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수께서 죽으신 지 2천년이 지난 오늘 다시 우리의 삶 속에 찾아오신다면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며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주실까. 예수께서 제자들과 들판을 거닐며 그들에게 들려주시던 말씀을 상기해 보면 다시 오실 주님이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 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날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고 계셨다. 그 때도 제자들은 제자 중에 누가 더 크냐는 변론을 하며(눅9:46-8) 서로 키 재기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러다 사마리아인의 촌을 지나가는데(눅9:51-56)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자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화가나서 불을 명하여 사마리아 지역을 다 태워버릴까 하여 예수께 물어본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다른 촌으로 가신다.

그러한 일이 있은 후 예수께서 제자들의 신앙관을 바로잡기 위해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눅10:25-37)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으시며 자비를 베푼자가 이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 '너희도 이와 같이' 자비를 베풀라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의 인격에 동의를 구하시는 말씀에 물론 제자들은 주님의 예상대로 자비를 베푼자가 '나의 이웃'이라는 올바른 답을 하였다.

그러나 제사장과 레위인과 사마리아인 이 세 사람 중에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이 우리의 이웃이라는 말씀은 당시 예수의 제자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너무도 어려운 신학적 해석이었다. 오늘 우리는 당시의 현장으로 들어가 예수의 이 말씀이 왜 그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말씀이었으며, 왜 예수님은 당연한 이 말씀을 그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하여 그렇게 애쓰셨는지 그 때의 입장과 상황을 이해하여야겠다.

2.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한 핏줄을 나눈 동족이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뿌리깊은 적대감을 갖고 있다. 예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키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면 왜 이들은 같은 민족이면서도 서로 미워하고 원수처럼 여기는 것일까? 그 역사적인 배경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솔로몬 왕이 죽은 후 이스라엘은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나뉘게 된다. 이때 사마리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에 속했다. B.C. 721년, 앗시리아의 침략으로 북 이스라엘이 패망하게 되고, 앗시리아의 통치를 받게 된다. 니느웨는 바로 이 앗시리아의 수도였다. 이스라엘을 정복한 사르곤 2세는 혼혈 정책을 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을 이스라엘에 와서 살게 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른 나라로 가서 살게 하였다. 그리고 서로 다른 민족들끼리 피를 섞어 놓았다(왕하17:24-41). 그들의 지배를 받는 민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북왕국에 속했던 사마리아는 앗시리아의 혼혈 정책으로 인해 유대인으로서의 혈통의 순수성을 상실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멸시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흘러 남왕국 유다도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게 된다. 그러나 포로가 끝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려 할 때, 사마리아인들도 함께 성전을 재건하려는 계획에 참여하고자 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들의 제의를 거절하였고, 이어서 사마리아인들은 성전 재건을 방해했다(느4장). 그리하여 성전 재건은 오랫동안 지연되었다.

한편 사마리아인들도 따로 그리심 산 꼭대기에 그들의 성전을 세웠다. 사마리아 여인이 어느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물은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요4:19 이하).

그러나 유대인들은 두 개의 성전을 용납할 수 없었다. 성전은 오직 예루살렘 한 곳에만 있어야 했다. 다른 곳에는 성전을 세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이 그들의 독립적인 성전을 갖게 되자, 그들 사이는 더욱 반목의 골이 깊어만 갔다. 하스모니안 왕조의 힐카누스(Hyrcanus, B.C.134-104)가 그리심 산에 있는 사마리아인의 성전을 파괴시켰다. 이 일로 인해 유대인들에 대한 사마리아인의 적개심은 더욱 깊어만 갔다. 그 후로 다시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 중턱에 다시 성전을 지었으며, 지금도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헤롯(Herod the Great)은 이러한 적개심을 해소해 보고자 사마리아 여인과 결혼했지만, 별로 효과가 없었다.

주후 6년과 9년 사이의 어느 유월절, 예루살렘으로 유월절을 지키러 가던 유대인이 갈릴리와 사마리아 경계에 위치한 게마라는 마을에서 살해를 당했다. 그러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를 습격하여 많은 사람들을 살해했다. 그러자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에게 복수하기 위해 한밤중에 몰래 예루살렘 성전 뜰 여기저기에 죽은 사람들의 뼈를 가져다가 뿌려 놓았다. 이 일로 인해 유월절이 제대로 지켜 질 수가 없었다. 성전을 가장 거룩하게 여기는 유대인들에게 이 일은 용서할 수 없는 신성 모독적인 사건이었다. 이러한 일들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의 중오심에 기름을 뿌려 놓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예수 당시에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이 이처럼 서로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심이 극에 달했다. 그들은 거래도 하지 않았고 서로 상종조차 하지 않았다. 유대인이 사마리아 지역에 들어가서 머문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물건도 함께 사용하지 않았으며 한 건물에 같이 머물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같이 앉아서 식사를 하지도 않았다. 돈을 주고받더라도 사마리아인이 직접 유대인에게 돈을 받는 일이 없었다. 유대인이 사마리아 지역에 들어왔다가 떠나게 되면, 그 사람이 남긴 발자국을 따라 가면서 그 발자국을 덤불로 덮고 그곳에 불을 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개심은 그들의 기도문 가운데서도 잘 드러난다. 유대인들도 성전에서 노골적으로 사마리아인들을 저주하는 기도문을 암송했다. 그들은 "사마리아인들이 이방인들(기독교인들 포함)과 함께 한 순간에 멸망당하게 하시고, 저들의 이름을 생명록에서 제거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18개 베네딕션<축원문> 중 12번째 기도문). 유대인들이 예수에게 당신은 "사마리아인이고 귀신들린 사람"이라고 비난한 데서도,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개심이 잘 드러나 있다(요8:48). (참고서적 : 이진희, 유대 문화를 통해 본 예수의 비유, 쿰란출판사, 2001.7.10. pp.283-285.).

3.

그런데 오늘 예수께서 이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가시다가 사마리아 사람을 저주하는 제자들에게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통하여 제자들의 생각을 모두 바꾸어 버리시고 만다. 그렇게도 철천지원수였던 사마리아 사람을 진정한 '이웃'(눅1036-37)으로 등장시키시는 것이 아닌가. 실은 '사마리아 사람'을 진정한 이웃으로 말씀하는 것이 아니고 '자비를 베푼 자'를 이웃으로 가르치시는 장면이다. 사마리아인이나 유대인에 관한 편견을 갖고 '인간'을 대하시는 것이 아니고 아무 편견 없이, 민족적으로는 나의 적일지라도, 종교적으로는 나와 입장이 다를지라도, 인간을 판단함에 있어서는 아무런 편견 없이 현재의 인간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시는 모습이다.

또 어느 날 이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대를 떠나 사마리아를 거쳐 갈릴리로 돌아가시는 길이었다. 그때 수가라는 성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있었던 일이다. 제자들이 빵을 사러간 사이, 예수께서는 물을 길러 나왔던 한 여인에게 말을 건네셨다. 그러자 그 여자는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요4:9)

낯선 남자가 말을 건네서 놀란 것이 아니라,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상종하지 않았는데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인 자신에게 말을 건네서 놀랐던 것이다. 그들은 서로 상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같이 한 자리에서 먹지도 않았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더 의아해했던 것이다.

"유대인인 당신이 어떻게 사마리아인인 나에게 먹을 것(마실 것)을 달라고 하십니까?"

그 여인은 예수에게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하느냐고 물었는데, 앞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그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질문 가운데서도 우리는 사마리아인과 유대인들의 적대 관계를 잘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장벽을 허시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접근하셨다.

이렇게 적대관계에 있는 사마리아인을 내 이웃으로 여기시어 제자들의 잘못된 편견을 바꾸어 놓으시는 예수님. 오늘 우리가 사는 이 한국 땅에 예수께서 오신다면 무어라고 말씀하실까? 남과 북이 이념논쟁으로 혈연관계를 끊고 서로 적대관계에 있는 이곳에 예수께서 오신다면 무어라 말씀하실까? 특히 세계 어느 곳보다도 많은 종교와 종파와 교파가 뒤섞여 있어 서로 심한 종교간의 갈등을 빚고 있는 이곳에 예수께서 오신다면 무어라 말씀하실까?

예수의 가르침과 교훈을 선입견이나 편견이나 적대감이 없이 오늘의 삶 속에서 그대로 재현해 낼 때 우리는 예수의 제자들이요 성도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게 아닌가.

어느 시대와 상황과 장소에 던져진 한 말씀이 그 시대와 상황과 장소를 이해함이 없이 하나의 교리로 받아들여질 때, 그것은 새롭게 변화된 세대 속에서 원래의 의미와 전혀 다른 의미로 전달 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시대와 상황과 장소를 무시하고 아무데나 적용하여 진리라고 말하는 것은 진정한 진리가 아니요 하나의 '교리'이며 이 교리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생명을 거역하는 잘못된 가르침으로 둔갑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진리를 모두 아는 것처럼 행동할 것이 아니라, 항상 부족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함께 배우며 진리를 향하여 나아가는 구도자(求道者)의 정신으로 살아야 되지 않을까. 특히 나와 입장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사람을 모두 빨갱이(이단자)로 정죄할 것이 아니라, 천지의 창조자시요 주재자이신 하나님의 그 크신 섭리를 살피고 묵상하며 서로 다른 입장에 있더라도 존중하며 살아야 되지 않을까.

차이는 나쁜 것이 아니고 존중하고 이해해 주어야 할 것이다. 모든 만물이 동일한 모습이고 모든 사람이 동일한 생각과 행동을 한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차이가 있기 때문에 아름다움이 있고, 차이가 있기 때문에 신기하고 생소한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 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고로 저희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눅9:5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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