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를 통해 예수의 역사적인 모습을 재구성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독자 중에는 아마 이런 말 자체를 처음 들어 본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성서학계에서는 이 논제가 20세기 신학의 화두로 부각된 적이 있었다. 신약성서 중에서 특히 네 복음서는, 복음서 저자들이 자신들의 뚜렷한 편집 사상으로 집필한 책이라, 복음서 저자들의 신앙은 잘 드러나 있지만 예수의 역사적인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 노선을 걸었던 대표적인 성서학자로는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와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이 있다. 그 같은 경향에 따라 역사의 예수는 신앙의 그리스도 뒤편으로 물러났고, 오랫동안 수면 상태에 머물렀다.

그러나 오랜 시간 신약성서학을 공부하면서 나는 줄곧 역사의 예수에게 숨을 불어넣고 싶은, 성서에 담긴 역사적 인물인 예수를 발견하고픈 욕구를 느껴 왔다. 그래서 예수의 흔적을 듬뿍 담고 있는 복음서를 전공으로 삼았고, 이제나저제나 예수의 흔적을 더듬고 있다. 나는 여전히 성서 속에서 역사적 인물, 자신의 길로 제자들을 불러 모은 인물인 예수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예수 - 그는 누구인가?> / 제임스 D.G. 던 지음 / 양지우 옮김 / 비아 펴냄 / 140쪽 / 8000원

나처럼 신약성서 공부를 업으로 삼은 연구자들에게는 평생의 과제가 둘 있다. 하나는 신약성서 전체를 일괄하는 '신약성서 신학'을 저술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의 생애와 사상을 종합하는 '예수전'을 쓰는 것이다. 특히, 후자는 평생 신앙인이자 학자로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걸고 쓰는 책이기 마련이다. 루돌프 불트만이나 한스 콘젤만(Hans Conzelmann)도 자신의 연구 성과를 집약해 '예수전'을 썼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예수전' 분량은 기이하리만치 짧다는 것이다. (그들이 쓴 방대한 분량의 '신약성서 신학'과는 달리) 각주나 장황한 참고 문헌, 연구 경향에 관한 부연 설명이 '예수전'에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저명한 영국의 성서학자 제임스 D.G. 던이 쓴 또 하나의 '예수전', <예수 - 그는 누구인가?>(비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짧은 책을 집어 들었을 때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여러 논의를 단순히 짧게 요약한 가이드로'만' 보려는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불트만과 콘젤만의 것이 그러하듯 제임스 던의 '예수전' 혹은 '역사적 예수 입문서'도 다양한 층위로 읽을 수 있다.

불트만은 고전적인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 성서가 더 이상 탐구와 독서의 의미, 가치를 상실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향해 본래적인 자기 자신을 이 오래된 문헌에서 발견하는 법에 대해 말했고, 콘젤만은 예수의 단편적인 가르침이나 증언에 머물러 있던 독자들이 구속사라는 너른 관점에서 성서를 읽을 수 있도록 이끌었다. 마찬가지로 제임스 던은 성서라는 텍스트가 신앙으로 빚어진 창작 문헌이라 쉽게 평하는 이들을 향해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들을 제시하고, 예수에 대한 신앙이 출발하는 지점을 명료하게 정리해 내고 있다. 책은 가볍고 얇지만, 이 책이 담고 있는 의미는 얕지 않다.

저자는 복음서가 역사적 인물인 예수를 발견하는 가장 중요한 자료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찾는 이들이 언제나 다시금 눈길을 돌려야 하는 곳은 성서 그 자체다. 저자는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지적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서라는 자료가 단순한 창작의 산물이거나 해석으로 가득 찬 선전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신약성서 앞머리에 배치된 네 복음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예수 이야기의 정수를 담고 있는 신앙의 준거다.

"바울이 '복음'이라는 말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바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었습니다. 또한 마르코는 바울이 사용했던 이 말을 예수의 활동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확장하고, 이야기가 그의 죽음과 부활에서 절정에 도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신약성서가 '복음서'(gospel)가 무엇인지 결정했다면, 사복음서 저자들은 '복음'(Gospel)이 무엇인지를 결정한 것입니다." (17쪽)

물론 복음서는 예수 당시에 그분 곁에서 밀착 취재한 르포르타주(reportage)가 아니며 하늘에서 내려보낸 책은 더더욱 아니다. 예수보다 훨씬 후대인 대략 기원후 70~110년 사이에 성령의 감화를 받은 신앙인들이 집필한 책이기에 그들의 신학적 해석, 신앙적 의미 부여가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저자는 성서 안에서 이러한 흔적들을 찾아내면서도, 복음서 저자들이 변함없이 지켜 내려 노력했던 역사적 인물 예수의 가르침과 사상이 복음서 안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린다.

"마태오와 마르코, 루가가 예수의 활동으로 표현되는 하느님의 섭리와 하느님나라라는 주제에 끊임없이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합니다. 예수가 사형당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제자들이 하느님나라라는 표현 대신 점차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하느님나라가 이 땅 위에 펼쳐진다거나 실현되리라는 예수의 주장을 고수하기에는 정치적 위험 부담이 지나치게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51쪽)

사도 바울의 편지처럼 예수 자신이 쓴 책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지금처럼 복음서를 두고 이러저러한 고민과 해석은 등장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복잡한 이론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예수 이야기가 충실히 담긴 네 권의 책을 옆으로 치워 두고, 후대에 이뤄진 새롭고 신선한 연구에 눈길을 돌리곤 한다. 이 연구들은 세련되고 흥미롭지만, 깊지는 않다. 그래서일까. 이 짧은 책은 저자의 본문 외에도 눈길을 다시 성서로 향하게 할 여러 책을 곁들여 설명해 놓았다. 덧붙은 설명의 목표는 하나다. 바로 성서를, 역사적 예수를 만나기 위해 복음서를 다시 집어 들고 읽는 것이다.

복음서는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보고 들은 사람들의 이야기며 기록이고, 이 자료를 통해 예수의 생애를 넘어 사상에까지 가닿으려면 오랜 연구와 고민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낡아 해져 보이는 성서 이야기를 묵직하게 받아들고, 붙들고 결국 읽어야 한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보고 들었던 이들, 그 이야기를 충실하게 기록으로 남겼던 이들, 하느님나라에 온 맘과 정성을 다해 헌신했던 이들은 이 이야기에 목숨을 걸었다.

역사적 예수에 관한 어쩌면 너무도 익숙한 이야기들을 조목조목 정리해 가는 노학자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그는 많은 이가 알고 있다고 여길 만한 이야기들을 다시 수면으로 끌어내 분명하고 간결하게 제시해 다시 한 번 우리 신앙의 핵심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유행을 따르는 학계나 새로움을 추구하는 대중들에게 그의 이야기는 놀랄 만큼 진부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의 한복판에 살았던 한 인물을 메시아로, 하느님의 아들로, 그리스도로 여기며 사는 신앙인들에게 이 이야기는 진부한 것, 낡은 것일 수 없고 해질 수도 없으며 물릴 수도 없는 치명적인 이야기가 된다. 말 그대로 우리 삶을 건 이야기가 된다.

잊지 마시라. 역사적 예수와 만나는 일은 우리 신앙의 종착역이 아니다. 우리 신앙은 역사적 예수라는 발판을 딛는 데서, 그리고 예수에 대한 우리의 상을 총체적으로 숙고해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예수와 새롭게 만나는 일은 신앙을 새롭게 시작하는 이정표다. 우리 신앙이 언제나 새롭게 거듭나고, 앞으로 자라나야 하는 것이라면 역사적 예수를 찾는 일을 게을리할 수 없을 것이다. 이곳에 새로운 희망이 움틀 자양분이 있다.

박태식 /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종교학으로 석사, 괴팅겐대학교에서 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성공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현재 성공회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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