수 그리스도, 마하트마 간디, 에이브러햄 링컨의 죽음을 두고 했던 말 그대로, 또한 킹 자신의 죽음으로 그의 유산과 정신이 그를 쏜 사람들과 그들의 후손의 심장에 박혔다. 이 죽음으로 그는 인류애, 희생의 제사, 비폭력 저항, 죽음, 역사적 기억을 상기하는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1967년 세인트폴 미네소타대학교에서 베트남전 반대 연설을 하는 마틴 루터 킹.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이미지

킹의 생은 짧았지만 강렬하고 다채로웠다. 예수의 산상수훈, 간디의 무저항주의, 소로의 시민 불복종, 보스턴대학 인격주의 학파의 철학적 이상주의, 미국식 자유민주주의가 융합되어 형성된 그의 비폭력 저항운동을 지지하는 이들이 아주 많았다. 그러나 그를 반대하는 이들도 많았다. 흑인을 여전히 열등하게 취급하는 남부의 백인 우월주의자들, 민권운동으로 사회를 어지럽힌다는 북부 백인 기독교인들, 비폭력 시위로는 실제 필요한 결과를 얻어 내지 못한다고 느낀 과격한 흑인 운동가들, 흑인 인권 운동을 반전운동으로 확장해 국가를 배반한다고 비난한 이들, 민권 및 노동운동의 기반이 모조리 좌파 공산주의 사상에 기초했다고 정죄한 보수 기독교인들. 그러나 "산 정상에 오른" 20세기 모세에게는 이것들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글쎄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저도 지금은 알지 못합니다. 우리 앞에는 다소 힘겨운 날들이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산 정상에 올라갔다 왔으니까요. 저는 개의치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도 오래 살고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는 그것에 대해 염려하지 않습니다. 저는 다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을 뿐입니다. 그분께서는 저에게 산 정상에 오르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변을 둘러본 저는 약속의 땅을 보았습니다. 아마 여러분과 함께 그곳에 가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이 오늘 밤, 우리가 한 국민으로서는 그 약속의 땅에 이르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저는 오늘 밤 너무도 행복합니다. 그 어떤 두려움도 제게는 없습니다. 저는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제 눈은 이미 주님께서 오시는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15)

1) '미국 남부' 항목을 쓰는 데 참고한 문헌은 다음과 같다. 마크 A. 놀, 『미국·캐나다 기독교 역사』, 최재건 역 (서울: CLC, 2005), 류대영, 『미국 종교사』 (서울: 청년사, 2007), 시드니 알스트롬, 『미국 기독교사』, 김영재 역 (서울: 복있는사람, 2019), 김형인, 『두 얼굴을 가진 하나님: 성서로 보는 미국 노예제』 (서울: 살림, 2003), Charles Reagan Wilson, Baptized in Blood: The Religion of the Lost Cause, 1865-1920 (Athens, Georgia: University of Georgia Press, 1980), C. G. Goen, Broken Churches, Broken Nations: Denominational Schisms and the Coming of the American Civil War (Macon, Georgia: Mercer University Press, 1985), Mark A, Noll, The Civil War as a Theological Crisis (Chapel Hill, NC: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2006).
2) '기독교' 항목을 쓰기 위해 참고한 문헌은 클레이본 카슨,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자서전』, 이순희 역 (서울: 바다출판사, 2000)이다. 킹은 생전에 스스로 쓴 자서전을 남기지 않았다. 1998년에 미국에서 출간된 이 책의 원서는 스탠퍼드대학 역사학 교수이자 '킹 목사 문헌 편집 프로젝트' 책임자인 클레이본 카슨이 킹 목사가 남긴 1차 자료를 섭렵하여, 편집자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편집된 자서전이다.
3) 1970년에 뉴욕주 로체스터의 로체스터신학교에 합병되었다. 로체스터신학교는 추가 합병을 거쳐 현재 Colgate Rochester Crozer Divinity School로 교명을 변경했다.
4) 카슨,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29.
5) 카슨,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30.
6) 카슨,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48.
7) 이 주제를 다루기 위해 주로 참고한 문헌은 다음과 같다. 카슨,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교회와사회연구원 편, 『기독교와 비폭력 저항: 마틴 루터 킹을 중심으로』 (서울: 성지, 1989), 클레이본 카슨, 크리스 세펴드 편, 『마틴 루터 킹의 양심을 깨우는 소리』, 양소정 역 (서울: 위드북스, 2005).
8) 로자 파크스가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기를 거부한 사건을 기념하여, 파크스가 버스에 올라탔던 (지금은 사라진) 옛 클리블랜드 애비뉴 정류장 위치에 세워져 있는 기념판.
9) 카슨, 세펴드 편, 『마틴 루터 킹의 양심을 깨우는 소리』, 22.
10) 카슨, 세펴드 편, 『마틴 루터 킹의 양심을 깨우는 소리』, 17-18.
11) 카슨,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25.
12) 카슨,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168.
13) 카슨,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168.
14) 카슨,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471.
15) 카슨, 세펴드 편, 『마틴 루터 킹의 양심을 깨우는 소리』, 17-18. (암살 전날인 1968년 4월 3일에 테네시주 멤피스 소재 찰스메이슨감독기념교회에서 한 연설 '나는 산 정상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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